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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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소바냐그르의 <들뢰즈, 초월론적 경험론> 덕분에 들뢰즈의 개념들이 누구와의 마주침을 통해 어떻게 생산된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경험주의와 주체성>, <칸트의 비판철학>, <프루스트와 기호들>, <베르그손주의>에서 이해가 잘되지 않았던 부분들도 안선생님의 친절한 설명 덕분에 해결이 된 부분도 있네요. 매번 느끼는 바지만, 들뢰즈는 다양한 철학자, 작가들과의 접속하며 발생한 경험을 공상과학소설의 방식으로 변형시키면서 개념을 창조합니다. 니체의 힘의지, 칸트의 인식 능력, 프루스트의 사유 이미지, 베르그손의 잠재적인 것과 다양체, 스피노자의 행동학, 구조주의자들의 여러 테제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고, 그들의 개념들을 비틀면서 들뢰즈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합니다. 이런 능력은 참으로 부럽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우리의 문제에 대해 사유하며 들뢰즈의 개념을 심오하게 변형시키는 날을 맞이하겠죠? 지금 우리의 더듬거리는 해석, 아무말 대잔치는 그런 길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 실체, 양태, 속성
3주차에는 7장과 8장에 대해 얘기를 나눴는데요. 7장은 시즌1~3에서 다루지 않았던 스피노자에 관한 것입니다. 들뢰즈도 잘 모르지만, 스피노자는 더더욱 몰라서 일단 실체, 양태, 속성 같은 기본적인 개념부터 궁금했는데요. 스피노자를 오랫동안 공부한 규창샘이 기초적인 부분에 대해 잘 설명을 해줬습니다. 실체는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것으로 스피노자는 신 또는 자연을 실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 곧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실재의 개념이 필요하지 않은 것을 실제로 이해한다.”라고 스피노자는 말합니다. 양태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인 실체와는 달리 다른 것 안에 있으며 또한 다른 것에 의해 비로소 인식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체가 자기원인적인 존재라면, 양태는 타자 원인적인 존재자라고 할 수 있죠. 스피노자는 양태를 “실체의 변용들”이라고 부르는데, 양태는 실체가 자신을 변화시켜서 생성해낸 결과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에게 양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가리키는데요. 한편 속성은 실제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고, 이는 지성이 그렇게 지각하는 것입니다. 이 속성개념도 독특하죠? 스피노자 철학에서 속성이라는 개념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을 의미하고 속성들은 무한하게 많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속성들은 모두 동등하게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거나 표현한다는 점에서 서로 평등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신과 신체로 구성된 인간은 정신이 속해있는 사유 속성과 신체가 속해있는 연장속성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합니다.
# 일의성
스피노자의 실체, 양태, 속성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7장 얘기로 넘어갔는데요. 들뢰즈는 스피노자와의 접속을 통해 뭘 만들었을까요? 들뢰즈는 다의성 및 유비에 비판을 가하고 일의성의 철학, 내재성의 형이상학을 개진하게 되는데, 이때 스피노자 체계를 중심으로 삼게 됩니다. 그가 생성의 논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일의성 덕택인데, 이 생성의 논리에 있어 사유와 물질은 더 이상 위계화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의 구별을 유지하면서 공존합니다. 스피노자에게는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이 동등한 것으로 평가되며 위계도 물질에 대한 사유의 탁월성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타동적이지 않은 단 하나의 원인이며, 내재적인 원인들의 질서는 자연 전체를 무한한 방식으로 변용시키는 관계들의 합성과 해체의 질서죠. 즉 내재성은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긍정입니다. 그런데 일의성이 보장해주는 것은 차이인데요. 실체의 일의성으로 인해 동일성 사유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복수주의, 실사적 다양체에 대한 긍정으로 향하게 됩니다. 스피노자의 일의성 신학은 탁월성, 초월성,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그것들의 파생물, 즉 다의성이나 유비와 단절하게 됩니다.
