이번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2장에 대한 채운샘의 정리 강의가 있었습니다. 텍스트 자체가 어려워서 세미나에서는 주로 부분부분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다보니 전체적인 맥락이나 중요한 점 등을 짚어보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합니다. 물론 저희끼리 파악한 내용도 저희 마음대로일 경우도 많고요.ㅎㅎ 이번에도 채운샘께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주셨습니다.^^
수동적 종합
샘께서는 우선 2장에서 핵심적으로 이해해야 할 부분이 ‘세 가지 종합의 두 사용’이라는 점을 짚어주셨지요. 3장에 가면 사회체를 분석하는 데 그 내용이 더 확장적으로 다뤄진다고 하셨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 종합이 ‘수동적 종합’이라는 점을 강조하셨는데요. 이는 주체를 출발점에 놓지 않는다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사실 이 무의식의 세 종합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죠. 연결 종합, 분리 종합, 결합 종합은 어느 것이 먼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없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를 욕망 기계의 작동으로 설명하는데요. 샘께서 짚어주셨듯이, 기계 개념에서 자주 오해하는 것이 바로 어떤 기계가 먼저 존재하고 그 기계들이 만난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기계 개념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작동성’과 ‘관계’입니다. 접속 이전에는 어떤 것도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접속만이 있다는 점, 다시 말해 ‘~와’만 있다는 점인데요. 이를테면 입과 빵의 접속으로 먹는 기계가, 입과 붓의 접속으로 그림 기계가 생겨나지만, 입과 빵과 붓이라는 규정도 기계와 함께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는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일시적 규정이며, 다른 접속에서는 다른 기계의 탄생과 함께 다르게 규정됩니다.
이처럼 작동의 차원에서 모든 것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나를 작동하게 만드는 외부가 출발점이라는 의미에서 수동이며 수동적 종합이라고 샘께서 정리해주셨어요. 이처럼 작동하는 기계로 비유되는 욕망은 계속 흘러가면서 뭔가와 접속하고 생산하고 또 흘러갑니다. 욕망의 본질은 막히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것이죠.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러한 욕망의 수동적 종합이 이루어지는 장이 바로 실재계(현실계)라고 주장합니다. 생산하는 무의식 자체가 실재계이며, 욕망이 생산하는 것 중에 현실이 아닌 건 아무것도 없다고요. 이 실재계는 라캉의 용어인데, 들뢰즈와 과타리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세미나 시간에 더 미궁 속을 헤맸던 거 같네요.
이처럼 수동적 종합의 원리 속에 성립하는 무의식을 정신분석은 가족의 울타리에 가두어버립니다. 인간의 욕망을 가족적 이미지에 가두면서 사회적인 것과 분리시킵니다.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을 가족에 둠으로써 정신분석은 자본주의의 회로를 계속 돌아가게 하는 데 일조하게 되었고요. 사회와 자본주의에 관련된 내용들은 3장에서 본격적으로 만나게 되리라 예상해봅니다.
세 종합의 두 가지 사용, 그리고 과정으로서의 분열증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두 가지 사용을 오이디푸스적 사용과 분열증적 사용으로 부르기도 하는데요, 전자를 부당한 사용으로, 후자를 정당한 사용으로 구분합니다. 부당한 사용은 신경증적이고 정주적인 특징을 보이는 반면, 정당한 사용은 분열증적이고 유목적입니다. 그러니까 부당한 사용이란, 욕망의 작동(종합)을 규정적이고, 배타적/제한적이며, 일대일응적인 것으로 보는 겁니다. 예를 들면, 기계 개념을 잘못 생각할 때 그런 것처럼, 연결 이전에 어떤 항들이 있어서 그 항들이 접속한다고 보는 겁니다. 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 항이 무엇이기 때문에 접속한다는 생각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무언가에 끌릴 때는 그것이 무엇이라고 규정하기 이전에 정동이 먼저 발생하지요. 그뿐 아니라 여러 조건 속에서 딱히 무엇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요인들이 나를 움직이고 어떤 것과 접속하게 합니다. 욕망의 작동을 이처럼 부분적이고, 비-특유적이며, 포괄적이고, 다의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들뢰즈 과타리가 말하는 정당한 사용입니다. 배타적이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분리, 변화가 가능한 규정, 무엇과 있느냐에 따라 계속 달라지는 주체.
세미나 시간에도 이야기를 나눴지만, 결국 들뢰즈와 과타리가 복잡한 설명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욕망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2장의 마지막을 '과정'에 관한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있고요. 샘께서 정리해주신 것처럼, 무의식은 과정입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고, 멈출 수도 없습니다. 과정으로서의 무의식을 제일 잘 보여주는 것이 문학과 예술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래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을 이야기하며 예술가들의 예를 많이 가져옵니다. 그리고 ‘벽’과 ‘극한’을 이야기합니다. 벽을 돌파하고 극한을 뛰어넘는 한에서의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벽인 동시에 벽의 돌파요, 이 돌파의 실패”(241쪽)인 분열증. 저는 이런 표현들이 애매하고 추상적으로만 다가왔었는데요, 이번 강의에서 샘께서 풀어주신 설명이 마음에 많이 남았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욕망의 본질은 계속 흘러가며 무언가와 만나고 생산하고 또 흘러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런 욕망을 막히지 않고 계속 흐르게 하는 것이 치료라고 보았습니다. 정신분석이 하는 것처럼 사회적 의미체계를 내면화하는 게 아니라 말입니다. 하지만 욕망을 계속 흐르게 하는 일은 간단치가 않습니다. 도처에 벽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계속 흘러간다는 것은 곧 돌파해가는 것(break through)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붕괴될 위험(break down), 실패의 위험에 계속 직면한다는 것을 의미하고요. 사실 알 수 없는 무언가와 만나는 일은 그것이 나를 붕괴시킬 위험을 직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보기 좋게 실패할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기도 하고요. 들뢰즈와 과타리가 말하는 분열자는 그런 위험에 기꺼이 자신을 내여주는 자들을 말합니다. 세미나 시간에 저희는 ‘과정으로서의 분열증’, ‘분열자’가 무엇이고,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냐(!)며 답답해하기도 했는데요^^; 결국 붕괴의 위험, 실패의 위험에 얼마나 나를 열 수 있는가가 관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어려운 일이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2장을 마무리하고, 맑스로 들어갑니다. 계속 부지런히 읽고 따라가보아요 샘들!
- 다음 시간에는 [경제학 비판 요강] 서설을 읽어옵니다.
- 발제는 윤순샘: 1,2장, 혜원샘: 3,4장
- 간식과 후기는 주영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만나요!
"배타적이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분리, 변화가 가능한 규정, 무엇과 있느냐에 따라 계속 달라지는 주체."
존재를 이렇게 종합되고 있는 흐름-기계들로 보기 위해서, 벽들을 마주치고 뚫고갈 무진장한 자기 단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작동의 근본적인 출발점으로서의 외부를 상기해야만 '수동적'이라는 표현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