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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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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고, 내 삶이 힘들거나 경제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이 닥치면 곧장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하곤 합니다. 그런데 실상 자본주의가 뭔지 잘 모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는 과연 제도만의 문제일까요? 우린 자본주의를 공산주의와 대비되는,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경제, 금융에만 한정된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자원은 희소하고 욕망은 무한하다고 여기고, 의사결정을 할 때 기회비용과 효율성을 중시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예산의 범주 내에서 가장 효용이 큰 걸 선택하려고 합니다. 물건을 살 때 가격과 성능, 효과 등을 철저하게 비교하여 최선의 것을 고르고 싶지요. 비단 소비할 때 외에도 직장을 정하거나 사람을 만날 때에도 우리의 머릿속 계산기는 끊임없이 돌아갑니다. 경제학에서 가정한 바와 같이 우리는 원래 이렇게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존재일까요? 그리고 경제적 합리성과 유용성에서 어긋나는 행위나 결정을 하는 건 어리석은 걸까요?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우린 상당히 경제적 마인드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저축, 소비, 대출, 생산 등 돈과 관련된 일, 이윤 추구가 등한시하기 어려운 핵심적인 가치로 작용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입니다. 이번에 세미나에서 읽은 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서설은 우리의 경제적 전제를 물어보는데요. 예컨대 우리에게 생산과 소비는 분리되어 있고, 소비는 돈을 주고 물건이나 서비스를 사는 것이지만, 그는 생산과 소비에 대해 정의를 다르게 내립니다.
# 생산 일반
생산은 뭘까요? 저는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생산, 소비가 무엇인지 질문조차 한 적이 없었네요. 생산물과 생산요소는 모두 다르고 질적인 차이가 있는데, 모든 걸 양적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일반 경제학이 방식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가정들을 전제하여 수학적 모형으로 설명하는 경제학의 문제들을 풀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번에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인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서설을 보면서, 생산, 소비, 분배, 교환에 대한 전제가 무엇인지, 이들이 어떻게 규정되어 왔는지 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경제학에서는 생산 일반처럼 어디에서나 똑같이 작용하는 공통적인 것을 강조하고 규정하는데, 이런 일반적인 범주는 비교도 가능합니다. 동일한 척도를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거죠. 우리의 삶은 이미 세계 공통으로 적용되는 일반에 대해 익숙하기에, 경제학을 배우지 않아도 생산, 소비, 분배, 교환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근대 이전, 아주 먼 옛날인 구석기 시대에도 생산은 이루어졌습니다. 돌도끼나 뗀석기를 만들거나 과일을 따거나 물고기를 잡는 등 다양한 생산 행위가 있었지요. 그런데 구석기인들과 우리의 생산 행위는 같다고 볼 수 있을까요? 마르크스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생산은 로빈슨 크루소처럼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일도 아니고, 무채색의 공간에서 추상적인 노동과 자본을 통해 진행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생산은 언제나 일정한 사회적 발전 단계에서의 생산, 즉 사회적 개인들의 생산입니다. 생산은 그 시대적 조건에 따라 특수성을 내재합니다. 중세, 조선 시대의 생산은 우리가 규정하는 것과 매우 다릅니다. 인간은 계속 뭔가를 만들고 산출했지만, 이를 ‘생산’이라는 렌즈로 보고 규정한 것도 근대에 출현한 것인데요. ‘생산’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특수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우리는 ‘생산’이라는 렌즈로 근대 이전을 판단하며, 후진적이거나 발전이 덜 되었다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생산은 역사와 무관한 영원한 자연법칙들의 틀에 박힌 것으로 서술되며, 때로는 부르주아적 관계들이 사회 일반의 폐기할 수 없는 자연법칙들로 슬그머니 변조됩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는 개인의 소유(점취)를 생산의 조건으로 여기는 반면, 역사적으로 봤을 때 공동 소유가 더 본원적인 형태로 지속되어 왔네요. 결론적으로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생산의 일반적인 전제조건들은 추상적인 계기들이며, 이것으로는 실제의 역사적인 생산 단계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의견입니다.
# 분배, 교환, 소비에 대한 생산의 일반적인 관계
• (생산과 소비) 마르크스는 생산을 다른 과정들과 분리해서 분석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적인 양식인 생산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행해지는 생산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생산은 직접적인 소비이기도 하지요. 자연적인 생식, 예컨대 열매를 맺거나 자식을 낳는 것은 생명력의 소비인 것과 마찬가지로, 생산하면서 능력을 발전시키는 개인은 생산 행위에서 이 능력을 소모합니다. 자연에서도 원소들과 화학 성분의 소비가 식물의 생산인 것처럼 소비는 직접적으로 생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음식물을 소비하면서 머리카락, 손톱, 배설물 등 다양한 걸 신체에서 생산합니다. 이처럼 소비는 생산이기도 하고, 생산은 소비이기도 하는데요. 생산과 소비 사이에는 매개 운동도 일어납니다. 마르크스는 “생산은 소비를 매개하고, 소비의 재료를 창출하며, 생산이 없으면 소비에서는 그 대상이 결여된다. 그러나 소비는 생산물들에게 비로소 주체를 창출해줌으로써 생산을 매개하는데, 생산물들은 이 주체에게 생산물들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생산물이 없다면 당연히 소비할 대상이 없겠지요. 반면, 소비는 생산물이 생산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는데요. 예컨대, 옷은 입어야 옷이고, 집은 거주해야 집으로 입증됩니다. 이 밖에도 소비는 새로운 생산의 욕구를 창출하기도 하고, 생산은 소비 대상, 소비 방식, 소비 충동을 생산하는 등 소비와 생산의 관계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단 하나의 관계로 환원할 수 없습니다.