# 기호와 표현
스피노자는 기호와 표현을 구분합니다. 스피노자에게 기호는 신의 직접적인 표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화용론적인 목적만을 갖는 관념, 상상 속에 새겨져 있는 관념인데요. 이런 기호는 우리로 하여금 “그 본성을 알지 못하는 어떤 신을 섬기도록” 마련된 관념인 것입니다. 기호는 명령을 뜻하며 실천적으로 복종에 결부되어 있는데, 표현은 우리에게 인식을 주는 어떤 본질을 나타냅니다. 신의 표현은 복제나 모방이라는 유비적인 방식을 빌려 오는 것이 아니고, 의미작용이라는 별도의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의 표현은 물질적, 직접적, 무매개적이네요. 스피노자에게 “표현하다”라는 말은 ①어떤 본질을 표현하다, ②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다, ③실존을 표현하다로 사용됩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철학의 이해에서 표현이 매우 중요하다고 봤는데, 그 동안 훌륭한 주석가들이 이 개념을 전혀 혹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즉 들뢰즈가 오랫동안 언급되지 않았던 표현 개념을 고찰합니다. 표현과 관련된 더 자세한 내용은 <스피노자와 표현문제>를 읽으면 되는데, 나들이 세미나가 지속되는 한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죠?
한편 예상대로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기호를 그대로 가져오지 않습니다. 칸트의 주제를 칸트주의에 도입하여 칸트주의를 변화시키듯이, 들뢰즈는 기호론에 반대하기 위해 스피노자를 활용합니다.^^ 들뢰즈는 니체와 스피노자를 결합하여 역량의 유형학을 펼치는데요. 이 관점에서 보면 기호는 새롭고도 중요한 가치를 획득하고 필연적인 방식으로 우리 정서의 진단에 참여하게 됩니다. 기호는 우리의 현재 상태와 역량의 변이를 보여주는 지표인 거죠. 해석의 도덕이 아니라 신체의 물리학이라는 관점에서 들뢰즈는 기호의 중요성을 되살립니다. 기호는 더 이상 자신의 물질적 신체를 어떤 지성적 형태와 결부시키는 ‘해석의 도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기호의 실존을 실재적 기능으로 사유하는 윤리학, ‘실효적힘의 행동학’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들뢰즈는 기호를 의미작용이 아니라 변용시키는 힘으로 간주하는 새로운 구상을 이끌어냈죠. 기호는 더 이상 인간의 심리적 특질이나 상상력의 부적합한 형상화 작용이 아니라 만남과 포획의 문제로서의 정서, 관계의 합성과 역량의 변이로서의 정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이것임
들뢰즈는 기호를 스칼라기호와 벡터기호로 구분하는데 이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개체화의 두 계기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개체는 실체나 영혼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양태, 다시 말해 일종의 ‘관계들의 관계’의 합성으로, 특정한 역량에 부합하는 독특한 본질로 정의되는데요. 본질은 논리적 가능성이나 기하학적 구조가 아니라 역량의 일부, 일정한 정도의 물리적 강도가 됩니다. 스칼라기호는 항상 어떤 정서로 힘 관계의 합성에 대응하며, 벡터기호는 역량의 변이에 대응되는데, 이는 들뢰즈가 말하는 ‘이것임’의 이론에 적용됩니다. ‘이것임’이라는 용어는 둔스 스코투스에게서 빌려온 것인데요. 들뢰즈는 우리를 실체, 주체, 형상, 유기적 통일성이라는 개념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이 개념을 받아들였다고 하네요.
