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2장 6절과 7절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6절에서는 ‘욕망적 생산의 세 종합’에 관한 내용이 이어져서, 지난 시간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더 토론할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적 생산의 오이디푸스적 사용과 이에 대립되는 분열증적 사용에 관해 이야기하는데요. 6절에서는 오이디푸스적 정신분석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종합이 무의식(욕망)의 ‘의미’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부당한 사용임을 고발합니다. 이들이 처음부터 줄곧 주장해오고 있듯이, 욕망은 오직 ‘작동’할 뿐이지 ‘의미’를 묻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은 그 어떤 의미의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오직 사용의 문제들만을 제기한다. 욕망의 물음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가 아니라 그것은 어떻게 작동할까이다. 네 것이건 내 것이건, 욕망기계들은 어떻게 기능하며, 어떤 고장을 자신의 사용의 일부로 삼을까? 어떻게 욕망 기계들은 자신들의 체제를 사회 기계들과 대결시킬까?” (195쪽)
들뢰즈와 과타리에 따르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라는 물음은 '초월적 실행'으로 이어집니다. 정신분석은 그 물음으로부터 어떤 ‘통일성-총체성’이 주체들에 결핍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르고, 초월적이며 공통적인 어떤 것을 외삽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 “공통적이고 초월적이고 부재하는 그 어떤 것은 남근 내지 법이라고 명명”(136쪽)됩니다.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형식과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기표입니다. 초월적 남근이라는 ‘일자’가 없으면 관련된 항들은 하나의 삼각형을 형성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의 ‘초월적 사용’에 대립하는 것으로 들뢰즈와 과타리는 '초월론적인 동시에 유물론적인 분석'인 ‘분열-분석’을 제안합니다. 앞의 3~5절에서 소개한 '세 종합의 분열증적 사용'이 그것인데요, 연결 종합들의 부분적 비-특유적 사용, 분리 종합들의 포괄적 비제한적 사용, 결합 종합들의 유목적 다의적 사용이 있었지요. 이는 무의식의 종합들의 적법한 사용들을 정의할 수 있게 합니다.
토론 중에, 부당한 사용과 적법한 사용, 초월적 사용과 초월론적 분석과 같은 용어의 의미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는 들뢰즈와 과타리도 밝히고 있듯이 칸트에게서 온 것이지요. 칸트 철학에서 '초월적(transcendent) 차원'은 ‘물자체’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서양철학에서 때로는 본질로, 때로는 실체로, 신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것들을 말합니다. 칸트는 그런 초월적인 것을 모두 폐기하고 ‘초월론적(transcendental)’이라는 제3의 차원을 발견하는데, 이는 초월적 차원과 현상계를 나누면서 이어주는 차원입니다. 경험 이전에 있으면서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차원, “현상계에 대상이 나타나도록 만들어주는 조건인 동시에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 경험의 가능 조건”(김상환, <왜 칸트인가>, 34쪽)이기도 합니다. 들뢰즈의 사유를 ‘초월론적 경험론’이라고 부르는데요, 이처럼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그 경험을 있게 하는 발생적 차원까지 함께 생각한다는 점, 그 차원을 세계 밖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 ‘생산하는 것(잠재적인 것)’과 ‘생산되는 것(현실화된 것)’이 하나의 평면에 있다고 보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형이상학적 무의식 대신 초월론적 무의식을 탐색하려 한다고 밝힙니다. “이데올로기적 무의식 대신 질료적 무의식, 오이디푸스적 무의식 대신 분열증적 무의식, 상상적 무의식 대신 비구상적 무의식, 상징적 무의식 대신 현실적 무의식, 구조적 무의식 대신 기계적 무의식, (...) 표현적 무의식 대신 생산적 무의식”(196쪽)을 탐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7절에서 다루고 있는 탄압과 억압의 특유한 관계에 관한 분석도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억압에서 억압된 것의 본성을, 또한 금지에서 금지되는 것의 본성을 직접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처럼”(205쪽) 구는 것이 정신분석의 전형적인 오류추리임을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근친상간이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그것을 바라고 있었기에 그것이 금지되었다'고 추정하는 정신분석의 기본적인 전제가 오류라는 겁니다.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욕망이어서 욕망이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욕망이 억압되기 때문에 그런 왜곡된 이미지가 생기게 된 거라고요.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이 억압되는 까닭이 다른 데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무리 작은 욕망일지라도 일단 욕망이 있게 되면 사회의 기성 질서가 의문시되기 때문”(208쪽)입니다. 욕망 기계가 있을 수 있게 되면 사회의 모든 부분이 온통 요통치기 때문에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라고 이들은 말합니다. 그렇기에 사회는 본질적으로 욕망적 생산에 탄압을 행사하고, 그로 인한 억압이 들뢰즈와 과타리가 ‘본원적 억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인 듯합니다. 토론 중에 ‘본원적 억압’과 ‘2차적 억압’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도 오래 이야기가 이어졌는데요, 본원적 억압이란, 욕망적 생산이 작동하면 반드시 작동하는 근원적인 억압, 이를테면 모든 사회체가 가지고 있는 코드들로서의 억압 같은 것인 듯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현실적인 욕망적 생산을 억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욕망적 등록을 오이디푸스화 하는 것, 즉 “욕망적 생산의 등록을 가족적으로 번역하는 작업”(215쪽)을 ‘고유한 의미의 2차적 억압’이라고 보는 것 같고요.
하지만 7절의 마지막에서 저자들은 오이디푸스가 가족보다도, 이데올로기보다도 더 강력한, 조금 더 지하에 있는 힘들과 관계가 있다는 말로 우리를 궁금하게 합니다. “사회적 생산, 사회적 재생산, 사회적 탄압의 모든 힘(216쪽)”이 있는 곳이라고 하는데요. 무엇을 말하는 것일지... 계속 읽어보면 알게 되겠지요.^^
- 다음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2장 8절과 9절을 읽고 내용을 정리해옵니다.
- 간식과 후기는 윤순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