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론적 경험론’이라는 키워드로 들뢰즈의 철학을 독해하고 있는 우리의 ‘안’ 선생께서는, 들뢰즈의 철학적 전개 및 그 확장에 칸트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일깨워주고 있는 듯합니다. 칸트의 삼비판서를 건축학적으로 정리하고 있다는 <칸트의 비판철학>을 끌고 와서, 칸트의 인식능력 이론이 ‘초월론적 방법론’을 구성하는 핵심적 토대가 되고 있다는 점을 세밀하게 증명하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들뢰즈는 칸트적 주체성의 사유 및 그로 인한 관념적, 인간적 한계를 넘어서 ‘실재적 경험론’을 확립하기 위해 프루스트와 들뢰즈에 기반해 칸트를 비틀고 변형시키기도 하지만, 또 칸트 철학의 틀을 바탕으로 이 철학자들을 재해석하고 있기도 한 게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칸트는 계속 등장할 것 같은데, 다른 건 몰라도 철학에서의 ‘초월론적인 것’과 관련해서는 칸트가 그 원조격에 해당하는 건 확실한 듯합니다. 칸트를 빌려 그 누구의 것이랄 수 없는, 자신의 인장임에 분명한 독자적인 철학을 우리 앞에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 들뢰즈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겠고요. 이번 시간에도 어김없이 무성한 논의들이 오갔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올 한해 읽었던 텍스트들을 꼼꼼하게 복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는 저만의 것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맞죠?(^^) 욕심 같아서는 친절한 ‘안’ 선생의 논의를 깔끔하게 정리해 들뢰즈의 개념에 대한 이해를 돕고 싶은 마음 굴뚝같사오나, 능력이 안 되는 관계상, 중요하게 논의됐던 대목들을 발췌하는 걸로 후기를 대신할까 합니다. 근데, 헉 짧게 내용정리 하고 말 것을, 괜히 요령 피다가 발췌, 정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고 말았네요(ㅋㅋ). 그래도, 찬찬히 읽어가시면서 복습하시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자, 도전!!!
- 들뢰즈는 칸트의 모델, 우월한 사용에 도달한 어떤 인식 능력의 주도권 아래서 생겨나는 인식능력들의 조화라는 모델을 적용하여 프루스트를 변형시킨다. 프루스트에게서 인식 능력이 우월한 사용에 도달하게끔 하는 것은 어떤 기호의 비자발적·폭력적 난입이다. 비자발적 기억을 자극하고, 강렬한 경험, 즉 ‘한 순간의 순수 상태’라는 형태로 화자에게 예술에 대한 소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감각적 만남뿐이다. -----들뢰즈는 인식 능력 이론의 틀을 완전히 변형시킨다. 따라서 어떤 인식 능력의 우월한 실행이란 사유에 창조를 강요하는 어떤 기호와 비자발적으로 만날 때 겪게 되는 폭력 아래서 그 인식 능력이 자신의 한계까지 아나가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칸트가 병리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수동적 정서는 들뢰즈에게 사유의 창조 및 창의성을 의한 조건으로 드러난다.
- 초월론적인 것은 공통감이 쉬이 복종하는 일상적 형식들로부터 연역될 수 없으며, 안정화되어 인간 경험의 심리적 한계로 환원될 수도 없다. 사유의 참된 창조에 응답하기 위해, 초월론적 구조의 관념론은 경험론적 발견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여기서 경험론적 발견이란 가능한·정신적·주체적 경험과 대면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 경험과 대면하는 일이다.
