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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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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라캉 읽기> 3장과 4장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상상계와 상징계에 이어 저자는 팔루스와 아버지의 이름, 초자아, 무의식과 주체 개념에 대해 설명합니다. 확실히 내용이 복잡해지면서 점점 어려워지고 있지만, 프로이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분석들이 흥미롭기도 합니다. 프로이트보다는 오히려 들뢰즈와 과타리의 시각과 더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는데요, 라캉의 ‘기표’와 들뢰즈 과타리의 ‘코드’, ‘코드화’ 개념을 예로 들어주셨지요. 앞으로 <안티 오이디푸스>로 들어가면 다시 자세히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라캉이 말하는 ‘결여’나 ‘소외’의 의미가 들뢰즈와 과타리가 비판하는 의미와는 다르게 쓰인 듯하다는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분명하게 정리되지는 않았는데요, 이 점도 계속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 이야기 나눈 3장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 자신만의 독특한 구조적 모델을 개발합니다. 그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상상계에서 구축된 어머니와 아이의 이자관계를 깨뜨리는 삼자구조를 형성합니다. 어머니와 아이로 이루어진 이자구조는 세 번째 요소의 개입으로 깨어지게 되는데, 라캉은 이 세 번째 요소를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부릅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실제 아버지를 뜻하지 않으며, 아이의 욕망을 금지하기 위해 개입하는 권위와 상징계의 법을 의미합니다 . 이 상징계로 들어가는 과정, 즉 어머니와의 이자관계에서 삼자관계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팔루스’입니다. 팔루스는 하나의 기표로서 세 개의 범주(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각각에서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데요.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킬 것으로 가정되는 대상을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상상적’이며, 욕망은 충족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입니다. 또한 상상적 팔루스를 포기하는 과정은 ‘결여’ 또는 ‘부재’에 대한 인식을 수반합니다. 따라서 팔루스는 “우리가 상실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영원히 찾아 헤매지만 사실 그것은 애초에 우리가 가져본 적이 없는 궁극적인 욕망의 대상”(91쪽)입니다.
“라캉에게 초자아는 상징계에 위치하는 것으로서, 법에 대해 친밀하지만 동시에 역설적인 관계를 지닌다. (...) 초자아는 한편으로는 주체의 욕망을 규제하는 상징적 구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에 대한 몰상식하고 맹목적인 명령이기도 하다. 라캉이 세미나 XX에서 지적하는 대로 우리에게 즐기라고 강요하는 것은 다름 아닌 초자아이다.” (93쪽)
이번 부분에서 ‘초자아’를 설명하는 부분도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프로이트에게 초자아는 근친상간의 금지가 내재화되고 오이디푸스적 욕망이 포기되는 과정에서 구성되며, 도덕적 양심의 발달과 관련됩니다. 라캉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프로이트가 개진하지 않은 본질적인 역설을 지적합니다. 초자아는 법인 동시에 그 법을 파괴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인데요. 초자아로서 기능하는 아버지는 무엇보다 어머니와 아이의 이자관계를 파괴하고 근친상간의 욕망을 금지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아이의 욕망을 법에 종속시키지만 자신도 법에 복종합니다.
반면 초자아로 기능하는 또 하나의 아버지는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에 나오는 원초적 아버지(primal father)입니다. 그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인물로, 그 자신은 법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아버지와 구별됩니다. 따라서 초자아와 더불어 아버지의 개념은 매우 역설적인 방식으로 기능합니다. 법과 권위에 대한 복종이 그 법과 권위를 위배하고자 하는 욕망과 늘 함께 간다는 의미이기도 한데요. 그래서 응징적인 초자아와 상징계에 복종하면 할수록 금지된 것을 어기고자 하는 욕망도 강렬해집니다. 이러한 초자아의 기능(‘범법과 응징의 악순환’)이 어떻게 사회에 적용되는가에 관해 지젝은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의 분석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치 이데올로기가 억압적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떻게 ‘개념적 유대인’을 구성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매우 설득력있게 읽혔는데요. 유토피아적 환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체계의 일부가 부인되고 억압되어야 한다는 것, 주어진 공동체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방법은 타자에게 ‘과잉 향락(excessive enjoyment)’을 귀속시키는 것 등의 분석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어서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 라캉의 개념 가운데 가장 복잡하다는 ‘실재계’와 ‘성차’가 남았는데요. 라캉이 제시하는 세 개의 범주가 완성되는 만큼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의문점들까지 해소되는 시간이 되길 기대해봅니다.
- 다음 시간에는 <라캉 읽기> 5장과 6장을 읽어옵니다.
- 발제는 5장: 성연샘, 6장: 영임샘
- 간식과 후기는 건화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