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가 쓴 여러 책들을 읽었다. 안 소바냐르그 샘이 쓴 <들뢰즈, 초월론적 경험론>은 우리가 읽은 책을 거의 다 훑어주고 계신다. 분명히 여러 번 읽었고 감탄했으며, 세미나 시간에 잘 듣고 왔으나 후기를 쓰려는 지금,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베르그손, 칸트, 니체, 마이몬, 프루스트, 이 분들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오며 개념들의 배경을 설명한다. 역시나 정리는 어렵다. 머릿속에 개념이 잡혀있지 않아서 어렵다고 채운샘이 말씀하셨는데 맞는 말씀이다. 이번에 후기를 쓰면서 공부한 내용도 정리하고 개념도 장착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정리가 안 된다. 그래서 별수 없이 책에서 개념을 정리한 것, 그대로 가져다 베꼈다. 주로 얘기를 나눴던 9장을 적었다.
시공간적 역동성을 띤 규정들은 칸트의 도식이 아닐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실제로 도식은 개념의 시간적 적용을 규정하면서, 그리고 개념의 공간적 구성을 위한 규칙을 직관에 부여하면서 개념과 직관의 일치 가능성을 보증하지만, 여전히 개념에 외부적이라는 점에서 도식은 설명할 수 없다. 들뢰즈가 재치 있게 도식은 개념을 분화시키는 동인이자 개념을 시공간적으로 구성하는 규칙이기는 하지만, 도식을 작용케 하는 역량이 무엇인지, 다시 말해 신비로운 만큼이나 강렬한 힘으로 도식을 부여하는 바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칸트의 도식론을 재평가한다. 들뢰즈는 도식이라는 시공간적 직관에다 논리상의 가능한 것을 배치하는 불가사의한 연결장치를 이념의 내적 역동성으로 대체함으로써 내적 역동성에 힘입어 우리는 구조를 고유의 시간성 및 공간성을 갖춘 하나의 다양체로 이해할 수 있다. (295쪽)
극화는 <니체와 철학>에서 처음 나오는 개념이다. 개념을 극화한다는 것은 개념을 그것의 실행조건들에 결부시킨다는 것이며, 진리의 개념 자체에, 다시 말해 참에 대한 우리의 굴종에 비판의 망치를 휘두르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이중의 작용을 함축한다. 한편으로는 개념을 그것이 촉진하는 삶의 유형에 결부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념을 그것이 현실화하는 이념에 결부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 개념은 이중의 가치평가 대상이 된다. 첫째는 니체의 가치평가다. 진리 개념을 사유가 진리에 대한 추구로서 산출될 때 실제로 사용하는 힘들의 독특한 복합체와 연결된다. 진리가 등장하는 상황을 우리는 임상의로서 내용이나 분위기, 영향력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진리 개념이 이중의 가치평가 대상이 되는 또다른 이유는 진리 개념을 그것이 현실화하는 이념에 결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진리 개념은 “순수 규정들로부터 산출되는 기묘한 극”으로 볼 수 있다. 이 극은 폭력적인 충격으로부터 잔인하게 솟아오른다. 이념의 내용에 대한 이념적 규정 혹은 합리적·비판적 규정은 이념의 극화를 위한 윤리이며, 이런 윤리는 사유에 대한 진단, 사유자의 유형학에 착수한다.(298~299)
들뢰즈는 극화라는 자기 고유의 구상을 규정하고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진정으로 완수할 수 있게 된다. 들뢰즈는 논리상의 가능성에만 의존하는 칸트 도식론의 방향을 바꾸어 그것이 실재적으로 현실화되는 드라마 속으로 밀어넣는다. 칸트의 도식은 논리적 가능성을 초월론적 실재성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범주적 구조 및 직관의 시공간적 역동성이 양립 가능하도록 보증해 주었다. 들뢰즈는 이 분석에서 논리상의 것에 불과한 가능한 것을 이념의 잠재적 실재성으로 대체하고, 칸트식으로 역동성을 개념에 외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출현, 사유의 발생을 실재적으로 규정하는 이념에 내적인 것으로 파악한다.(303)
이념은 사유자의 반응을 일으키며, 개념의 분화하는 현실화 혹은 개념의 개별화를 규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념의 잠재적 미분화는 그것의 시공간적 극화가 본래 어떠하건 간에 독특성들, 미분적 관계들, 공존하는 것들의 할당으로부터 산출되는 다양체를 함축하고 있다.(298)
이념은 개념, 즉 정신적 표상이 아니라 개념의 창조를 자극하는 미분화된 복합체이며 이념이라는 명칭은 ‘순수 사유되어야 할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이몬의 미분적인 것이 그러했듯 “감성에서 사유로 가는, 그리고 사유에서 감성으로 가는 심급들을 위해” 아껴두어야 한다.(321)
이념은 사유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념은 사유를 그것의 무능 및 근거와해(인식 능력들의 우월한 사용)와 폭력적으로 관계짓는 인식 능력들의 불일치하는 사용 속에서 시간적·비자발적 침입에 의해 부과된다. 따라서 이념의 경험적인 압력 아래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념의 문제를 현실화하는 기호의 경험적인 압력 아래서 사유는 사유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런 이유에서 들뢰즈가 제시하는 이념은 사유로 하여금 자기 고유의 무능력에 맞서게 하는 이상적이면서도 실재적인 다양체이다.(330)
