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실재계와 주이상스에 대해 읽었습니다. 라캉의 매우 난해한 개념 중 하나인 실재계에 대해 알아보며 다들 멘붕에 빠졌습니다만...그래도 조금씩 더듬어가며 이런 건가? 하며 읽어 나갔지요. 실재계, 외상, 대상a, 주이상스, 팔루스 등등 번역도 안되고 설명도 어려운 개념의 바다를 지나가며... 관련 내용은 반장님의 자세한 후기를 참고하시길^^
저는 이번 세미나에서 제기된 질문이 기억에 남아서, 그 질문들을 중심으로 후기를 써 보겠습니다. 주이상스에 관한 것입니다. 주이상스란 향락(enjoyment)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라캉은 이와 가장 유사한 상태로 성 테레사의 법열을 예로 들었습니다. 일종의 성적쾌락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신비주의적, 종교적 황홀경의 뉘앙스가 이 개념에 있는 것이죠. 프로이트는 인간의 일차적 동기는 쾌락의 충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임상을 거쳐보니 주체들이 고통스럽고 외상적인 경험들을 강박적으로 반복하며 이것을 쾌락원칙보다 우위에 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로이트는 이를 '죽음 충동'으로 정의합니다. 생명의 일차적 목표는 죽음을 향한 적절한 길을 찾는 것이라고 본 것이죠. 라캉은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 이론을 받아서, 우리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의해 이끌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나'의 해체, 자아의 해체입니다. 주이상스란 경험세계의 쾌락 너머의 우리를 충족시킬 진정한 쾌락 같은 것인데, 그건 내가 해체될 때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는 경험 속에서 쾌락을 경험합니다만, 이것은 늘 불충분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충족되는 욕망이란 결국 내용 없는 기표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라캉은 이를 환상과 대상a와 환상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내가 대상을 포착하고 그걸 욕망한다고 하지만, 욕망하는 대상을 특정하는 순간 내가 원하던 뭔가는 그 상징화에 저항하며 사라집니다.
라캉은 이 욕망의 원인이자 대상을 대타자 A에 대비하여 '대상 a'라고 했습니다. 대상a는 "대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남겨진 실재계의 잔여"입니다. 욕망하는 대상에게서 느끼는 이상적 완전함(상상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이유들(상징계) 너머에 있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함 같은 것이죠. 대상a는 고착화되면 환상으로 기능합니다. 현실을 떠받치며 실재계가 우리 일상생활의 경험 안으로 잠입할 때 방해하는 역할을 하지요. 이때 환상을 기반으로 한 현실을 코드, 실재계는 그 코드에서 벗어나는 어떤 가능성의 장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정신분석은 이 환상을 해체하고 고착화된 환상을 다시 공백인 대상a로 전락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중심기표-팔루스를 대상a로 전락시키는 것이죠. 우리 욕망의 작동 중심에 있는 것이 공백이라는 것을 마주하고 그 무의미를 견디는 힘을 기르는 것. 이 과정을 라캉은 '환상 가로지르기'라고 합니다. 이때 중요한 건 환상이 사실 필요 없다거나, 우리에게 해악만 끼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회 시스템도 일종의 환상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인간 삶의 조건들-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켜져야 한다 간주하는 어떤 선-도 환상이죠. 나의 상식, 욕망, 조건들은 사실 내가 아닌 것으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자의 언어를 살고,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기표에서 기표로 이동하는 욕망의 운동 속에서 삽니다. 욕망은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실망하게 되고요. 그런데 주이상스는 확실하고 일관된 만족을 이릅니다. 문제는 주체가 욕망의 운동 속에서 형성되는 데 반해 주이상스는 주체의 해체라는 겁니다. 추구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그 결과 주이상스는 욕망에 대비되면서 욕망의 한계로서 그 외곽선을 긋습니다. 욕망이 실패할 때 우리가 경험하는 불안, 결핍, 결여. 우리를 이끄는 더 나은 것에 대한 욕망. 주이상스는 닿을 수 없는 한계로 우리의 욕망을 이끕니다. 어쩐지 옛날 카툰에 나온, 눈 앞에서 흔들리는 당근을 쫓아 달리는 말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그런데 이렇게 여기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뭔가를 계속 좇는 게 삶이라면, 만족이라는 건 결국 없는 걸까요? 우리가 느끼는 욕망은 계속 텅 빈 기표 사이를 이동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자족의 길이란 건 없는 걸까요?
라캉의 이론에는 이런 질문에 대해 답을 주는 것 같은 몇몇 개념들이 등장합니다. 가령 '성차' 부분. 중심기표인 팔루스를 가진 '척' 하는 남성적 주이상스와 달리, 복잡한 과정을 거쳐 팔루스를 가장하는 여성적 주이상스는 중심기표와 거리를 두는 동시에 그것을 전복시킬 가능성을 품게 되니다. 이는 마치 들뢰즈/가타리의 소수성을 떠오르게 하지요. 또 실재계와 조우하는 '우연'. 바르트에게서 빌린, 사진에서 일반적인 지시대상을 가리키는 '스투디움'에서 튀어나오는 '푼크툼' 개념. 이것들은 주체가 환상에 매몰되지 않고 그 이상(실재계)와 만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그 '섬광 같은 만남'은 들뢰즈/가타리가 말한 "욕망은 생산"이라는 말과 대비해 보면 다소 부정적으로 들리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가타리가 이 정신분석의 전통을 받아 어떻게 전복시켰는지는 다음 시간부터 알아갈 수 있겠죠(제발...)? 라캉 이후 읽는 <안티 오이디푸스>가 어떻게 다가올지, 기대가 됩니다~
다른 개념들도 그렇지만 주이상스는 정말 감이 안 왔어요. 작품 속의 성 테레사가 느끼고 있는 주이상스. 욕망과는 다른, '확실하고 일관된 만족'이라는 주이상스..
간략하게나마 라캉을 접하고 읽는 <안티 오이디푸스>가 어떻게 다가올지 저도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