이 복잡한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3가지로 요약하면 첫째 직접적 일체성으로 생산은 소비이고 소비는 생산입니다. 둘째는 생산과 소비는 타자의 수단으로 나타나고, 타자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인데요. 생산 없이는 소비가 없고, 소비 없이는 생산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산과 소비는 각자 자신을 완결함으로써 타자를 창출하고, 스스로를 타자로 창출하기도 한다는 내용입니다. 어려운 말 같지만, 생산은 생산이 완결됨에 따라 소비를 창출하고, 소비는 소비가 완결됨에 따라 생산을 창출한다는 것이지요. 전자의 경우를 보면, 생산은 일정한 소비 방식은 물론이요, 소비 능력을 욕구로 창출하면서 소비를 이끕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은 우리가 스마트폰을 쓰는 방식, 스마트폰 활용 능력을 욕구로 만들면서 스마트폰을 소비하도록 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세미나 시간에 도반들이 마르크스의 분석 내용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하셨는데,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이 문구들을 곱씹으면서 두고두고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넘어가는 한 걸음이 아닌가 싶어요.
• (생산과 분배) 생산에서는 토지, 노동, 자본을 생산의 행위자로 볼 수 있다면, 분배에서는 지대, 임금, 이자 및 이윤이 나타납니다. 생산 행위를 통해 얻은 생산물은 토지 소유자에게는 지대로, 노동자에게는 임금으로, 자본가에게는 이자 및 이윤으로 분배됩니다. 자본주의 특유의 분배방식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예컨대 노예제에서는 노동이 임노동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이 생산물을 획득하는 방식은 임금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노예는 시간당 임금을 받지 않았지요. 우리에게는 시간당 얼마, 주급, 월급, 연봉 등이 너무나 익숙하지만, 이런 시스템은 긴 역사시대에서 아주 짧은 기간(근대 이후)에만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중세시대, 근대 이전 동아시아 등에서도 활동에 대한 대가가 분배되었습니다. 다만 그 분배의 규정과 방식이 자본주의 시대와 달랐다는 겁니다.
우리는 분배가 생산 이후에 이루어지므로, 생산양식 및 구조, 생산의 결과물 등이 분배에 선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상식적이고 피상적인 견해에 따르면, 분배는 생산물들의 분배로 드러나고, 생산에 대해 준(準)자립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분배가 생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생산이 분배에 의해 구조화되고 규정되는 것처럼 나타난다고 말하네요. 생산에만 주목했다고 비난받기도 했던 영국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는 분배를 경제학의 유일한 대상으로 규정했지요. 리카도는 지대론을 기초로 하여 노동 가치설, 차액 지대론 등 분배의 여러 법칙을 밝혔습니다. 개별적인 개인에게 분배는 생산 내에서 그의 지위를 조건 지우는 하나의 사회법칙으로 나타나는데, 개인은 이 지위 안에서 생산합니다. 즉 개인의 지위가 생산에 선행합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생산을 영원한 진리로 설명하는데, 마르크스는 그들의 의견이 어리석다고 판단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생산이 우선시되는데요. 경제성장률이라고 얘기되는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이 경제 정책의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생산을 늘리는 과학기술과 생산 효율성이 중시되고, 고임금을 부담스럽게 보는 것이 진리로서의 생산을 잘 드러냅니다. 파이를 우선 키우고, 분배는 나중에 하자는 것이 국가 정책 담당자들과 자본가, 경제학자들의 입장인데요. 마르크스적인 견해로 해석하자면 인과관계가 잘못된 것이지요. 분배에 대한 사회적 규정이 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데, 분배와 생산에 대한 관계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분배가 생산에 전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분배는 생산의 산물이기도 해서 둘은 서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일방적인 선후관계만 있다고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환) 우리는 월급도 화폐로 받고, 물건을 화페와 교환하여 구매하는데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서설에는 초기 저작인 만큼 교환가치에 관한 규정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교환에 대한 마르크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도 계속 얘기했지만, 근대 이전에 교환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교환은 과거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질문을 해야 합니다. 교환은 공동체 내부보다는 외부에서 이루어져 왔지요. 공동체 내부에서는 공동으로 물품을 생산하고 사용하며 개인의 개별 소유가 없었기 때문에, 나와 친구, 부모와 자식이 물품을 교환할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는데요. 공동체 A에서는 쌀을 많이 산출하지만, 공동체 B에서는 밀을 많이 생산한다면 두 공동체에서는 쌀과 밀을 교환할 필요성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즉 교환은 구분이 가능한 집단,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교환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교환이 성립하려면, 분업이 존재해야 하며, 사적 교환은 사적 생산을 전제로 합니다. 교환의 강도는 생산의 발전과 구조에 의해 규정되고요. 지금은 교환이 가장 확장되고 고도화된 시기라고 볼 수 있는데요. 결혼식 하객을 돈을 주고 고용한다거나, 상을 치를 때 상조회사를 이용한다거나, 과거에는 공동체에서 상부상조하면서 활동으로 이루어지던 일들이 교환체계에 포섭되었습니다. 그런데 마르스크는 시장, 즉 교환 영역이 확대되면, 생산은 범위가 커지고 더욱 세분화된다고 말합니다. 과거엔 공동체 또는 가족, 사회에서 서로 도우면서 이루어졌던 활동이 시장에서 교환하는 것으로 변모하면, 이들의 행위는 생산에 포함되면서 생산이 늘어나고 경제 규모는 더 커집니다. 집에서 아픈 아버지를 돌보는 것은 생산이 아니지만,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아픈 아버지를 간호하고 정부에서 수당을 받는 건 생산에 포함됩니다.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교환의 영역에 포함되면 그것은 생산이고 경제성장에 이바지합니다. 모든 행위가 시장에서 교환될수록 우리의 생산은 확대되고 경제성장률은 개선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경제성장이 꼭 장밋빛인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네요.
