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식과 후기가 함께라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후기가 늦어버렸네요. 죄송합니다.ㅠㅠ 후다닥 써 볼게요!
마르크스의 혁명론
마르크스의 이야기에 공감이 가면서도, 끝내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바로 혁명에 대한 그의 사유였습니다. 그는 자본가들이 아무리 선하더라도, 본성상 ‘이윤 추구’를 따르기 때문에 노동자들을 착취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모순은 점점 더 심화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노동자들은 연대하고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건 필연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에는 욕망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노동자 계급이라고 해서 꼭 노동자로서의 욕망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닙니다. 어떤 노동자는 자본가 계급으로 도약하고 싶은 욕망을 품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지금을 생각해 보면, 연대 같은 건 더더욱 불가능해 보입니다. ‘건물주’나 ‘카페’ 같은 것이 꿈으로 얘기되는 걸 보면, 가능한 한 일을 하고 싶지 않고 소비하면서 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아실현을 위해 워라밸을 중요시하고요. 노동자로서 착취당하고 있음을 각성하려면,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식해야 하죠. 그런데 애초에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식하려고조차 들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을 얘기했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은 ‘계급’으로 묶이지 않을 만큼 욕망과 일상의 양식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거죠. 따라서 구조를 문제 삼기 전에 개개인의 욕망이 어떻게 자본주의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문제 삼지 않으면 다른 삶 같은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의 혁명론을 단순히 이상주의만으로 볼 수는 없겠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필연만을 얘기한 게 아니라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분석했습니다. 왜 공황은 반복될 수밖에 없고, 그 부채는 노동자가 뒤집어 쓸 수밖에 없는가 등등은 지금 저희에게도 충분히 와 닿는 분석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런 것들을 문제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라고 반복해서 묻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흐르고, 마르크스의 이론이 어느 지점에서 한계가 있는지 비판받아도, 그가 이론들을 정립한 그 마음은 지금에도 매우 유효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의 욕망, 자본주의의 속도
자본주의는 ‘효율’을 작동 원리로 삼습니다. 노동자가 하루 8시간 일해서 10년 동안 기계를 사용하는 것보다 하루 16시간 일해서 5년 동안 기계를 사용하는 것 중에서 후자를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5년 안에 새로운 기계가 나타나서 생산 효율을 더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골목 시장을 몰아내고 대형 할인마트가 들어간다든지, 고속도로나 철도 같은 이른바 근대 문물들의 도입 모두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생산 양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최대한 생산 시간과 유통 시간을 줄이기 위한 자본주의적 욕망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죠.
문제는, 지금 저희의 욕망에도 자본주의적 효율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효율은 ‘생산 시간’과 ‘유통 시간’만 줄이는 게 아니라 동일한 양, 동일한 제품 중에서 더 싼 제품에 대한 선택으로도 나타납니다. 공정무역이나 한살림에서 아무리 좋은 의도로 상품을 생산하고 유통하려고 해도 어려움을 겪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착취당하고 있다는 얘기보다 당장의 ‘g당 얼마’가 피부에 와 닿는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적 욕망이 육화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어딘가에 있는 자본주의의 착취 구조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전혀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당장 가격 경쟁에 빨려 들어가지 않을 만한 우리 자신의 앎, 상품과 관계 맺는 다른 논리가 필요합니다. 마르크스는 이를 상품 분석으로 시도했던 것 같은데요.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시도할 수 있을까요?
최근 여기저기서 ‘취약함’에 대해 듣고 있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우리 또한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누군가를 착취하고 있지만, 착취당하는 존재이기도 하죠. 이 착취의 고리를 실마리 삼아 다른 조건, 다른 관계에 있는 존재들과 연결될 수 있을 때 상품 가격표에서 가격 이상의 무언가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대략 여기까지 얘기하다가 세미나 시간이 끝나서 토론이 이어지지는 않았는데요. 가령, 일단 당장 떠오르는 것은 ‘고기’ 정도인데요. 생명이 지워진 동물들의 몸과 고유한 신체성이 지워진 우리 몸을 겹쳐본다든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구체적으로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어떤 취약함을 공유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을 대강이라도 보고 나니, 그가 개인의 욕망을 무시했다는 들뢰즈와 과타리의 비판이 이해 되는 것 같아요. 이제 <안티 오이디푸스>로 돌아가면 또 새로운 점들이 눈에 들어올 것 같아 기대되네요ㅎㅎ "자본주의적 욕망이 육화된 존재"인 우리가 무엇을 시도할 수 있을지도 계속 함께 얘기나눠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