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학기이지만, 세미나 시작 후 첫 번째 쓰는 후기여서 먼저 나들이 세미나에 대한 제 소감을 간단히 전합니다. <안티 오이디프스>에서 들뢰즈와 과타리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아가는 과정도 지난하지만, 대충 알게 되어도 그들의 의견에 현실적으로 동의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여기저기 벽을 마주한 답답한 느낌이 수시로 일어납니다. 이러한 텍스트의 느낌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이 세미나의 신기한 현상이자 동력은 나들이 세미나원들의 지치지 않는 열의처럼 보입니다. 텍스트의 난해함과 더불어 직장 업무(또는 공부)로 지쳤을 만도 한 시간의 몸 상태와는 어울리지 않는 반짝반짝한 눈빛들이 세미나 분위기를 하드캐리합니다. 다른 시간에 공부하고 있는 주역이나 불교나 예술 공부와 각자의 수준에서 연결해서 확장 이해하려는 시도는 오디오가 빌 틈을 주지 않지요. 난해한 개념들이 소개되고 있는 텍스트지만, 서로 어깨동무하고 벽을 좌충우돌, 뒤뚱뒤뚱, 나풀나풀 넘어가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신나게 공부할 수도 있구나’를 깨닫게 된 세미나입니다. 은근히 세미나가 기다려지다니.^^
이번 시간은 프로이트가 규정했던 신경증, 정신병과 대비되는 들뢰즈와 과타리의 정신병증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더불어 이들이 정신분석적 용어인 정신병(분열증)을 재개념화하여 분열증(과정 자체)을 사용하는 이유를 알게 된 기회였습니다.
신경증, 정신병
요즘 정신과 병원이 늘고 있습니다. 몸을 무리하게 쓰거나 몸에 이상이 없는데 밤에 잠을 잘 수 없거나 무기력증에 빠져 집에서 나오기 어려운 경우나 사람을 만나기를 꺼리는 등 일상에서의 문제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었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자신의 증상을 개선하려 약물치료나 상담 치료를 받습니다. 저도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우울증 증상 때문에 상담 치료를 받으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병원은 아니고 상담 치료 기관이었는데, 상담해 주시는 분에게 저의 문제를 얘기하는 과정에서 더 지친다는 느낌이 들어 10회를 신청해 놓고, 2번 간 후 멈췄습니다. 10회를 모두 상담한다 해도 이 증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기도 했고, 1시간이라는 정해진 시간 내에 충분히 상담한다고 상담사가 나를 얼마나 알겠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낸 돈이 아깝긴 했지만) 그리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의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진 질문은 저를 더 우울해하게 만들었죠. 게다가 상담하시는 분을 신뢰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신뢰하고 상담사의 말을 따라 살면 우울증의 정도가 줄어들까에 대한 의문도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따지다니 급하지 않았나 봅니다. 아기가 어려 시간 내기 어려운데 잠깐 아기를 맡기는 일이 내키지 않았고 견딜만해서 그랬겠지요.
그런데 그 시기 저는 정신병에 걸렸던 걸까요?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고, 주위 사람들을 심하게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괴로운 존재가 되거나 아이에게 해로운 존재가 되는 것 같아 상담 치료를 결정했습니다. 정신 상담의 효과를 체험하기도 전에 중단했으니 그러한 저의 평범하지 않은 상태가 얼마 정도 지속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아이에게 끼친 해로움에 대한 자책에서 생겨난 미안함이 사라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실제로 정신의 이상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해를 끼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미리 알 수 있을까요? 모든 이들에게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는 어떤 정도를 찾을 수 있을까요? 완치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질문에 답은 찾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정신 상담의 기준과 목적은 무엇일까요? 저는 무엇을 위해 정신과 상담을 받고자 했을까요? 신경증(편집증)이었을까요, 정신병(분열증)이었을까요? 아이를 온전히 키울 수 있는 상태가 되고 싶었고, 남편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싶었고 그래서 자기 자신이 슬프기보다 즐거운 시간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화목한 가족에 내가 흠으로 작용하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내 정신을 빠르게 회복시켜줄 무엇에 의지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했다는 것은 신경증에 가까운 증상이었을 것 같네요. 제가 겪은 양육 문제에서만 두려움이 일어날까요? 회사 업무 성과 또는 공부 성과 등에 집착하지 않기란 어렵지요. 이 집착에서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현실에 엄청나게 복종하고자 하는 욕망이 커지는 시대이지요. 프로이트는 1924년에 신경증과 정신병의 간단한 구별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안했습니다.
