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프로이트의 논문 <자아와 이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과타리가 비판하고 있는 지점을 이해하기 위해 4주간 프로이트의 논문들을 읽어나갑니다. 이번 시간에 읽은 <자아와 이드>에 대해서는 재겸샘께서 정리해주셨으니 저는 토론 중에 나왔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적어보겠습니다.
자아, 이드, 초자아는 워낙 유명해서 어디선가 한번씩은 들어본 개념입니다. 흔히 이드는 본능적 욕구로, 자아는 현실의 대변자로, 초자아는 도덕적 감시자로 불리지요. 저희는 토론 중에 이들간의 관계가 궁금했습니다. 한 샘이 말씀하신 것처럼, 책을 읽다보면 정말 모든 게 이드에서 나온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우선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아는 ‘<지각-의식>의 매개를 통해 외부 세계의 직접적인 영향에 의해서 수정된 부분의 이드’로, 이드의 표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쾌락 원칙을 따르는 이드와는 대조적으로 이성과 상식을 대변하고요. 프로이트는 이드와 자아의 관계를 말과 말 등에 타고 있는 사람으로 비유하는데요. 사람이 자기보다 더 힘이 센 말을 제어해야 하는 것처럼 자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사람은 자기 힘으로 그 일을 하지만 자아는 빌려온 힘을 사용합니다. 또한 말을 탄 사람이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말이 가고자 원하는 곳으로 이끌어야 하듯이, 자아도 이드의 의지를 마치 자신의 의지인 양 행동으로 나태내는 습관이 있습니다.
초자아(자아 이상Ichideal)는 자아 속의 한 등급, 혹은 자아 내에서 분화된 어떤 것으로 표현됩니다. 프로이트는 초자아가 ‘이드의 가장 강력한 충동과 가장 중요한 리비도적 변화 양상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대상 리비도를 자기애적 리비도로 변형하며 발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 특히 아버지를 자신의 오이디푸스적 욕망을 실현하는 데 장애물로 인식하고 자신 속에 이와 동일한 장애물을 설치함으로써 억압을 수행하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한 힘을 아버지로부터 빌려온 것인데요, 그로 인해 초자아는 아버지의 성격을 띱니다. 프로이트는 초자아가 아버지에 대한 대리 표상으로서 온갖 종교를 일으키는 씨앗을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린아이가 자라면서 아버지의 역할은 선생님이나 다른 권위적 인물에 의해 계승되고, 그들의 명령과 금제는 초자아에 남아서 양심의 형태로 계속 도덕적 검열을 수행합니다. 사회적 감정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초자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한 그들과의 동일시에 의존한다고 프로이트는 말합니다. 토론 중에,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이 이 ‘초자아’인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요. 사회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습, 혹은 내가 할 수 없는 것, 미래에 바라는 모습 등 초자아의 표상을 ‘나’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프로이트의 이런 분석들이 지난 두 주간 읽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욕망과는 어떻게 연결될까요? 들뢰즈와 과타리는 프로이트가 욕망을 개인의 문제로 본 것을 비판합니다. 그들은 주체의 욕망이 아닌 생산과정으로서의 욕망을 이야기하며, 무의식을 공장에 비유합니다. 이 공장으로서의 무의식이 프로이트에 의해 “고대 극장으로 대체되었고, 무의식의 생산 단위들은 재현으로 대체되었고, 생산적 무의식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인 무의식(신화, 비극, 꿈...)으로 대체”(57쪽)되었다고 말합니다. <자아와 이드>에서 프로이트는 그들이 비판한 것처럼 주체의 틀 안에서 의식과 무의식을 분석합니다. 무의식 상태인 개인의 욕망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드러나게 되는지 설명합니다. 다음 시간에 읽게 될 논문들에서는 무의식의 억압의 메커니즘과 그 동기에 관한 프로이트의 분석을 사례를 통해 알아보게 되는데요. <안티 오이디푸스> 1장에서 만난 편집증 환자 슈레버도 드디어 등장합니다. 계속 읽어나가보죠.
- 다음 시간에는 프로이트의 논문 <매맞는 아이>와 <편집증 환자 슈레버>를 읽어옵니다. 발제를 맞은 다섯 분은 내용을 정리해오시면 됩니다.
- 간식과 후기는 주영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