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채운샘의 강의를 마지막으로 2022년 나들이 세미나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모두가 열성회원인 나들이 세미나 샘들, 그리고 매 시즌 마지막 정리 강의로 빛을 비춰주셔서 저희가 너무 엉뚱한 데서 헤매지 않게 도와주신 채운샘 덕분에 들뢰즈의 사유를 좀더 이해하게 된 시간들이었습니다. 내년에도 나들이 세미나는 계속 이어집니다! 올해 함께 하지 못하신 샘들께서는 내년을 기대해주세요!😉
올 한 해 나들이 세미나에서는 들뢰즈의 초기 저작들을 읽어왔습니다. 그 마지막 시즌에는 들뢰즈 사유를 큰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는 <들뢰즈, 초월론적 경험론>을 읽으며 한 해 동안 읽어온 개념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고요. 저자인 안 소바냐르그 샘의 친절한 설명 덕분에 들뢰즈의 개념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볼 수 있었는데요. 물론 저희가 잘 알지 못하는(읽지 않은) 철학자들의 개념에 대한 설명들도 쏟아져서 정신이 혼미해질 때도 있었지만, <차이와 반복>이전 저작들을 중심으로 들뢰즈 사유에 대한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시야가 조금 넓어진 느낌입니다. 게다가 후반부에서는 <차이와 반복> 이전의 사유에서 과타리를 만난 이후의 사유로 이행하는 과정까지 설명해주고 있어서 내년 공부에 대한 기대감도 한껏(!) 높여주네요.ㅎㅎ
마지막 강의에서는 저희 질문들을 중심으로 채운샘께서 다시 한번 개념들을 설명해주셨습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애매하던 부분들이 좀더 선명해졌네요. 기억에 남는 부분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내재성, 내재성의 평면
들뢰즈가 말하는 내재성(immanence)은 어려웠던 개념 중에 하나입니다. 이는 어떤 실체적인 것의 내부(interior)와 외부(exterior)를 말할 때의 내부와는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내재성, 내재적인 것은 바깥(dehors)과 짝을 이룹니다. 이 둘은 하나의 평면에 있고, 서로를 통해서만 성립됩니다. 이를테면 스피노자가 말한 신과 피조물(양태)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신은 피조물을 통해 펼쳐지고, 피조물은 각자의 방식으로 신을 함축하고 있죠. 또 나와 타자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나는 타자(음식)를 취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고, 타자라는 개념은 나를 통해서만 성립됩니다. 모든 타자는 나를 구성하는 바깥이라는 의미에서 들뢰즈는 ‘내재하는 바깥’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요. 타자들은 모두 내재하는 바깥입니다. 나는 타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내가 타자인 건 아니죠. 이런 의미로서의 바깥이라는 말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이 푸코라고 합니다. 그래서 푸코의 사유를 ‘바깥의 사유’라고 한다고 하고요.
<천개의 고원>에서는 ‘되기’라는 개념으로 이야기됩니다. 되기는 becoming, 즉 a가 b를 만나서 a나 b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뭔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말벌과 양난은 생존을 위해 자기 안에 타자성을 받아들여 양난이 되고 말벌이 됩니다. 서로 다른 것이 만난다는 건 그것들이 각자 자기 자리를 떠나는 운동이기도 하므로 ‘사이의 운동’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념, 현실화된 모든 것의 발생의 근거
이념도 나올 때마다 애매했던 개념 중에 하나입니다. 굉장히 다양하게 설명되어서 오히려 더 애매해지기도 했는데 <차이와 반복>에서는 한마디로 ‘차이’라고 합니다. 이념은 이데아(idea)를 말하는데,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다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변화하는 현상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 현상계의 근원적인 토대이자 영원불변하는 세계를 말하죠.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다르지만, 들뢰즈는 지금 이 세계를 이런 식으로 있게 하는 근본적인 차원, 변화하는 근본적인 세계를 이념으로 보았습니다. 모든 것들의 발생의 근거, 근본적인 차원이라고 하면 선험적으로 먼저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 들뢰즈가 강조한 것이 ‘내재성의 평면’이고요.
문제, 문제의 장, 물음
이념은 어떤 것으로 현실화되기 이전의 잠재적인 차원을 말합니다. 독특성(singularity)으로 가득 차 있고 문제로 가득 찬 ‘문제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현실화된 것은 현실화되자마자 잠재적인 것을 향해갑니다. 잠재적인 것은 잠재화되자마자 현실화를 향해가는 경향이 있고요. 잠재화와 현실화의 운동은 동시적입니다. 모든 것은 이 두 운동 속에서 존재합니다.