신경증에서는 자아가 현실의 요구들에 복종하며 이드의 충동들을 억압하는 데 개의치 않는 반면, 정신병에서는 자아가 이드에 사로잡혀 있고 현실과의 단절을 개의치 않는다.(<안티 오이디푸스> 218쪽)
이 구분에 따르면, 저의 병증은 유사 신경증입니다. 현실의 요구들에 복종하고 싶은데 잘 안되어서 정신 상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드의 충동들을 억압하는 방법을 상담에서 얻고 싶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이드에 사로잡혀 아이나 가족이 단절된 방향이 아니었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정신 상담에서 신경증 치료는 저의 필요와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 같습니다. 저의 자아가 집착하고 있는 요소들을 알려주는 치료가 되었을 테니까요. 우울증은 신경증 증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미쳤다고 하는 상태는 현실에 복종하는 모습(신경증)이 아니라 현실과 단절된 상태입니다. 정신병(분열증)이죠.
프로이트는 신경증자 집단이 자신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아빠-엄마-나) 이론에 의해 진단되고 치료되는 임상 사례를 소개하지만, 정신병(슈레버의 망상) 진단과 치료에 이 이론을 적용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정신병자 집단을 현실에 다시 발 들이게 하는 치료에는 자신의 이론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두 집단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이론과 관련하여 신경증을 오이디푸스 내적 장애로 정신병을 오이디푸스 외적 도주로 정의하고, 대립된다고 진단합니다. 이 대립은 오이디푸스를 기준으로 나눈 것입니다. 병증의 대립에 이 기준이 적용된 것이지요. 오이디푸스 이론은 모든 욕망과 병증을 가족 삼각형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고, 치료까지 하는 정신분석 과정입니다. 두 집단은 이런 기준으로 구분된 병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가족 중심의 상담은 효과가 있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보기에 이 시대(자본주의 시대)에 “가족이란 <한 사회의 경제 체제의 대중 심리적 재생산>을 확보하는 한에서, 이 성적 억압을 위탁받은 담당자이다.(…) 욕망의 탄압, 또는 성적 억압, 즉 리비도의 정체가 욕망을 오이디푸스에 연루시킨다.”(211쪽)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사회적 재생산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문제가 되는데, 이 문제는 가족만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적 재생산의 확보하는 한에서 가족이 작동해야 하는데 작동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시대적(역사적) 요구에 따라 가족 중심주의는 여전히 공고합니다. 여기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어떤 생산들은 프로이트의 가족 중심 해석 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부분을 발견하면서 의문을 제기합니다. 특히 분열자의 욕망적 생산 방식에서 말이죠.
그래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신경증 집단보다 정신병 집단에 즉 슈레버의 망상에 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신병이 오이디푸스 외적 도주로 해석된다는 사실은 일단 오이디푸스화에 금을 내는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분열자는 사회 부적응자가 되지요. 사회적 재생산에 부적합한 자가 분열자입니다. 지금도 수용하기 어려운 자들이지요. 미친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생산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들뢰즈와 과타리는 분열자가 생산하는 반-사회적 생산물에서 과연 우리의 욕망이 오이디푸스를 기준으로 가치평가 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시/비 판단한 무엇보다 앞서서 생산하는 요인은 욕망적 생산이고, “오이디푸스 역시 욕망적 생산에 대한 반동적 구성체일 뿐인데, 이 구성체와 공존하고 이 구성체가 반작용하는 현행 요인과 독립해서 이 구성체를 그 자체로 추상적으로 고찰하는”(229쪽) 정신분석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말이 되냐고 묻습니다. 능동적인 욕망적 생산은 오이디푸스에 의해 사용되기 전에 “그 경과 자체에서, 처음부터 육체적· 사회적· 형이상적 관계들의 집합을 투자”(229쪽)하기 때문입니다. ‘오이디푸스적인 심리학적 관계’에 의해 대립되고 있는 신경증과 정신병을 들뢰즈와 과타리가 욕망적 생산의 측면에서 어떻게 재개념화 하는지 보자구요.