‘이것임’은 사물이나 주체의 개체화 방식과 구분되는 어떤 개체화방식을 말합니다. 신체는 주체, 주어진 형상, 작동하는 기능들의 집합으로 정의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신체의 경도를 구성하는 미분적 속도들의 복합적 관계(스칼라기호)와 신체의 위도를 규정하는 변용시키고 변용되는 능력(벡터기호)을 통해 정의됩니다. 신체는 경도와 위도가 만나는 자연의 합성면에서 성립되는데요. ‘이것임’은 신체의 양태적 개체화를 특징짓는 것으로서, 분자적 만남, 전과는 다른 대기, ‘오후 5시’에 해당하는 어떤 단계에서 일어나는 독특성의 분출을 규정합니다. ‘이것임’은 지속 가능한 것이나 정적인 것에 대립되는 덧없는 것이나 소멸하는 것이라는 시간적 규정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존재의 가장 낮은 단계로 환원되지도 않죠. ‘이것임’은 주체로도, 심지어는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어떤 개체화의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 10장에서 "당신들은 경도와 위도이며,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입자들간의 빠름과 느림의 집합이며, 주체화되지 않은 변용태들의 집합이다. 당신들은 어느 날 , 어느 계절, 어느 해, 어느 삶 등의 개체화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어느 기후, 어느 바람, 어느 안개, 떼, 무리 등의 개체화를 가지고 있다. 아니면 적어도 당신들은 그러한 개체화를 가질 수 있으며, 그러한 개체화에 도달할 수 있다. 오후 다섯시, 바람에 실려온 메뚜기 떼, 밤에 나타나는 흡혈귀, 보름달에 나타나는 늑데 인간. '이것임'이라는 것은 개체화된 배치물 전체인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것임'을 설명합니다.
#구조주의 vs 발생
구조주의자들은 의미가 인격적 의식 활동을 통해서 보증되는 것이 아니라 비인격적, 내재적, 집단적 생산의 효과에 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의미는 엄밀하게 내재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죠. 의미는 원리나 기원이 아니며 생산되는 것입니다. 또한 의미는 숨겨져 있거나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현실화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들뢰즈는 구조라는 개념을 전유하지만 이를 독창적으로 만들어가는데요. 당대에 구조주의자들과 역사 옹호자들끼리 대립한 바와 같이 구조와 발생은 모순된 것으로 여겨졌었죠. 구조주의적 분석은 공시적 경향을 보였는데, 들뢰즈는 구조의 공시적 가치를 평가절하했습니다. 들뢰즈가 보기에 구조와 발생은 서로 모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발생적 방법이 스스로의 소망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 구조주의라고 여겼던 만큼, 들뢰즈는 발생과 구조를 화해시켰네요. 들뢰즈는 모든 발생적 방법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구조를 활용하고 있음을, 모든 구조는 필연적으로 시간성을 함축하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의미의 논리학으로 규정되는 초월론적 경험론은 관념적 의미작용에 만족하는 평범한 논리학과 의식의 현시작용에 의존하는 현상학 사이에서 의미의 구조적 발생을 펼쳐냅니다.
들뢰즈는 구조를 시간화하여 독특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의미의 유목적 발생을 설명하는데요. “보통 구조라 불리는 것, 그것은 미분비와 미분적 요소들로 이루어진 어떤 체계다. 발생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구조는 또한 의미이고, 이 의미는 구조가 구현되고 있는 현실적 결합관계와 항들에 준하여 성립한다. 진정한 대립은 다른 곳에, 즉 이념(구조-사건-의미)과 재현 사이에 있다.” 들뢰즈는 이념을 복합적인 ‘구조-사건-의미’로 정식화합니다. 그는 이념을 탈정신화하는 동시에 시간화하죠. 따라서 발생과 구조가 이렇듯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수렴되며, 그에 힘입어 들뢰즈는 의미의 발생을 독특성의 방출(의미라는 사건)로 나타나는 이상적 다양체의 현실화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 철학자들의 사유를 들뢰즈가 어떻게 변형시켜 새로운 개념으로 탄생시키는지 자세히 짚어주어서 매번 감탄하며 읽게 됩니다.ㅎㅎ
그런데 내용이 방대해서 그런지 돌아서면 다시 뒤죽박죽이…😓 이렇게 똭 정리해주시니 좋네요!👍
이렇게 정리를 잘해 주시면 제가 정말... 너무... 감사하잖아요, 샘. ㅋㅋ 읽을만한 듯하면서도 막상 니 말로 풀어봐 라고 하면 어버버하게되는 책인 거 같아요.(ㅜㅜ) 어떻게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지 감동할 따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