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들뢰즈, 초월론적 경험론> 4장~6장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4장과 5장의 내용과 관련해 ‘사유’와 ‘잠재적인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들뢰즈의 저작을 읽어오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던 개념(?)이 바로 이 두 가지가 아닌가 싶은데요. 특히 우리가 ‘사유’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이미지, 이를테면, 사유는 사유자의 선한 의지로 시작되고, 사유자는 자연적이고 조화롭게 실행되는 사유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게 되며, ‘오류’는 사유를 그 자연적이고 조화로운 실행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외부적이고 낯선 힘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지요. 들뢰즈는 기존의 사유의 이미지를 “차이를 개념의 동일성에 종속시키는 재현의 모델”로 보고 이에 맞선 싸움을 제기합니다. 그 길에서 프루스트와 베르그손에게 도움을 얻습니다.
들뢰즈는 칸트의 인식 능력 이론에서 ‘순수성(인식 능력의 우월한 사용, 즉 순수한 사용)’을 ‘수동성(사유 안으로 침입해 오는 물질적 기호)’으로 변형시킵니다. ‘초월적 실행에 이르는 서로 다른 인식 능력들’이라는 칸트의 도구를 간직하면서, 프루스트의 ‘비자발적인 것’을 인식 능력의 가장 뛰어난 실행 방식으로 만듭니다. 안 소바냐르그는 들뢰즈가 비자발적이라는 프루스트의 테마를 베르그손적인 틀 속에 위치시켰다는 점도 설명합니다. 들뢰즈는 인식 능력 이론의 틀을 완전히 변형시켜 ‘인식 능력의 우월한 실행’을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사유에 창조를 강요하는 어떤 기호와 비자발적으로 만날 때 겪게 되는 폭력 아래서 그 인식 능력이 자신의 한계까지 나아가는 것.” 이렇게 칸트의 ‘수동적 정서’는 들뢰즈에게 ‘사유의 창조 및 사유의 창의성을 위한 조건’이 됩니다.
토론에서도 이야기를 나눴지만, 능동성이 아닌 수동성이 사유 창조의 조건이라는 점은 우리가 생각하던 ‘사유’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입니다. 들뢰즈는 인식 능력의 자발적 실행이 재현적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일에 그치는 데 반해, 인식 능력의 비자발적 실행은 사유를 “초월적이면서도 탈구된 실행”으로 이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인식 능력의 비자발적 실행을 촉발하는 것이 바로 ‘사유 안으로 침입해 오는 어떤 기호, 이질적인 것의 폭력적인 난입’입니다. 들뢰즈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죠. “사유는 전기가오리, 등에를 필요로 한다.”
사유가 사유자의 의지가 아닌 어떤 폭력적인 만남으로‘만’ 시작될 수 있다는 말은 우리에게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럼 내가 이렇게 골똘하게 하고 있는 건 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우리는 비자발적으로만, 즉 ‘강요와 우연을 통해서’만 진리와 조우한다”와 같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내가 지금 규문에서 하고 있는 건 뭐냐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지난 시간에 한 샘이 예를 들어주신 것처럼, 우린 익숙한 걸 보면 질문하지 않습니다. 들뢰즈도 지적하지만 그럴 때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사유가 아니라 ‘재인’일 뿐입니다. 그러다가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어떤 이질적인 것과 마주할 때, 그래서 머리가 작동을 멈추는 순간을 만날 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칸트의 ‘숭고 분석’에서 고장난 인식 능력들이 다시 조화를 이루기 위해 힘겹게 작동을 시작하는 것처럼요.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유하려는 ‘의지’를 내는 게 아니라, ‘전기가오리’나 ‘등에’를 만나기 위해 무수한 시도를 하는 것뿐이라고, 저희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들뢰즈가 끊임없이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러 다닌 것처럼요.
다음 시간에는 8장까지 읽고 내용을 정리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주영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수동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거 같아요. 우리가 자유의지나 자발적이라고 여겼던 부분들도 다시 생각해보면 최초에 폭력적인 만남, 사유할 수 밖에 없음에서 비롯한 것임을 이번 공부를 통해 배웠습니다. 들뢰즈와 칸트 등 이번에 만났던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전기가오리'와 '등에'로 작용했는데, 앞으로도 이들이 어떤 자극을 줄 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