분열증(과정 자체)
신경증과 정신병 사이에는 본성, 종류, 집단의 차이가 없다. 정신병과 마찬가지로, 신경증도 오이디푸스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반대로 오이디푸스를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신경증이다. 그러면 정신병-신경증의 관계를 어떻게 착상해야 할까? 그런데 이 관계는 다른 관계들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정신병을 과정 자체라 부르느냐, 아니면 반대로 과정의 중단이라 부르느냐(또한 어떤 종류의 중단인가?)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뀐다.(<안티 오이디푸스> 232쪽)
신경증, 변태, 정신병을 구분하는 기준인 오이디푸스 삼각형 역시 욕망적 생산의 영향에 의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위에서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제 기준 자체가 오이디푸스 삼각형에서 욕망적 생산으로 바뀝니다. 욕망적 생산에 의해 발생한다는 면에서 신경증과 정신병 사이에는 본성, 종류, 집단의 차이가 없습니다. 정신분석 치료의 효과를 보여주는 신경증 역시 오이디푸스적으로만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적 생산에 대해 정신분석이 오이디푸스를 외삽하고, 오이디푸스 내 양극(미분화-상상계, 구조화-상징계)에 구속하고, 사회적 생산을 가족 삼각형에 일대일대응으로 적용하고, 법이 금지하는 것을 욕망한다고 이전(왜곡)하고, 결핍된 욕망의 너머를 오이디푸스에 의해 신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다섯 가지 오류 추리에 기대어 작동한다고 진단합니다. 따라서 기존의 정신분석적으로의 구분이 아닌 정신병-신경증이 된 병증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과정 자체와 과정의 중단으로 나눕니다. 정신병, 변태, 신경증은 과정 중단의 종류가 됩니다. 분열증을 과정 자체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분열증(과정 자체)은 정신병과 다음의 질문을 통해 다시 한번 구분됩니다.
“극한을 뛰어넘는 한에서의 과정과 극한에 부딪쳐 언제까지나 그것을 쳐 대는 한에서의 과정의 결과를 동시에 가리키기 위해, 왜 분열자라는 똑같은 말이 사용될까? 왜 결과적인 돌파와 가능한 붕괴를 동시에 가리키는 데, 또 이 둘이 서로 이전되고 서로 뒤얽히는 것을 가리키는 데, 이 똑같은 말이 사용될까? 이는 세 가지(신경증, 변태, 정신병) 모험 가운데 정신병의 모험이 과정과 가장 내밀한 관계이기 때문이다.”(241쪽) 그들이 사용하는 ‘분열자’는 미친 사람을 정의하는 용어가 아닙니다. 분열적 생산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역시 분열적입니다. 분열증이라는 용어에 그들은 양가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하나는 욕망-기계의 생산 방식, 또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생산 방식입니다. 하지만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은 분리된 생산은 아닙니다. 이 두 생산은 체제에는 차이가 나지만, 본성상 동일합니다. 각 과정의 중단을 영토성들로, 분열증적 생산 방식을 탈영토화로 명명합니다. 마지막으로 <안티 오이디푸스>2장 정신분석과 가족주의 – 성가족(聖家族)은 아래와 같이 다음 장을 준비하며 마무리됩니다.
신경증, 정신병, 변태 등 이 셋의 관계는 이들 각각이 과정과 관련하는 상황에 의존하며, 또한 이들 각각이 과정의 중단이 양태를 재현하는 방식에, 즉 욕망의 탈 영토화된 흐름들에 의해 운반되어 가지 않기 위해 아직도 달라붙어 있는 잔여의 토지를 재현하는 방식에 의존한다. 오이디푸스라는 신경증의 영토성, 책략이라는 변태의 영토성, 기관 없는 몸이라는 정신병의 영토성. 때로는 과정이 덫에 걸려 삼각형 속에서 빙빙 돌고, 때로는 과정이 자신을 목적으로 삼고, 때로는 과정이 공백 속에서 계속되어 과정의 완성 대신 끔찍한 악화를 초래한다. 이 세 형식은 각기 분열증을 바닥으로 갖고 있다.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야말로 유일한 보편이다. 분열증은 벽인 동시에 벽의 돌파요, 이 돌파의 실패이다. (<안티 오이디푸스> 242쪽)
'서로 어깨동무하고 벽을 좌충우돌, 뒤뚱뒤뚱, 나풀나풀 넘어가는 느낌'... 정말 그렇네요.ㅎㅎ 좌충우돌, 뒤뚱뒤뚱이 훨씬 많은 것 같긴 하지만...ㅋ
이번 부분은 프로이트 정신분석과 들뢰즈 과타리의 주장이 확실하게 대비되는 지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들뢰즈 과타리가 '정신병'에서 '과정으로의 분열증'을 끌어내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좀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요. 샘의 사연과 앞의 내용까지 엮어서 써주셔서 이해가 더 잘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