# 정치경제학의 방법
마르크스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경제학의 방법이 어떤 것인지 알려줍니다. 1870년대가 되면 경제학계에서 경제학을 개인의 경제적 행동을 기초로 경제이론을 정립하고자 했는데, 이 시기에 경제학의 이름은 ‘정치경제학’에서 ‘경제학’으로 바뀝니다. 정치경제학 시절만 해도 경제를 정치, 사회와 분리하여 보지 않았습니다. 경제학을 정치, 법률, 철학, 문화 등 사회 전반적인 것과의 관계를 포함하여 분석하고 연구했었지요. 수학적인 모형, 질적인 차이가 탈각되고 모든 요소가 양적으로 환원되는 현재의 경제학은 극도로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에서 전체 사회적 생산 행위의 기초이자 주체인 인구에서 시작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비판합니다. 인구 자체는 하나의 추상이라는 건데요. 인구는 계급들을 무시하고, 계급들이 기초하는 요소들을 반영하지 않지요. 인구뿐만 아니라 민족, 국가, 노동, 분업, 욕구, 교환 등 경제학적 분석 대상은 지극히 추상적입니다. 경제학자들은 생산, 소비, 교환 등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파악하고 인구, 민족, 국가, 여러 국가들처럼 살아 있는 전체에서 시작하지만, 그들은 항상 분석을 통해 몇 가지 규정적인 추상적·일반적 관계들을 발견해 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고 마르크스는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런 추상적 관계는 사유의 경로를 통해 구체적인 것의 재생산에 이르는데요. 정리하면, 사람들이 일을 하는 구체적 ‘노동’이 추상적인 ‘노동 일반’ 또는 ‘노동 자체’가 되며, 이는 근대 경제학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런 단순한 추상은 가장 근대적인 사회의 범주로서 실제로 사실인 것처럼 나타나며 기능합니다. 경제학에서 규정하는 ‘노동’은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작동하며, 이 세계에서는 많은 이들이 노동을 받아들이고, 노동하면서 노동을 재생산합니다.
마지막으로 경제학에서 부르주아 사회는 가장 발전되고 가장 다양한 역사적 생산 조직으로 규정됩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사회를 비판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는 그 이전 사회 형태들의 구조와 생산 관계들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준다고 얘기합니다. 부르주아 경제는 고대 경제 등에 대한 열쇠를 제공해주기도 하는데, 예컨대 지대를 알면, 공물, 십일조 등을 이해할 수 있는 거죠. 이와 함께 어떤 사회적 형태여도 마지막 형태는 과거를 보고 비판할 수 있고, 이를 자신의 렌즈로 일방적으로 파악을 합니다만, 자신의 형태에 대해 스스로 비판하는 건 아주 드물다고 하네요. 이런 마르크스의 의견을 감안하면,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본주의가 어떤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고 이를 비판하는 게 매우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 보이지 않는 손인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밀하게 보고 깊이 있게 통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마르크스가 보여준 것처럼, 소비, 생산, 교환, 이윤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관하여 질문하고, 계보학적으로 탐구하거나 어떻게 작동하는지 꼼꼼하게 봐야겠지요. 다음 번에 읽을 김수행 선생님의 <자본론 공부>가 많은 도움을 줄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 역시 우리가 공부하는 다른 스승님들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한 분이셨네요.ㅎㅎ 평범한 걸 보고 깜짝 놀랄 수 있는 눈... 마르크스의 위대함이 바로 이런 눈에 있다고 얘기하기도 하고요. 저도 '진정 보이지 않는 손인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마르크스를 따라가며 꼼꼼히 보고 싶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