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세미나 3학기 첫 시간에는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10~11장, 니체의 <도덕의 계보> 제2논문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원시사회와 공동체, 국가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는데요, 저는 클라스트르가 “최초의 여가 사회이자 풍요로운 사회”(243쪽)로 묘사하는 원시사회 같은 곳에서 살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모두가 거쳐야 하는 입문 의례만 없다면 말입니다.^^
클라스트르는 원시사회의 성인 입문 의례가 신체에 잔혹하게 고통을 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고통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날카로운 도구 대신 모서리가 무딘 돌로 살을 찢기도 하고요. 입문 의례의 최종 목적은 항상 “고통을 겪게 한다는 것”(225쪽)입니다. 또한 의례가 끝난 후 모든 고통이 잊혔을 때에도 남을 흔적들(상처 자국)을 남기는 것이고요. 사회는 그렇게 젊은이들의 신체에 ‘사회의 각인’을 새겨넣습니다. 각인은 ‘망각에 대한 장애물’이고, 각인을 간직한 신체는 ‘지혜의 기억’을 잊지 않게 됩니다. 니체도 “고통 속에 가장 강력한 기억의 보조 수단이 있음”(<도덕의 계보> 400쪽)을 언급하는데요, 원시사회에서 모든 구성원들에게 고통을 통해 각인하려 한 ‘지혜의 기억’은 무엇이었을까요?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모든 신체에 똑같이 새겨진 각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너는 그 누구보다 낫지도 않고 못하지도 않다.”(231쪽) “너희들은 권력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고 복종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233쪽) 이들이 잔혹한 의례를 통해 모두의 기억 속에 새겨넣고자 한 것은 ‘불평등의 금지’라는 원시의 법이었습니다. 원시사회는 권력이 개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물자는 전원에게 동등하게 나눠지고, 필요한 것을 충족하기 위해 각자의 능력에 맞는 일이 주어집니다. 지속적인 교환이 이루어져 사적 축적을 막았으므로 ‘소유의 욕망’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최초로 풍요로운 사회’인 원시사회는 “과도한 풍요로움을 향한 욕망을 허용하지 않”(253쪽)았습니다. 이런 묘사들을 읽고 있자니 마르크스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떠오르기도 했는데요. 필요하다면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이런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원시사회는 사실 “모든 탈출구가 막혀 있기 때문에 어떤 것도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자체로부터 일탈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클라스트르는 원시사회를 “영원히 자기 재생산하는 사회”라고 표현합니다(262쪽).
원시사회의 이런 특징들은 ‘국가’가 출현하지 못하게 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불평등을 금지하는 원시사회에서는 추장조차 우리가 생각하는 ‘권력’을 지니지 못하죠. 추장은 오직 사회에 봉사하기 위한 존재일 뿐, 진정한 권력은 ‘사회’에 있습니다. 추장이 이런 관계를 위배하려 할 경우 사회는 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욕망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부족을 도구로 삼고자 하는 추장은 부족으로부터 버림받게 됩니다. 저희는 ‘위신’만 있고 ‘권력’은 없는 추장의 모습이 잘 상상이 가지 않았는데요. 추장의 주요 임무인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그가 가진 유일한 수단은 ‘말’뿐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재판관이 아니었기에 대립을 조정하거나 어느 한 쪽의 편을 들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언변만으로 무장한 채 사람들을 조용히 잠재우고 서로 비난을 멈추게 하며 언제나 상호 이해 속에서 생활하던 조상들을 따르자고 설득하기 위해 말을 사용”(255쪽)할 수 있을 뿐이었죠. 설득에 실패하면 분쟁은 폭력을 통해 해결하게 되고, 추장은 위신을 잃게 됩니다.
저희는 추장의 말과는 조금 다른 ‘예언자들의 말’도 흥미로웠습니다. 클라스트르는 15세기에 투피-과라니 사회를 흔들었던 이상한 현상을 소개하는데요. 사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정치권력을 갖춘 추장제가 형성되자, 추장과는 다른 종류의 말과 이야기로 사람들을 이끌어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카라이들’이라 불린 이들은 예언적인 말, 매우 반항적이고 전복적인 말로 수천 명의 인디언들을 이끌고 ‘신성한 행복으로 가득한 사회’를 찾아 여행을 떠납니다. 추장의 권력을 파괴하는 봉기를 일으킨 건데요, 이는 투피-과라니 사회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던 국가의 출현을 막은 것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추장의 말’과 이 ‘예언자의 말’이 어떻게 달랐을지 궁금했습니다. 분쟁을 조정하는 추장의 말은 논리적이고 설득적인 언어였을 것이고,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죽을 때까지 따르게 한 예언자의 말은 다른 힘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클라스트르는 ‘예언자의 말하기’에 권력의 원천, 국가의 시초가 내재해 있었을 거라고 보는 듯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권력으로 이어지는 언어와 권력을 해체하는 언어에 관해 생각해보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나왔고요.
<도덕의 계보> 제2논문에도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지만 국가와 공동체와 관련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도덕의 계보>에서는 공동체와 구성원,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 보았지요. <안티 오이디푸스>로 들어가서 관련 내용과 함께 다시 얘기나눌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 다음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3장 1,2절을 읽고 내용을 정리해옵니다.
- 간식은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만나요!
'힘에 의한 평화'라는 오래된 구호가 다시 외쳐지고 있는 이상한 시대에,
원시사회가 가진 '불평등의 금지'를 위한 각고의 각인작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존재들 간의 위계를 없애는 것, 중심적이고 초월적인 권력 장치의 형성을 억제하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했을까요?
국가가 세워지고 유지되기 위해서 감행되어야 하는 폭력과 원시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통 중 어느 쪽이 더 견딜만한 것인지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