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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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 세미나 2학기 세 번째 시간에는 <라캉 읽기> 5장과 6장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드디어 라캉의 세 구조 중 가장 난해하다는 실재계에 관해 알아보았는데요, 듣던 대로 난해했지만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실재계는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 어떤 것, 미지의 것을 말하는데, 그걸 언어로 표현해보려는 시도들이 어렵지만 재미있었어요. 저희는 5장에서 다루고 있는 실재계, 환상, 대상 a, 주이상스 개념과 6장에서 이야기하는 성차 개념을 따라가며 라캉의 개념들을 이해해보는 마지막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중에서 실재계와 대상 a에 관해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실재계는 욕구가 발생하는 장소이며, 그것을 상징화할 방법이 없다는 의미에서 전상징계적이다. (...) 실재계는 대상이나 사물이 아니라 욕구의 형태로 우리의 상징적 현실에 침입하는, 억압되어 있고, 무의식적으로 기능하는 어떤 것이다. 실재계는 일종의 편재(遍在)하는 미분화된 덩어리로서, 우리는 상징화 과정을 통하여 주체로서 우리 자신들을 구분해 내야만 한다. 실재계를 상쇄하고 상징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사회현실’이 생성된다. 요약하면 존재란 사고와 언어의 산물이며 실재계는 언어에 선행하므로 실재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계는 ‘상징화에 절대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131쪽)
실재계라는 이름 때문에 ‘공간적 장소’처럼 생각하게 되지만, 저자는 초장부터 이것이 어떤 ‘사물’도 아니고 ‘현실’도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 개념은 라캉의 생애 전반에 걸쳐서 변화하기 때문에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는데요. 처음에는 거울단계의 상상계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구상되었고, 현상과 이미지 영역 너머에 있는 ‘즉자적 존재’로 정의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결정적인 수정과정을 거쳐서 세 개의 범주 중 하나로 격상되었고, 나중에는 외상(trauma)이라는 개념과 연관되면서 ‘상징화될 수 없는 것’이란 의미가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상징계(사회현실) 내부로 완전히 흡수될 수 없는 것’, ‘언어를 통해 변형될 수 없는 잔여’, ‘초과분’ 등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러한 실재계는 우리가 직접 조우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오직 어떤 형태를 통해서만 섬광처럼 일별하게 됩니다. 그 어떤 형태가 바로 ‘대상 a’입니다.
세미나 시간에도 이 둘의 차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지만, 저는 실재계와 대상 a가 거의 같은 것처럼 느껴졌어요. 둘 다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결여와 상실감, “우리가 주체들로서 가지게 되는 지속적인 느낌”(138쪽)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욕망하고 그걸 찾아 헤매지만, 목표를 이루고 난 후에는 다시 다른 것을 욕망하게 되지요. 우리가 이처럼 끊임없이 메우려고 애쓰는 공백, 우리 존재의 핵심에 자리 잡은 공백을 실재계로 볼 수 있고, 이 공백으로서의 실재계를 이해할 수 있는 한 방식이 대상 a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상 a는 “공백이자 간극인 동시에 우리의 상징적 현실에서 그 간극을 순간적으로 메우게 되는 모든 대상”(139쪽)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상징화를 벗어나는 것이면서 상징화된 주체의 매끈한 표면에 균열을 내어 공백을 마주하게 하는 무언가가 대상 a입니다.
라캉은 세미나 XI에서 정신분석의 본질이 '상징화에 저항하는 실재계와 조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대면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개념이 ‘우연(tuché)’이라고 하는데요. 우연은 “주체가 견뎌내거나 동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외상의 한 형태”(150쪽)로 나타납니다. ‘외상’은 ‘상처’를 뜻하는 그리스 단어로부터 파생되었는데,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라틴어가 ‘푼크툼(punctum)’입니다. 이는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의 기본 요소로 소개한 말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진에는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이라고 불리는 두 가지 기본 요소가 있는데, 스투디움은 사진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을 가리키고, 푼크툼은 그 매끄러운 표면에 균열을 내는 세부를 말합니다. 이처럼 별안간 찾아와 우리를 관통하고, 상처 입히며, 사진의 스투디움(상징계)에 균열을 내는 세부는 “대상 a라는 형태를 통한 실재계와의 섬광 같은 만남”(150쪽)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설명들은 들뢰즈의 ‘마주침(조우)’ 개념을 떠올리게 했는데요. 들뢰즈는 우리가 불현듯 만나게 되는 어떤 낯선 것과의 마주침으로부터 비로소 사유를 시작하게 된다고 말하지요. 그 이전에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기존의 것을 반복하는 재현일 뿐이라고요. 베르그손이 실재 세계를 설명하고 있는 방식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속으로서의 세계’를 실재 세계로 보았고, 인간 지성의 습관적인 작동 방식으로 인해 우리는 그 실재 세계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지성의 습관을 멈추고 주의를 기울일 때 비로소 실재 세계의 인식에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라캉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요. 세미나 시간에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래서 들뢰즈와 과타리가 라캉의 이론을 비판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정신분석학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가정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점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다음 주부터 다시 읽게 되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확인하게 되겠지요?^^
- 다음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2장 1~3절을 읽고 내용을 정리해옵니다.
- 간식과 후기는 정은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뵈어요!
들뢰즈는 과타리가 그에게 번개였다고 말했는데요. 저는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라캉이 굉장히 들뢰즈에게 영감을 많이 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핍'과 '소외', '여성성'과 '남성성' 등도 라캉의 맥락에서 보니, 들뢰즈가 얘기하는 지점과 유사한 부분들이 느껴졌네요. 정신분석학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냥 이건 나쁜거야라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어요. ㅋㅋ 대상 a 개념도 무척 흥미로웠는데요. 상징화될수 없고, 상징화하려고 해도 빠져나가는 부분으로 이런 사건적 주체를 통해서 우린 다른 길로 나아갈 수 있죠. 이번에 읽은 라캉을 통해 <안티 오이디푸스>가 어떻게 다르게 읽힐지 기대됩니다.^^
"우리가 이처럼 끊임없이 메우려고 애쓰는 공백, 우리 존재의 핵심에 자리 잡은 공백을 실재계로 볼 수 있고, 이 공백으로서의 실재계를 이해할 수 있는 한 방식이 대상 a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서 좀 정리가 되는 것도 같네요~
실재계는 the Real인데, 자꾸만 생각하게 되는 개념인 것 같아요.. 상실의 느낌으로 포착되는 세계라고 해서인지, 하루키 소설이 자꾸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