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유물론적 정신의학과 기계들 그리고 전체와 부분들에 대해서 같이 공부했다. 같이 공부하는 도반들이 많아서 다양한 해석들이 오간다. 그래서 재밋고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4.유물론적 정신의학
정신분석은 욕망적 생산과 무의식의 생산들이라는 위대한 발견을 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의 삼위일체 공식, 즉 오이디푸스, 신경증, 즉 아빠-엄마-나라는 공식으로 자아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했다. 오이디푸스가 기준이 되며, 오이디푸스 안에 갇히는 순간 우리는 기껏 발견한 욕망과 무의식의 생산을 잃어버린다. 이렇게 무의식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공장이 아닌 무의식을 표상들의 장으로 만드는 고대 극장으로 만들고 재현하며 신화나 꿈으로 대체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들은 욕망을 생산이 아닌 결핍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욕망은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으며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욕망이 결핍하는 것은 주체이다. 즉 욕망이 결핍하고 있는 것은 고정된 주체이다. 욕망은 기계이며, 욕망의 대상 역시 연결된 기계이다. 욕망의 대상적 존재란 현실계를 생산하고 현실계 그 자체이며 수동적 종합들의 집합이다.
5.기계들
기계는 절단들의 체계라고 정의된다. 절단은 다양한 차원에서 작동한다. 첫 번째 양태는 모든 기계에서 절단은 연합적 흐름에서 채취를 수행한다. 여기서 절단은 연속성의 조건을 이루며 그것이 절단하는 것을 관념적 연속성으로서 내포하거나 정의한다. 모든 기계는 기계의 기계이기 때문이다. 기계는 흐름을 생산한다고 상정된 다른 기계에 연결되면 흐름의 절단을 생산한다. 이것을 생산의 생산의 법칙이라 말한다. 절단의 첫 번째 양태는 연결 종합에 관련되며, 리비도를 채취 에너지로 동원한다.(흐름과 채취)
절단의 둘째 양태는 분리 종합에 관련되며, 누멘을 이탈 에너지로 동원한다.(사슬 또는 코드 그리고 이탈) 코드는 하나의 전문어, 열린 다의적 구성체와 유사하다. 기호들의 받침대와는 무관하다.(77) 기호들은 지시대상과는 관계하지 않으며 아무 계획도 없고 모든 단계에서 모든 연결에서 작업한다.
절단의 셋째 양태는 결합 종합에 관련되며, 볼룹타스(희열)를 잔여 에너지로 동원한다. 바로 이 세 양상 아래에서 욕망적 생산의 경과는 생산의 생산인 동시에 등록의 생산이고 소비의 생산이다. 채취하기, 이탈하기, <여분 남기기>ㅡ이것이 생산하기이며, 욕망의 현실적 작업들을 수행한다.(81~82) 생산의 양태를 세 3가지로 나눠 설명하지만, 이는 동시적으로 작동한다.
6.전체와 부분들
만일 우리가 부분들 곁에서 이러한 총체성을 만난다면, 그것은 이 부분들의 전체이기는 하나 이 부분들을 총체화하지는 않으며, 이 부분들의 전체이기는 하나 이 부분들을 총체화하지는 않으며, 이 부분들 전체의 통일체이기는 하나 이 부분들을 통일하지는 않으며, 따로 조성된 새 부분으로서 지금까지 있어 온 부분들에 덧붙는다.(84) 부분과 전체는 서로 독립되어 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서로 무관한 것도 아닌, 통일된 전체가 아닌 서로 이어가면서 새로워지는 패치워크 같다. 전체는 부분들과 공존할 뿐 아니라, 부분들에 인접해 있고, 그 자체로 따로 생산되며, 부분들에 적용된다.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전체는 생산된다. 그것 자체는 부분들 곁에서 하나의 부분으로서 생산된다. 그것은 통합하지도 않고 총체화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부분들에 적용되면서 통하지 않는 관들 사이에 엉뚱한 소통들만을 설립하고, 자기의 고유한 차원 속에서 다른 것들과의 차이를 보존하는 요소들 사이의 횡단적 통일들만을 설립한다.”(85) 유전학자들은 <여러 아미노산은 개별적으로 세포 속에 동화되며, 그다음에 각 아미노산 특유의 횡적 사슬이 고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거푸집과 비슷한 메커니즘에 의해 고유한 시퀀스에 정렬된다> 멜라니 클라인은 부분대상들을 발견했다. 그렇지만 이 대상을 환상이라고 생각해서 현실적 생산의 관점이 아닌 소비의 관점에서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부분대상들로 오이디푸스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으나 포기하고 오히려 오이디푸스를 이용했다. 그래서 부분대상들의 논리는 무로 환원시킨다.(86~9)
첫 시간에 채운샘은 욕망이론의 첫 번째 임무는 프로이트 이래 전개되었던 사적인 정신분석 치료라는 의사 신비주의적 실천을 승인하는 것보다는 사회적 장으로 돌파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생산적 생산과 욕망적 생산의 차이도 같이 다뤄졌는데, 거기까진 정리하지 못했다. 기계는 과타리의 사유에서 온 개념이다. 욕망이라는 개념을 최대한 인간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해석하려고 가져온 개념이다. 주체 이전에 어떤 작동하는 욕망을 말한다. 누가 작동하는지에 따라 기계의 쓰임은 다르다. 계속해서 나오는 개념인데 앞에 붙은 수식어로 인해 역시나 어렵다.
프로이트를 읽느라 잠시 잊고 있던 내용들을 다시 상기시켜주셨네요.ㅎㅎ 주체를 상정하지 않은 욕망, 생산 과정으로서의 욕망, 공장으로서의 욕망이 무엇일지, 그리고 '부분들 곁에서 하나의 부분으로서 생산되는 전체'가 무엇일지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나눠보아요. 후기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