독특성은 지하철 노선표에서 환승역과도 같다고 비유해주시니 이해가 쉬웠습니다. 환승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면 완전히 다른 계열로 가게 되죠. 다양한 환승역을 가지고 있는 지하철 노선표는 이념, 이념의 구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내리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현실화됩니다. 이처럼 이념의 구조, 차이의 장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현실화될 수 있는 아주 많은 조건들을 가지고 있는 문제의 장이기도 합니다. 현실화된 개체들은 ‘해(解)’가 되겠죠.
모든 텍스트도 이념의 구조, 문제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어떤 구절을 우리 방식으로 현실화시키면 그 텍스트는 나의 현실적인 해석을 잠재적인 것으로 갖게 됩니다. 들뢰즈는 푸코의 책을 해석함으로써 그 책을 자기 방식으로 현실화시켰죠. 그 해석은 푸코의 책에 잠재적인 것으로 존재하고 사람들은 그 해석을 참고합니다. 이처럼 책은 문제의 장이고, 답이 아니라 물음입니다. 나의 독해가 ‘해’죠. 그러므로 우리가 책을 읽는다는 건 그 책을 더 잠재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해석을 통해 현실화하는 것인 동시에 그 책을 훨씬 더 풍성한 다양체로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고요. 자기 해석이 들어가지 않는 읽기는 책을 욕보이는 것(!)이란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책뿐 아니라 삶 자체도 문제의 장입니다. 삶은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를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지요. 태어나고, 병들고, 죽고, 만나고, 헤어지는 등의 모든 사건은 삶 안에 잠재적으로 존재합니다. 개체는 그것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계열화하고 펼치고 현실화합니다. 잠재적인 문제의 장으로부터 내가 문제들을 계열화하는 것이 물음입니다. 그 문제들, 그 사건들을 어떤 방식으로 펼치고 의미화하느냐에 따라 개체의 삶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개체 이전의 삶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평면입니다. 그래서 삶을 익명의, 비인칭적인 장이라고도 하고요. 우리가 명확하게 답을 얻지 못한 ‘순수 과거’도 그런 장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초월론적 경험론
마지막으로, 들뢰즈의 특징적인 사유인 초월론적 경험론은 무엇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요?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저는 앞에서도 계속 언급된 것처럼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세계’를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초월론적 경험론은 ‘우월한 경험론’, ‘야생적이고 강력한 경험론’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것처럼, 방점은 ‘경험론’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론은 우리가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나눌 때의 경험론, 즉 앎이 경험에 기반해 구성된다고 주장하는 그 경험론이 아닙니다.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은 오랫동안 철학이 배제해왔던 신체성을 복권시킵니다. 스피노자도 발생적 차원에서 모든 관념은 신체에 대한 관념이라고 했고, 니체도 신체야말로 이성이라고 했지요. 이처럼 어떤 것도 우리 신체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경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신체를 앎의 근원으로 환원하면 안 되고, 그 발생을 사유하는 데까지 가야 하므로 초월론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고요. 샘께서는 경험에 갇히지 않는다는 느낌으로 ‘초험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정말 그런 거 같아요. ‘초월론적’이라는 말 때문에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강의 후에 모두 입을 모아 얘기했지만, 세미나 시간에 그렇게나 헤맸던 개념들이 강의를 들으면 어렵지 않게 이해되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하지만 또 저희끼리 얘기할 땐 무수한 물음들이 떠오르겠죠?(물음은 사라지지 않으니까요!ㅋㅋ) 한 해 동안 세미나를 이어 오면서 저희도 들뢰즈 사유에 잠재적인 차원을 더했을 거라고 믿으며, 내년에 읽을 <안티 오이디푸스>도 함께 풍성한 다양체를 만들게 되길 기원해 봅니다!
내년에 만나요, 샘들!!!😃
안 선생님의 책 <들뢰즈, 초월론적 경험론>은 금년 한해 마무리를 하기에 좋은 책이었던 것 같아요. 들뢰즈가 누구를 어떻게 만나서 그들을 통해 변용되고 개념을 창조했는지가 넘 잘 설명되었죠~~ 물론 그 전에 들뢰즈가 쓴 초기 저작들을 이리저리 헤매었기에 안 선생님의 설명이 눈에 잘 들어온거겠죠? ㅋㅋ
내 삶과 사유는 신체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를 토대로 시공간적인 조건을 사유하고 문제화하면서 이 경험에 갇히지 않고 다른 길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와닿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우리가 뭔가를 함으로써 나 뿐만 아니라 접속한 타자와 같이 변용된다는 것도요. 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번 세미나를 통해 헤맨만큼 들뢰즈를 변용시키고 잠재적인 차원을 더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후기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