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차이와 반복> 서론을 읽었을 때 들뢰즈란 사람의 사유에 아주 깜빡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저 현란하다고만 표현될 수 없었어요. 뭔가 깨달은 자의 말을 논리적으로 펼쳐내면 이런 건가 싶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건 놓칠 수 없다 싶어 섣불리 세미나를 기획했고, 아주 혼쭐이 나고 있습니다. 들뢰즈의 사유 속에서 제대로 허우적대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또 나름대로 매력은 느껴지고 있어서 계속 읽을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이 난감함을 즐기는 게 들뢰즈를 읽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일까요!?
각설하고, 이번 시간에는 들뢰즈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를 하나 잡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초월론적 경험론’입니다. 안 소바냐르그는 ‘초월론적 경험론’으로 들뢰즈의 철학과 저술을 관통합니다. 그러고 보니, 들뢰즈의 여러 개념들을 이해하는 데 급급해서 들뢰즈의 철학이 어떤 지도를 그리고 있는지 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목요일에 채운쌤의 주역 강의를 들을 때도, 저는 들뢰즈가 무엇과 싸우고 있었는지, 그가 파악한 시대적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이번에 초월론적 경험론으로 들뢰즈의 개념 지도를 그리면서 어떤 새로운 풍경을 볼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대략 이번 토론은 “철학적 사유를 탄생케 하는 조건들”에 대한 얘기들이 주를 이뤘던 것 같습니다. (‘초월론적 경험론’이란 채운쌤께서 여러 번 설명해주셨지만, 아직도 저는 제 입으로 말할 만큼 전혀 소화하지는 못했습니다. ㅋㅋ;;) 들뢰즈는 칸트와 베르그손, 프루스트에 힘입어 기존의 진리-참을 목적으로 삼는 재현적 사유에서 벗어나, ‘이미지 없는 사유’란 무엇일 수 있는가를 탐구했습니다.
이해가 되는 것만 정리해 보면, 들뢰즈는 칸트를 독해함으로써 초월론적인 것을 사유할 수 있었죠. 칸트는 ‘보편적인 나’와 ‘개체적 자아’ 사이를 구분하면서 ‘생각하는 나(코기토)’를 종합하는 수동적 운동이 선행한다고 했죠. 즉, 경험된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평면(“주체 없는 개체화의 평면, 전개체적 독특성의 평면”)에 의해서 우리의 실존이 규정된다는 거죠. 들뢰즈는 나중에 칸트가 지복과 최고선이라는 두 가지의 상이한 질서의 일치를 신에 의한 예정조화로 설명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칸트를 통해 초월론적인 것을 질문하는 시선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기호를 통해서 철학적 사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단서를 얻는데요. 토론에서는 ‘초월(론)적 감성론’, ‘초월(론)적 변증론’으로 그런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 같다고 하면서 이 개념들을 이해하려고 했는데요. 사실 잘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프루스트의 기호를 포착하는 예술가의 작업을 들뢰즈는 어떻게 철학자의 사유 작업으로 승화시켰는지, 그게 왜 ‘초월(론)적 감성론’ 같은 개념으로 요약되는지 여전히 잡히지 않아요. 후기로 정리하려고 했지만, 하나도 못 쓰겠네요! <차이와 반복>도 한 번 읽고, 강의도 듣고, 깔끔하게 정리된 책을 읽었지만, 손에 잡히는 게 없네요. ( ˙⤙˙ )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소바냐르그의 관점, 들뢰즈의 문제의식은 그의 초기 저작에서부터 <안티-오이디푸스> 같은 후기(?) 저작에까지 일관되게 읽을 수 있다는 주장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사회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분석하는 비교적 이후의 문제의식이 ‘사유체계의 철학사’를 구축하던 때로부터 계속 이어져 왔다는 얘기는 들뢰즈에게 철학함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줬거든요. 사유체계를 새로이 정립하는 그의 시도가 추상에 그치기만 한 게 아니라 매우 윤리적이면서 정치적이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저는 여전히 들뢰즈의 철학을 너무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고요. 들뢰즈 읽기는 두고두고 계속해야 할 수밖에 없는 진부한 다짐을 다시 하면서 내용 없는 후기를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들뢰즈 철학을 조금 덜 협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길 바라며, 두고두고 들뢰즈 읽기를 계속해야겠다는 진부한 다짐을 다시 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