- 사유의 참된 자율성은 사실 어떤 이질성, 어떤 변용으로서, 창조적 사유의 조건으로 드러난다. 수동성은 철학의 가능성으로 나타난다. 철학이 재현이라는 반성적 태도에서 벗어나 개념의 구성을 통해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수동성이다. 철학이 ‘개념을 형성하고, 발명하고, 고안해내는 기술’이라면, 다시 말해 철학이 반성이 아니라 발명의 역량이라면, 이는 철학이 기호의 폭력 하에서 사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뢰즈에 따르면, 초월론적 경험론이 초월론적인 것으로 남게되는 까닭은 그것이 사유로 하여금 ‘권리상’ 사유 자신의 실행을 위한 조건들을 규정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리상의 연역이 실재와 접촉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기위해서는 초월론적 경험론이 경험적인 것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 사유의 창조, 사유의 생식성은 사유를 그것의 한계까지 데려가 자신의 무능을 경험하게 하는 데서 성립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유가 “사유하도록 강요받는 것은 결국 사유 자체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붕괴, 사유 자체의 균열, 사유에 고유한 무능”이다. 이런 조건에서만 초월론적인 것은 더 이상 일상적인 공통감의 경험적 형식들을 기초로 전사되지 않는바 우월한 경험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 들뢰즈가 칸트와 결별했다고 평가된다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들뢰즈가 칸트에 맞서 숭고 개념을 자기 식으로 정의하게 됨에 따라 인식능력 이론을 다루던 최초의 고전적, 구조적 독해가 초월론적 경험론 및 프루스트에 대한 독해와 더불어 <판단력 비판>에 대한 낭만주의적 독해로 이어져 인식능력들의 자유로운 유희와 초월적 실행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낭만주의적 독해는 이후 영화 철학과 더불어 숭고의 한계 초과, 즉 즉 참된 사유의 논리로 확대되는 한계 초과로 재해석된다.
- “들뢰즈의 베르그손 독해는 마법과도 같으며, 내가 보기에 스피노자보다도 더한, 니체보다도 더한 들뢰즈의 진정한 스승은 바로 베르그손이다” - 바디우
- 비자발적 실행에서 드러나는 인식능력들의 탈구적 사용은 우리에게 시간. 즉 프루스트가 말하는 ‘한순간의 순수 상태’-추억이라는 주관적인 변용에서 주어지는 시간이 아니라 즉자적으로 보존되는 시간-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 과거와 현재의 공존은 ‘잠재적인 것’이 들뢰즈 철학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는 개념으로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보여준다. 들뢰즈에 따르면 바로 이런 이유에서 베르그손은 “잠재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가장 높은 지점에 이르게 하면서, 기억과 생명에 대한 철학 전체를 그 개념 위에 세운다”. 그러한 철학은 “잠재적인 것이라는 개념이 더 이상 모호하고 미규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다”.
- 잠재적인 것은 현행적으로 현전하지 않는 것 전체이지만 그럼에도 실재적이다. --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과 동일한 정도로 존재하지만 현실적이지는 않은 어떤 실재성을 제시하는 데 사용된다. 이를 통해 잠재적인 것은 시간적 실재성이라는 위상과 현실적이지는 않은 이상성이라는 위상을 동시에 갖게 된다. 그렇지만 잠재적인 것은 심리적인 것도 정신적인 것도 하니며, 이는 순수 부분기억(잠재적 이미지)이 의식의 바깥에,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실재적이지만 현실적이지는 않은 잠재적인 것의 내속은 공간적이고 이미 주어진 현행적 현재의 외연적 실존에 상응한다.---잠재적인 것은 탈심리화된 과거, 자신의 자리에 없는 조각, 반복의 영원회귀로 간주된다. 프루스트에 따르면 이 잠재적인 것이 바로 ‘본질’이자 ‘순수과거’, 또는 ‘한순간의 순수 상태로, 예술만이 이를 되살려 낼 수 있다고 한다. --- 예술이 심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실효화해주는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한 까닭은 예술이 우리의 개인적인 추억에 속하기 때문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영속적인 교류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시간은 주체성의 근거로 나타날 수 없으며, 본성상 변화하면서 끊임없이 나누어지는 강도적 다양체로서 오히려 그 근거를 와해시킨다. 시간의 텅빈 형식은 그것이 균열을 일으키는 나를 지탱해주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훌륭한 정식, “시간은 경첩에서 빠져 있다.”를 들뢰즈가 이어받는 까닭은 자연과 철학을 구획하는 칸트의 이러한 전도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칸트와 더불어, 경첩에서 빠져버린 시간은 자연의 기수적인 경첩에서 빠져나오며, 이제 천체의 운동에 따라 리듬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서수적인 것이 되어 순수 이질성으로 내면화된다.
