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4장 등록의 분리 종합, 5장 소비의 결합 종합을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원래 <안티 오이디푸스>는 어려웠지만, 이번 부분은 더, 더, 더 어려웠던 것 같네요! 읽다가 다시 앞 문장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고, 한 문단을 읽으면 이전 문단이 기억나지 않고, 한 단어, 한 단어가 무슨 뜻인지 가늠하기 어려워 죽,,을,,뻔 했습니다. 그래도 세미나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정리해가는 것 같습니다.
등록의 분리 종합
우선 <등록의 분리 종합>에서는 ‘분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에 관한 이야기로 정리됐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끊임없이 ‘분리’합니다. 남/녀. 하늘/땅, 음/양, 흑인/백인, 내국인/외국인 등등. 들뢰즈와 과타리는 인간이 세상을 분리하는데, 그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그 분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첫 번째 사용법은 저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들뢰즈와 과타리는 ‘오이디푸스적 등록’이라고 정의합니다. ‘오이디푸스적 등록’의 특성은 분리 종합이 배타적, 제한적, 부정적 사용을 도입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다른 사용법으로는 ‘분열증적 등록’이 있는데, 그 특성은 긍정적, 무제한적, 포괄적인 사용을 말합니다. ‘오이디푸스적 등록’과 ‘분열증적 등록’을 조금 더 간편하게 구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이디푸스적 등록은 <…아니면…> 형식으로, 세상을 ‘남자 아니면 여자’, ‘아이 아니면 부모’, ‘죽음 아니면 삶’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항과 항은 서로 대립하고, 배제하도록 작동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분열증적 등록은 <…이건 …이건>의 형식입니다.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아이이거나 부모이거나’, ‘살거나 죽거나’로 구분하는 겁니다. 여기서 항과 항은 고정된 축이 아닙니다. 어떤 측면에서 나타나느냐에 따라, 누구와 언제 함께 있느냐에 따라 언제나 다른 항으로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남성/여성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어떤 사람, 어떤 사물, 어떤 분위기에 있느냐에 따라 남성적인 면이 드러나기도 하고, 여성적인 면이 드러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죽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장(場) 속에 있느냐에 따라 생기 넘치기도 하고, 무기력(생 의지가 감소)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횡단-성애자입니다.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며 부모와 아이를 가로지릅니다.
‘오이디푸스적 등록’과 ‘분열증적 등록’의 큰 차이 중 하나는 항과 항 사이의 거리를 긍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차이에 있습니다. 세미나를 하면서 ‘거리(차이)를 긍정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주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가 정리한 바로는 주체/실체가 ‘있다’라는 관념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면…>의 형식입니다. 남/녀, 흑/백, 정상/비정상이 고정되어 있으면 등급을 나누고, 위계를 부여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분법적 분리 속에서는 거리(차이)를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계들의 연결/접속의 결과(잔여)로 주체를 바라보는 것이 <…이건 …이건>의 형식입니다. 일시적으로 남/녀, 흑/백, 정상/비정상을 나눌 수는 있어도 시간 속에서, 힘의 배치가 달라지면서 남자는 여자의 자리에 가고, 흑은 백의 자리에 가고, 정상은 비정상의 자리에 갈 수 있습니다. 항은 이미 다른 항을 품고 있기에 항 사이에 등급을 나누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거리가 긍정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소비의 결합 종합
<소비의 결합 종합> 파트에서는 이 소제목이 도대체 무엇인지 다들 질문을 했습니다. 세미나에서 소비=느낌=진동의 잔여=향유라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소비, 잔의 느낌에서 ‘주체’를 경험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소비의 결합 종합>의 장에서는 아마도 주체의 문제를 주로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소비=느낌=진동의 잔여=쾌감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요? 우선, 들뢰즈와 과타리는 기관 없는 몸을 하나의 ‘알’로 설명합니다. ‘알’은 생명이 탄생하는 잠재적인 공간입니다. 기관 없는 몸이 하나의 알이라는 말은 기관 없는 몸을 주체가 생겨나는 잠재적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체는 텅 빈 공간에 독립적인 공간에서 생겨나지 않습니다. 축선들이 가로지르고 있고, 여러 지대가 띠를 두르고 있고, 마당들 또는 장(場)들이 자리 잡고 있고, 기울기들로 측정되며, 퍼텐셜들이 주파하고 있고, 문턱들이 표시되고 있는 가운데서 탄생합니다. 복합적인 힘들의 장 속에서 주체는 생성, 추락과 상승, 이주와 이동 등을 겪는 것입니다. 기관 없는 몸 위에는 인종들, 문화들, 신들이 가로지르면서 끊임없이 변합니다. 분열증적 결합 종합은 유목적이며, 다의적입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적 결합 종합은 분리차별적이고 일대일대응적인 함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소비=느낌=진동의 잔여=쾌감을 가족이라는 ‘소우주’에 으깨 넣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실제로는 수많은 힘들 속에서 무의식이 형성되지만, 그것을 가족 관계로 환원해버리는 겁니다. 주체는 사적인 장(가족)에 갇히게 됩니다. 세미나에서는 자본주의가 가족과 사회를 분리한다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자본주의와 가족주의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좀 더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으로 후기를 마칩니다~
저도 정리하다 죽,을,뻔...! 세 종합에 관한 부분은 정말 넘나 복잡하고 어렵네요.
기관 없는 몸은 다양하게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저도 제일 먼저 '잠재적인 것'이란 이미지가 떠올라요. '알'의 이미지.
어렵지만 계속 함께 읽어나가보아요 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