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이디푸스는 극한을 내부로 이전한다
지난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장 6, 7절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정아샘이 공지에서 말씀해주신 대로 6절이 ‘세 종합의 요약’이다보니, 자연스레 토론 중에 앞에서 미처 풀지 못한 이야기들을 다시 이야기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오이디푸스가 극한을 내부화한다’라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이야기 나눴던 것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들뢰즈-과타리는 정신분석과 자본주의를 분석하는데요. 이때 정신분석과 자본주의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걸까요? 앞에서 우리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어떻게 무의식을 사적인 것으로 쪼그라들게 만드는지를 보았죠. 그런데 좀더 시선을 넓혀서, 자본주의적인 사회체 속에서 오이디푸스 삼각형은 어떤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일까요? 겉으로 보기에 정신분석은 욕망을 삼각형 구도 속에 길들여 안정화시키는 것 같고요. 반대로 자본주의는 욕망을 안정된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모든 흐름과 더불어 달나라에”(71쪽) 이르려는 자본주의와 삼각형화된 유년기로 회귀하려는 정신분석은 어떻게 협력하게 되는 걸까요?
“오이디푸스는 극한을 이전하고, 극한을 내부화한다. 자폐증에 걸리지 않은 성공한 한 명의 분열자보다는 차라리 신경증자들이여. 군집성의 비할 데 없는 도구인 오이디푸스는 유럽인의 유순하고 사적인 궁극의 영토성이다.”(질 들뢰즈 · 펠릭스 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183~184쪽)
오이디푸스가 자본주의의 탁월한 파트너인 이유는, 사회적 생산의 극한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 사회구성체 자체의 내부로 이전하는 탁월한 능력 때문인 듯합니다. 정신분석은 무의식과 욕망이 지닌 잠재성을 해방합니다. 무의식은 이름을 모르고, 의식을 넘쳐흐르며, 현실원칙을 무시하는 역동성을 지닙니다. 그런데 정신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무의식이 적절한 방식으로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오이디푸스화가 부여하는 결핍의 딱지를 붙여야만 합니다. 오이디푸스는 욕망적 생산의 역동적인 흐름을 해방하면서, 그것으로 하여금 결여된 것을 향하도록 교묘하게 조작하는 것이죠. 그래서 욕망은 스스로가 변환되는 지점까지 나아가기보다는, 결핍의 대체물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하는 동시에 어머니의 대응물을 갈구하게 됩니다. 유순하고 사적인, 그러면서도 지극히 탐욕스러운 욕망의 탄생. 성공한 분열자보다는 결핍을 내면화한 신경증자를 만들기.
“자본주의는 자신의 생산과정에서 엄청난 분열적 부하를 생산하는데, 그 탄압의 모든 무게로 이 부하를 눌러 보려 하지만, 이 부하는 경과의 극한으로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자신의 경향성을 지속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이 경향성을 반대하고 금지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극한으로 향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이 극한을 억지한다.”(질 들뢰즈 · 펠릭스 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71쪽)
결핍을 내면화한 욕망. 이것은 자본주의의 완벽한 부품이 됩니다. 영토를 벗어나고 코드를 이탈하는 흐름들 없이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만족을 모르는 경제적 주체들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축적이나 재투자, 발전의 관념을 갖고 있지 않은 토착민들을 ‘경제인’으로 만들기 위해 엄청난 폭력과 회유가 필요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그러나 어떤 사회체이든 만족을 모르는 주체들은 위험을 의미합니다. 또 스스로를 증식하려는 자본의 움직임은 공황과 전쟁과 환경파괴를 낳고 예상치 못한 접속과 이탈하는 흐름들을 낳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극한을 향해갈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극한을 금지하고 또 내부화합니다. 극한을 내부화한다는 것은 아마도 극한을 자본주의의 논리 안에 재통합한다는 의미겠죠. 하위문화나 반문화를 주류 시장에 재통합하고, 기후위기를 에코-프렌들리한 상품들(전기차, 텀블러 등등)의 팔아먹을 기회로 만들고, 질병이나 죽음조차 다양한 의료 서비스들에 대한 수요로 변신시키는 놀라운 마법. 이 과정에서 오이디푸스는 아주 훌륭한 수단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오이디푸스가 요술봉을 흔들면, 모든 고통과 문제와 갈등은 ‘결핍’이라는 이름으로 변신합니다. ‘네가 괴로운 것은 결핍되어있기 때문이다!’