- <차이와 반복>이 집중하고 있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어쩐 조건에서 새로운 것을 진정한 창조로 사유할 수 있게 되는가? 변화하는 것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 들뢰즈가 제시하는 첫 번째 답변은 베르그손적인 것. 즉 변화하는 것은 어떤 이질성, 지속하는 이질성으로 사유되어야 한다. 지속이란 계속적으로 변화하면서도 항존하는 그런 이질성이다. 시간을 생성이자 지속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첫째, 새로운 것을 이론화할 수 있는 변화의 개념. 둘째, 다양체의 실재적 이질성이 보장할 수 있는 다양체에 대한 구상. 셋째, 지속을 주관적 경험으로 환원하지 않는 지속의 정의.
- 지속을 이질성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잠재적인 것에 대한 전적으로 새로운 구상뿐만 아니라 다양체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개념을 또한 함축한다. 지속을 진정 변화하는 것으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개인적이거나 체험된 내면성에 의존하지 않도록 지속을 완전히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지속을 본성상 변화하면서 나누어지는 다양체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
- 잠재적이고 연속적이며 주어진 단위나 수로 환원될 수 없는 참된 다양체인 시간과 현실적이고 불연속적이며 불활성의 수적 다양체인 공간이 서로 대응한다. 이것이 바로 베르그손의 테제다. 즉 베르그손의 테제는 공간적이고 현실적이며 일자에 종속된 병치의 다양체와 시간적이고 잠재적인 융합의 다양체를 대립시킨다. 리만은 전자를 이산적 다양체, 후자를 연속적 다양체라 하는데, 각각 홈 파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으로 대별된다. 들뢰즈는 이를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의 구별 안에 새롭게 배치함으로써 두 측면을 얻게 된다. 한편으로는, 공간적인 객관적인 것, 즉 부분 밖의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원하는 만큼 작으면서도 현행적으로 현전하는 현실적인 양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적이고 불가분적인 주관적인 것이 있는데, 보다 정확히 발하자면 그것은 본성상의 변화를 겪을 때에만 나누어질 수 있다.
- 두 가지 다양체의 나눔은 생성의 철학으로 귀결되는데, 이 생성의 철학은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이라는 두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 생성의 철학은 이 오가는 흐름들과 관련되며, 이 흐름들은 생성의 주기적인 리듬 속에서 두 가지 다양체가 필연적으로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 가지 다양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차이가 그 탁월성을 드러낼 수 있게 해 주는 비동등한 것으로 여겨진다. 1966년 들뢰즈가 쓴 바에 따르면 절대는 두 측면, 즉 정도상의 차이(동질적인 공간 속에서 단일화된 양적 물질적 이산적 차이)와 본성상의 차이(시간적 질적 절대적 주관적 차이)를 갖는다. 차이의 이러한 두 측면은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다. 바로 이 때문에 생성의 철학은 차이뿐만 아니라 반복으로도 귀결되며, 들뢰즈는 동일자와 재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차이와 반복이라는 범주들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잠재적인 것이라는 개념 덕택에 공간적 다양체와 시간적 다양체의 피상적인 이원론은 감각운동적 관점과 실재적 시간성 간의 차이로, 경험적 현실성과 잠재적 이상성 간의 차이로 바뀌게 된다.
- 잠재적인 것은 생성을 가능케하고 변화의 실재성을 보증하며, 현실적이지 않은 것에 그것의 현실화를 보장해 주는 특수한 실존방식(혹은 내속 방식)을 부여하면서 현실적인 것 아래 내속한다. 아울러 잠재적인 것은 이질적, 유동적 전체성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다양한 시간선들의 공존을 보증해 준다. 잠재적인 것은 변화를 포괄하는 전체, 열린 전체, 본성상 변화하는 전체성이라는 새로운 구상에 이른다.
