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저희는 숀 호머의 <라캉 읽기> 3장과 4장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3장은 정아샘께서 공지에 써주시기로 해주셨고, 4장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을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핵심 키워드는 라캉의 언어와 언어학, 구조주의, 소외와 분리 등을 꼽을 수 있겠네요. ‘무의식의 주체’라는 제목의 4장의 핵심은 라캉에게 있어서의 ‘주체’입니다. 지난 시간 저희는 자아와 주체가 어떻게 다른지, 주체는 상징계와만 상응하는 개념인지 등을 궁금해 했습니다. 궁금증이 싹 풀리지는 않았지만, 함께 나눈 이야기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주체가 마침내 안정되고 완전한 총체로서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는 시간의 특정 순간이라기보다는 끊임없는 주체화 과정-소외와 분리-을 통해 단지 섬광같이 나타날 뿐이다. (...)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주체가 상징계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인 후에야 행동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주체는 단순히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주체가 되기 위해 우리는 타자의 욕망과 관련하여 우리의 위치를 설정해야 한다. 유아는 반드시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변별해 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선택이라는 요소가 벗어날 수 없을 듯한 상징계의 결정권 너머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허락하는 것이다.”(118~119쪽)
저희는 우선 구조주의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라캉은 구조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소쉬르의 구조주의적 언어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라캉은 그를 넘어서는 지점이 있었죠. 즉 ‘기표가 기의를 품고 있다’(상응 이론)는 기존 언어학을 넘어서 ‘기의는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는 주장한 것이 소쉬르의 언어학이라면, 라캉은 ‘기표는 기표를 밀고 나갈 뿐이어서 의미는 구성되지 않는다’며 기표의 우위를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라캉은 구조주의의 특징(하나의 구조주의 일반은 존재한 적 없지만)처럼 “주체를 완전히 증발시키는 방법을 모색”(103쪽)하지도 않았습니다. 라캉의 주체는 상징계와 관련하여 구성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는 않습니다. 상징계(구조)는 완전하지 않으며 항상 그것의 여분이 존재합니다. 바로 주체와 대상이죠. 상징계를 넘치는 것으로서의 주체의 면모에는 충동과 욕망일 것입니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의 주체에 대한 과학”(105쪽)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의식을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주체의 말(speech)을 통하여 추론할 수 있을 뿐”(127쪽)이죠. 다른 어떤 곳에 X라는 ‘지식’이 존재함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무의식은 상징계에서 나타”납니다. 즉 주체가 개인적이고 의식적인 차원 너머에 있는 상징계와 대면할 때 부상하는 것이죠. 즉 타자 없이는 무의식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인 것이죠.
이 대면이, 앞에서 나온, 아이가 어머니(타자)의 욕망을 인식하는 사건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아이-어머니 이자관계의 ‘분리’ 과정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분리는 욕망과 관계되며 아이가 자신을 어머니/타자([m]Other)로부터 구별하는 과정”(114쪽)이니까요. 분리는 주체가 자신을 질문하는 순간입니다. ‘타자의 욕망 안에서 나는 무엇인가?’라고 묻게 되는 순간 주체는 자신을 타자의 욕망에서 구별해냅니다. 이처럼 욕망이 분리될 때, 욕망의 주체, 즉 무의식의 주체가 구성됩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주체와 달리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주체는 어떠한 영속성도 지속성도 가지지 않는다”(118쪽)고 합니다.
섬광같이 나타나는 주체. 이런 주체는 ‘선택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미래를 결정하게’ 된다고 합니다. 앞에도 어려웠지만 저희는 이 부분을 아주 혼란스럽게 읽었는데요. “주체의 선택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게 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무의식과 욕망의 불확정성에 근거한다”(119쪽)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주체는(안 그래도 지속성이 없는데) 무의식과 욕망에 근거하여 선택한다고 하는데, 무의식과 욕망은 이미 타자의 담론이니 누가 선택한다는 것일까요? 이는 마치 불교의 업 개념이 연상시키는 혼란과도 같습니다. 업은 무의식처럼 개체의 의식 너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결정적 힘이지만, 연기 조건 속에서 짓게 되는 유일무이한 선택적 행위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정론적인 ‘받는 업’만을 강조한 것이 고대 베다 기반의 업 개념이었다면, 불교는 새롭게 ‘짓는 업’의 중요성을 함께 말했다는 점에서 혁신성이 있었지요.
‘섬광적 주체’의 ‘타자의 담론인 무의식’에 기반한 ‘미래를 결정하는 선택’은 곰곰이 생각해볼만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바로 이 선택의 순간에 주체는 기표 이상의 주체가 됩니다. 여기에는 언어와 상징계로 환원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죠. 상징계로 환원되지 않는 주체의 면모, 그것이 바로 충동입니다. 주체는 충동과 분리되지 않죠. 충동은 의식에 가하는 압력의 항구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충동은 만족될 수 없는 것입니다. 충동은 신체 내부로부터 발생하지만, 주체에게 하나의 통합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으며 “모든 충동은 부분적”(122쪽)일 뿐입니다. 이 부분이 들뢰즈/과타리의 욕망기계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라캉에게 충동은 본질적으로 ‘죽음 충동’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뭔가 다른 것만 같습니다. 충동은 무엇보다도 실재계와 연관이 있다는데, 언어와 상징계를 넘어서는 ‘대상’이 구성되는 실재계의 이야기도 궁금해집니다.
불교의 업 개념은 정말 우리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주체의 선택 문제와 비슷하네요. 이 문제는 '언어와 상징계로 환원되지 않는 무엇'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실재계와 대상a까지 읽고나면 좀더 이해가 될까요? 복잡하고 혼란스럽지만 프로이트보다는 훨씬 재미있기는 한 거 같아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