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세미나가 한 주간의 방학을 마치고 2학기를 시작합니다. 12주간 진행되는 이번 학기에는 라캉과 <안티 오이디푸스> 2장, 맑스를 읽습니다. 먼저 숀 호머의 <라캉 읽기>를 3주간 읽고, <안티오이디푸스> 2장을 4주간,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요강> 서설과 김수행의 <자본론 공부>를 4주간에 걸쳐 읽게 됩니다. 이번 학기에는 채운샘의 정리 강의가 중간에 있다는 점도 조금 다르네요. <안티 오이디푸스> 2장을 읽고 정리 강의를 들은 후 맑스 읽기로 들어갑니다.
지난 학기 <안티 오이디푸스> 1장에서 수수께끼 같은 개념들을 만났습니다. 마지막 정리 강의 시간에는 각자 개념들을 하나씩 맡아서 정리해보았고요. 과제를 내주신 샘의 의도는 그 개념을 자기 말로 풀어보라는 거였지만, 저희는 책을 정리하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죠. 그것도 넘나 어려웠고요. 그도 그럴 것이,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책에서 선보일 거의 모든 개념들을 1장에서 언급합니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네 명의 철학자(맑스, 베르그손, 니체, 스피노자)의 사상을 주요한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고 하는데요. 1장에서는 문학가와 예술가들에 관한 언급이 많습니다. 그 이유로 샘께서는 ‘분열자’의 이미지를 만들어주기 위함이라는 점을 짚어주셨지요. 분열자의 사고를 상상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분열자는 ‘주체에 고정되지 않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학기에 읽은 슈레버의 이야기는 이런 분열자의 이미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읽은 것은 슈레버에 관한 프로이트의 논문이지만, 슈레버가 직접 쓴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그리고 아르토와 베케트의 글은 들뢰즈와 과타리가 언급하는 분열자의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고 합니다. 샘께서는 여러가지 예로 분열자의 이미지를 그려주셨는데요. 우선 분열자는 자연과 자신을 둘로 느끼지 않는 자, 자연으로서의 삶을 사는 자, 자연의 과정 자체인 삶을 사는 자입니다. 동양에서 성인이라고 불리는 자, 불교에서는 무아로서 살아가는 자가 바로 그런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니체의 ‘초인’도 그런 의미에서 분열자에 속합니다. 초인이란 인간을 넘어가는 자, 인간적인 규정을 넘어가는 자를 말합니다. 규정성 없는 ‘힘’으로서의 삶. 자신의 역량을 다양한 것들과의 접속 속에서 펼쳐가는 자. 샘께서는 이게 바로 맑스가 말하는 코뮤니스트이기도 하다고 하셨지요. 들뢰즈와 과타리는 ‘분열자’라는 이름으로 같은 것을 말하고 있고, 이는 우리 시대가 강요하는 규정성으로부터 벗어남을 강조하기 위한 거라고요.
그리고 분열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욕망과 기계 개념입니다. 이번에 저희는 개념들을 정리하면서 무엇에 대한 부정으로 그 개념을 설명한 경우가 많았죠. 얼마 전 베르그손 강독에서도 보았지만, ‘무엇이 없다’는 말은 언제나 ‘어떤 것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없다, 무엇이 아니다 같은 부정의 사유는 지금 여기에 있는, 여기서 생겨나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부정의 사유를 벗어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한데요. 욕망에 관해서도 무엇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멈출 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무엇인지까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샘께서 지적하셨죠. 욕망이 표상이 아니라는 말은 욕망이 실재적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욕망이 결여가 아니란 말은 욕망이 생산이란 말이고요. 내가 어떤 걸 갈구한다는 말은 지금 뭔가를 느낀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뭔가를 욕망한다는 건 그것의 결핍이 아니라 어떤 느낌의 생산인 거죠. 욕망은 또 ‘욕망 기계’로도 불리는데, 이는 욕망하는 기계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계가 작동하는 것 자체가 욕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욕망 기계는 기계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욕망과 기계와 생산은 결국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1장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흐름과 접속, 절단으로 기계의 작동을 설명합니다. 어떤 흐름에서 접속과 절단을 통해 어떤 기계들이 생산되지요. 여기서 흐름이라는 건 무규정적인 차원을 말하고, 그걸 다르게 변형함으로써 뭔가가 생산(규정)됩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먼저 있는 것이 연결 접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접속과 절단에서 뭔가가 생산(규정)되고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이 모든 과정은 동시적입니다. 샘께서는 들뢰즈의 세계에는 뭐가 먼저 있고 나중에 있는 게 아니라 늘 관계가 있다고 하셨죠. 흐름을 절단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건 관계가 다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모든 욕망은 결국 흐름의 절단을 어떻게 행하느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도 짚어주셨고요.
이처럼 들뢰즈와 과타리의 욕망 개념은 인간주의적 관점을 벗어나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의 지배적 담론이었던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며 다른 방식으로 욕망과 무의식을 이야기합니다. 2학기에 읽게 되는 <안티 오이디푸스> 2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정신분석학과 관련된 논의를 펼치고 있는 듯한데요. 1학기에 읽은 프로이트 논문, 그리고 이제부터 읽을 <라캉 읽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더욱 재미있게 읽게 될 거 같아 기대가 되네요ㅎㅎ
-2학기 첫 시간에는 숀 호머의 <라캉 읽기> 2장까지 읽어옵니다.
-발제는 1장: 정아, 2장: 규창샘(~70쪽), 황리샘(71~81쪽)
-간식과 후기는 영주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수요일 저녁에 뵈어요!
그 동안 우리가 욕망을 결여, 결핍으로 여겨왔다는 걸 베르그손, 들뢰즈의 렌즈로 보면 어떤 것을 더 원하고 있음으로 해석되는 것 같아요. '무엇이 없다'는 건 '어떤 것이 있다'는 거니깐요. 그렇기에 결여, 필요 조차도 생산되는 거라고 들뢰즈와 과타리는 말했죠. dx, 끊임없는 잉여를 원하는 자본주의적인 마인드가 결여, 결핍을 생산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1학기에 프로이트를 너무 부정적인 관점에서 본게 아니었나 싶었는데, 이번 시즌에 만나는 라캉은 다른 방식으로 절단해보고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