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를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요? 어찌어찌 4주에 걸쳐 프로이트를 조금 맛보긴 했지만, 아주 애매하게 공부한 것 같아요. 거의 매시간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이 끊이질 않았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안티 오이디푸스’ 이전에 ‘안티 프로이트’를 한 것 같았습니다. 들뢰즈는 프로이트를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이해한 다음, 프로이트가 더 나아갈 수 없었던 지점을 프로이트의 논의를 비틀어서 돌파했는데요. 저희는 “욕망을 수량화했다”, “삼각형 틀에 가뒀다”, “정신분석학자의 권위를 확립함으로써 가부장적 구조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같은 이야기를 많이 반복했던 것 같아요. 들뢰즈,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기 위해 프로이트를 경유하는 것이지만, 그가 어떤 한계에 직면해있는지 발견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 같아요. 프로이트의 문제의식 혹은 사유를 들뢰즈, 가타리가 어떻게 전유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 프로이트에 충실해야겠죠. 물론 저도 열심히 읽지 않고 프로이트를 탄핵하는 목소리에 힘을 보태긴 했지만요.^^;; 그래서 후기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프로이트의 기발한(?) 모습에 주목해서 정리해보겠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이성’이 아닌 ‘리비도’의 작동으로 설명합니다. 전통적으로 사회를 만드는 힘은 이성의 특권으로 주어졌지만, 프로이트는 일관되게 리비도가 작동한 결과로 사회가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인간은 리비도가 작동함으로써 관계를 형성하고, 가족은 가장 작은 규모의 사회로서 관계를 형성하는 힘을 가장 먼저 발휘하는 장소입니다. 프로이트는 이를 ‘동일시’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동일시는 감정적 결합이 나타내는 가장 초기의 근원적 형식”입니다. (117) 남자아이는 처음에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과 같은 시기에, 또는 그보다 좀 나중에” “애착 유형에 따라 어머니에 대한 리비도 집중을 발달시키기 시작”합니다.(115) 즉, 아버지를 자신의 이상으로 삼는 동시에 어머니와의 결합을 반대하려는 아버지를 적대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프로이트는 “동일시는 처음부터 양가 감정적”임을 밝힙니다. 그러나 모든 동일시가 이렇게 전면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랑’ 혹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한 가지 특징만을 빌려오는 ‘부분적 동일시’를 하기도 하고, “자신을 똑같은 상황에 놓을 수 있는 능력이나 그렇게 하고 싶은 욕망”을 확인함으로써 ‘전염적 동일시’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식으로 집단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 유대 또한 동일시 메커니즘에 기반해 있음을 통찰합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집단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리더’ 혹은 카리스마를 가진 존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프로이트는 다른 학자들을 참고해서 집단이 형성되는 메커니즘을 정리하는데요. 그 중에서도 트로터의 군거 본능을 전복하는 데 힘을 많이 쏟습니다. 트로터는 애초에 인간은 무리를 이루려고 하는 것을 “원초적이고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근원적인 무엇으로 가지고 태어났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집단을 이루게 되는지에 대해 탐구할 필요가 없었는데요. 프로이트가 보기에, 이는 ‘지도자’란 존재를 그저 우연에 기대어서만 설명하는 일이고, 구성원들 간의 유대감이 끈끈해지거나 옅어지는 원리에 대해서 질문할 여지가 없어집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오히려 군집동물, 즉 한 우두머리의 통솔을 받는 집단 속의 개체”라고 주장합니다.(135) 그 예로, 교회와 군대를 가지고 설명하는데요. 이 두 가지 공동체에서 다양한 인간들을 ‘형제’라는 유대감으로 묶는 통치술에 주목합니다. 이 두 집단은 “구성원 모두에게 평등한 사랑을 똑같이 베푸는 우두머리”에 의해 성립합니다. 교회의 신자들과 군대의 군인들이 서로에 대해 끈끈한 유대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구성원들 간의 평등의 확립 덕분이라는 것이죠.
아마도 프로이트는 양가적으로 작동하던 동일시가 어떻게 긍정적 유대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분석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시샘’, 그러니까 “아무도 자신을 남보다 내세우고 싶어해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이 똑같아야 하며 똑같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정신이 어떻게 해서 서로를 해치지 않는 식으로 변모할 수 있었는지를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중심으로 특출난 개인, 영웅 같은 존재를 얘기하는데요. 과연 그런 개인이 있다고 해서 구성원들 간의 시샘이 유대로 변형될 수 있을까요? 프로이트의 리더에 대한 ‘경이’를 분석, “개인이 자아 이상을 포기하고, 그것을 지도자 안에서 구현된 집단 이상으로 대치”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에 대한 억압을 내면화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메커니즘인 것 같습니다. 그는 이러한 경이를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뛰어난 개인들을 지도자로 내세우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없애는 식으로, 지도자 혹은 지도자적인 이념을 억압합니다. 그 예로, 17세기에 스스로 공화정을 끝내고 왕정을 복권한 대중의 폭력을 말할 수 있겠는데요. 이는 그 당시 공화정을 시도한 지도자들이 충분히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억압의 내면화가 어떤 경우에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파괴하는 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임을 보여주는 걸까요? 뛰어난 개인을 상정하는 한에서, 프로이트에게 정치 역량은 언제나 중심적인 것으로만 얘기되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프로이트의 기발함을 보려고 하는 시도가 결국 프로이트에 대한 지적으로 끝이 났네요.;;
ㅎㅎ 안티 프로이트. 정말 애매하게 공부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사실 저희가 읽은 논문들에서도 기발한 면들이 적지 않았는데 말이죠... 다음 학기에 읽게 되는, 프로이트의 계승자 라캉의 이론들은 어떻게 다를지 궁금해집니다. 그것까지 읽고 다시 <안티 오이디푸스>로 돌아가면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겠지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