2. 본원적 억압과 2차적 억압
다음으로 7절 ‘탄압과 억압’을 읽고 토론을 했습니다. 토론 중에서 제게 인상 깊었던 것은 ‘본원적 억압’과 ‘2차적 억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들뢰즈-과타리는 ‘억압’이라는 말을 오묘하게 사용합니다. 우선 이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관점은 금지로부터 금지된 것의 존재를 유추하는 방식입니다. 즉 역사상 다양한 사회체에서 근친상간이 금지되어왔다는 사실로부터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이 존재한다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신분석의 오류추리죠.
들뢰즈-과타리는 라이히를 따라서 억압이란 사실 탄압에 의존한다고 말합니다. 억압이란 특정한 욕망을 억제하거나 금지하는 것을 넘어서 유순한 주체들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즉 억압은 탄압될 준비가 된 주체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인 것이죠. 그래서 억압은 ‘억압된 것’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탄압적 구조들에 포함되는 사회구성체의 재생산”(211쪽)과 관련하여 생각되어야 합니다. 가족이란 한 사회의 경제 체계의 대중심리적 재생산을 확보하는 한에서 성적 억압을 위탁받은 담당자입니다.
“가족은 사회적 생산에 의해 억압에 위탁된다. 이렇게 가족이 욕망의 등록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은, 이 등록이 행해지는 장소인 기관 없는 몸이, 앞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이미 그 나름대로, 욕망적 생산에 대해 본원적 억압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본원적 억압에서 이익을 취하고 거기에 고유한 의미의 2차적 억압을 중첩하는 일이 가족에 속한다.”(질 들뢰즈 · 펠릭스 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215쪽)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들뢰즈-과타리가 억압을 ‘본원적인 것’과 ‘2차적인 것’으로 나누고 있다는 점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것은 억압이 없는 사회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또 일정한 리듬과 패턴을 만들어내며 살기 위해서 욕망은 ‘등록 표면으로서의 기관 없는 몸’에 기입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원적 억압은 ‘배반-번역’이라는 2차적 과정을 통해서만 ‘가족적인’ 것이 됩니다. 즉 서구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의 등록은 오이디푸스 가족주의라는 매개를 통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푸코가 『성의 역사』 2, 3권에서 고대사회의 ‘욕망의 등록’을 연구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푸코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금욕적 실천을 연구하는데요. 이때 금욕은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활용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금욕은 만족을 모르는 욕망을 교화시키거나 수치스러운 욕망에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시키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정상/비정상은 문제가 되지 않고 ‘적절함’만이 문제가 됩니다. 고유한 쾌락의 스타일을 만들어 스스로를 통치하는 것 자체가 지적이면서도 사회적인 활동이었습니다. 등록의 표면 자체가 근대와 심오하게 달랐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2차적 억압은 ‘가족’이 아니라 경쟁을 포함한 우정의 관계, 폴리스의 자유민 남성 동료 시민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무튼 이렇게 한 번 정리해보니, 들뢰즈-과타리의 반(反)정신분석적이고 반(反)자본주의적인 프로젝트가 무모하게 욕망의 흐름들을 개방하는 것보다는 신중하게 욕망의 등록 표면 자체를 변환하는 것과 관련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시간 한참 이야기 나눴던 '오이디푸스가 극한을 이전하고 극한을 내부화한다'라는 말이 좀더 이해되는 거 같네요. 극한을 금지하면서 내부화하는 자본주의와 오이디푸스의 결합. 2차적 억압도 사회체에 따라 저렇게 달라질 수 있겠네요. 푸코와 들뢰즈의 만남도 흥미롭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