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2장 8,9절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번 부분에서는 신경증과 정신병을 구분하는 프로이트의 기준에서 시작해 들뢰즈와 과타리가 제안하는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 무엇인지 좀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구분에서 신경증과 정신병의 가장 큰 차이는 현실계의 기능이 보존되느냐 억압되느냐입니다. 정신병자는 자폐증과 현실 상실을 통해 반응합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런 결과가 분열적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과정이 중단된 결과가 아닌지 묻습니다. 이들에게 강요된 오이디푸스화의 결과가 아닌지 말입니다. 오이디푸스화를 견디고 그 안에서 진화하고 만족하는 신경증자들과 달리, 정신병자들은 이 각인이 통하지 않는 자들이지요.
하지만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둘 사이에 본성의 차이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신경증이건 정신병이건 장애의 원인은 언제나 ‘욕망적 생산’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관계, 이 두 생산 사이의 체제의 차이나 갈등, 그리고 욕망적 생산이 사회적 생산 속에서 수행하는 투자의 양태들”(228쪽)에 있다는 건데요. 신경증과 정신병의 '현행 요인'은 바로 이런 관계, 갈등, 양상들이 모두 관련되어 있는 욕망적 생산입니다. 욕망적 생산은 ‘무오이디푸스적’이며, 변하지만 늘 현행적이고 현재적입니다. 토론 중에 이러한 욕망적 생산의 '현행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저희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순간 우주 전체가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는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신경증이나 정신병뿐 아니라 어떤 일이건 발생하는 데에는 무수히 많은 요소와 조건들이 관여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오이디푸스와 거세, 결핍을 전제로 하는 정신분석의 주장들이 힘을 잃게 됩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처럼 신경증과 정신병을 오이디푸스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분열증적 과정과 가장 내밀한 관계에 있는 정신병으로부터 ‘과정으로서의 분열증’, ‘분열자’의 이미지를 끌어냅니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작가와 예술가들을 예로 들며 설명하고 있듯이, 이들은 “출발하는 법을, 코드들을 뒤섞고, 흐름들을 흐르게 하고, 기관 없는 몸의 사막을 가로지르는 법을”(236쪽) 아는 자들입니다. 또한 “자기 작품의 정통적, 전제군주적 기표를 갈라지게 하며 지평선에 있는 혁명 기계를 필연적으로 부양하는 흐름들을 그려내고 흐르게 하기를 마지않는 자”(237쪽)들이고요. 하지만 저희는 이런 분열증과 분열자가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지 잘 그려지지가 않았습니다. 과정으로서의 분열증과 병리학적 분열증의 구분이 관념적으로 느껴진다는 의견도 있었고요. 하지만 들뢰즈와 과타리가 분열자의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욕망적 생산, 욕망 기계의 작동의 실제라는 점, 그것이 욕망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뒤집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방편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작업을 이해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들뢰즈와 과타리는 정신병을 어떻게 부르느냐, 그것을 ‘과정 자체’로 부르느냐, 아니면 반대로 ‘과정의 중단’이라 부르느냐에 따라 모든 게 바뀐다고 말합니다. 저희는 여기서 ‘과정의 중단’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처음에는 병원의 분열자, 자폐증 환자의 상태를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공 0까지 추락한, 기관 없는 몸으로 퇴각한, “신경증자들을 제조하는 억압-탄압 체계를 피하려고 온 힘을 다해 본원적 억압에 자신들을 내맡”(240쪽)긴 존재. 하지만 들뢰즈와 과타리는 '어떤 종류의 중단인지'도 묻고 있어서 저희는 이 중단을 일시적 중단, 방향 전환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어요. 생산과 반생산, 탈영토화와 영토화, 흐름뿐 아니라 흐름의 방향 전환을 위한 멈춤이 모두 있어야 하듯 말입니다. 이 맥락에서는 신경증, 정신병, 변태 등의 분열적 과정에서 중단의 양태들을 가리키는 것 같기는 했지만, 저희는 8절에서 들뢰즈와 과타리가 소개한 정신분석가 지슬라 판코브의 방식처럼 ‘기관 없는 몸 위에서 욕망적 생산을 다시 작동시키는 것’에 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신경증, 정신병, 변태의 세 형식이 각기 분열증을 바닥으로 갖고 있음을 보여주며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야말로 유일한 보편이라고 말합니다. “분열증은 벽인 동시에 벽의 돌파요, 이 돌파의 실패”(241쪽)라고요. 저자들은 고흐의 말을 인용합니다. "<어떻게 이 벽을 가로질러야 할까. 강하게 두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이 벽을 파고 줄로 갈아 가로질러야 한다, 내 느낌에 천천히 참을성 있게.>"(242쪽) 네, 역시 알쏭달쏭합니다. 이런 분열증이 무엇일지, 욕망적 생산이란 무엇인지, 계속 들뢰즈와 과타리를 천천히 참을성 있게 따라가보아야겠습니다.
- 다음 시간에는 채운샘의 정리 강의가 있습니다. 2장의 내용을 정리해오시면 됩니다.
- 간식과 후기는 성연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