- 재현적 가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가능한 것이라는 추상적 사본에 따라서가 아니라 잠재적 경험이 풀려나오는 실재의 실타래를 따라서 이념과 감성적인 것의 관계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추상적 사본은 감성적 직관이 사후에야 충족시키게 될 정신적 경험인데 반해, 실재의 실타래는 감성적 것의 내부에서 이념이 분화되는 과정인 현실화다. 따라서 잠재적인 것은 예측불가능한 분화라는 역동적인 개념과 관련되는 데 반해, 가능한 것의 현실화는 사물에 대한 정신적인 개념과 가능한 것의 추상적인 유사성을 함축하고 있을 뿐이다. ---- 초월론적인 것은 경험의 가능적 조건이 아니라 경험의 잠재적 조건들에 근거한다. ---경험을 넘어 경험의 조건들로 나아가는 일. 경험이 그 근원에서 인간적 경험이기를 그치는 지점, 경험이 심리적으로 굴절되면서 억견의 일상적인 범주들 속에서 거꾸로 비춰지는 전환점을 넘어서 말이다. 가능한 것의 잠재적인 것으로의 대체. 직관이 초월론적 경험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직관에 힘입어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확대하거나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서 경험의 조건들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경험의 조건들이 규정되는 것은 개념에서라기보다는 순수 지각에서, 즉 사유가 어떤 기호의 폭력적인 침입 하에서 창조를 시작하게 되는 순수 변용-사유의 파토스, 시간-이미지-에서다.
- 직관은 독창적인 사유 방법으로 이해돼야 한다. 이 사유 방법은 사유의 논리학을 사유의 감성론이 제시하는 실재적 조건들과 연결해 준다. 경험적인 경험을 넘어 권리상의 조건들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 다시 말해 초월론적 분석의 방법이라는 것. 베르그손의 직관은 칸트의 주체가 지닌 심리적, 억견적, 내관적이라는, 결국 일상적인 재현에 맞춰져 있다는 특징을 바로잡는 치료제로 사용된다. 따라서 지속에 대해 열리는 한에서 직관은 심리학에 대한 치료제로 사용되는 듯 보이는데, 이 지속 자체도 동일한 탈심리화의 과정을 거쳤다. ---직관이 방법의 지위에 올라설 수 있는 까닭은 주관적인 공감을 통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직관은 내적 상태에 대한 반성적 이해와는 상반된 것으로 드러나며, 주체의 변용과 구별돼야 한다. 막연한 감정이입, 모호한 공감 혹은 타잉니 불러일으킨 공감이기는커녕, 직관은 지속 자체로부터 자신의 엄밀함과 정확성을 이끌어내면서 ‘정교화된 방법, 심지어는 철학에서 가장 정교화된 방법들 중 하나’가 된다. 직관은, ‘사물 자체 안에 깊이 잠기는 데서’ 성립하는 것. 나아가 직관은 지속 안에 직접 위치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이자 우리 신체에 맞추어 중심화된 지각의 너머를 내다볼 수 있게 해 주는 방법.
*** 마지막으로, 이 주의 한 마디 : “사유는 전기가오리, 등에를 필요로 한다”. 우리 모두 자기 열의 동학들에게 전기가오리가 돼 주자고요!!!
맞습니다!^^ 저도 올해 읽은 텍스트를 다시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 주의 한마디를 명심하며(!) 정리해주신 내용 찬찬히 잘 읽어볼게요. 감사해요 샘!!😃
책에서 중요한 개념들 정리하는 것이 저번주 토론 짧게 스케치하는 것보다 오히려 시간이 더 많이 걸렸을 것 같은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잘 정리해주신 개념들 복습에 도움이 될 듯합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