본질과 가상을 전도시킴으로써, 우리는 시뮬라크르의 권리를 일반화된, 실증적인, 즐거운 근거와해로 승격시킬 수 있게 된다. 근거와해라는 개념은 최소한의 토대나 근거에도 호소하지 않으면서 논쟁적인 방식으로 사유와 바깥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 사용되며, 부재를 나타낸는 근거와해라는 형식은 바로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다.(329~330)
들뢰즈는 이념을 사유자가 지닌 권력의지의 표현으로 해소시키기를 거부하고, 이제 마이몬 쪽으로 돌아서 노에시스적인 것과 경험의 가장자리에서 감성의 수용성과 지성의 자발성 사이에서 이념에 독특한 잠재적 객관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구조하는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바였다. 따라서 이념을 발생적으로 산출한다는 것은 사유자에 대한 계보학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마이몬이 파악하고 있었듯이 도식론으로 되돌아가 이념의 잠재적(구조적) 이상성과 그것의 경험적 현실화가 맺고 있는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316)
들뢰즈는 결코 이념을 사유자의 능동성이나 신의 무한지성으로 해소할 수 없었다. 이념은 정신의 능동성에 의해 구성되지 않으면서도 복합적인 잠재적 다양체로서, 다시 말해 미분화된 구조로서 존속한다. 들뢰즈는 마이몬의 분석을 받아들여 이념은 개념의 창조를 자극하는 미분화된 복합체라고 말한다. 즉 이념은 마이몬의 미분적인 것이 그러했듯 “감성에서 사유로 가는, 그리고 사유에서 감성으로 가는 심급들을 위해” 아껴두어야 한다. 마이몬을 활용하여 사유와 이념 간의 구별을 보여준다.(321~322)
들뢰즈는 이념과 개념을 구별함으러써 이상성과 사유를 분리하고, 결국 개념을 하나의 응답으로, 다시 말해 감각적 난입, 이념의 변용에 대한 반격으로 제시한다, 이념은 사유의 미분적인 것으로서 감각적 만남을 통해 사유를 산출한다.
정신은 사유를 주재하는 법칙에 예속됨으로써 인간 본성이 된다. 사실 이 정신의 예속화는 정신의 주체-되기에서, 다시 말해 스스로를 주체로 구성하는 사유에서 성립하는 것으로서, 이는 칸트적인 방식으로 초월적 원리들의 영향 아래서가 아니라 정신의 연합법칙들의 영향 아래서 어떤 주체-형식을 띤다.(312)
들뢰즈가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구별이라는 틀 속에서 애매와 무한소를 중요시하는 라이프니츠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 견해를 모티프로 삼아 이념의 애매한 배움과 억견적 앎의 명석한 재인을 인식론적으로 구별하기 위함이다. 아직 개념으로 현실화되지는 않은 이념, 잠재적으로 판명한 이념은 필연적으로 애매하다. 이념은 자신의 현실화에 앞서 의식에 선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으로, 재인이 가져다주는 의심스러운 명석성을 띤 개념은 여전히 혼잡한 것, 이미 공인된 것, 어리석음의 질서에, 이념의 현실화를 통해 창조적으로 산출된 것에 속하지 않는다. 명제들의 질서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것이 바로 교과서적인, 억견적인, 혼잡한, 공통감의 질서에 속하는 앎이다.(22~323) 여기선 명석함과 판명함과 애매함을 가지고 얘기를 나눴다. 명석한 재인하고 판명한 이념하고 애매한 배움. 애매해서 판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바닷가의 파도소리가 명석하지만 그 안에 있는 웅성거리는 소리는 애매하다. 철썩으로 들리지만 다양한 소리들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기호는 이념에서 구조를 이끌어내고 이념은 문제 자신의 객체성 안에 존재하는 문제를 가리킨다. 배운다는 것은 이념의 미분화와 대면한다는 것이고, 안다는 것은 해들의 규칙을 억견적으로 소유하는 데 만족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호는 이념과 더불어 어떤 문제제기적 장을 형성하는 데서 성립하는 어떤 배움의 대상, 즉 이념에 대한 탐구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념을 탐구한다는 것이나 어떤 인식 능력을 초월적 실행의 지점까지 데려간다는 것은 같은 의미가 된다. 배운다는 것, 사유와 이념 사이에서 숭고의 불균형을 경험한다는 것은 곧 극화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수영할 때, 우리 신체의 특이점과 강물의 이념이 가진 특이점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그에 맞춰 사유는 자기 능력의 한계까지 나아가 기호의 비자발적인 난입에 아래서 갑작스레 드러난다.(333)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누가?’. ‘무엇을’, ‘어떤 경우에?’. ‘얼마나?’라는 물음으로 대체함으로써, 들뢰즈는 상이한 두 가지 개념적 재구성을 수행한다. 한편으로, 그는 본질의 우월성을 사례의 유형학으로 대체한다. 다른 한편, ‘무엇인가?’라는 물음, 즉 이념을 본질로 간주하는 플라톤의 규정은 이념의 극화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념의 극화는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는 과제를 떠맡게 되는데, 니체는 그것을 철학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간주했다. (300~301) 이 부분은 많은 샘들이 인용한 문구였다. 물음을 달리하면 보이지 않던 문제가 다시 보인다. 무엇이라는 문제는 플라톤주의의 전복은 칸트였다. 칸트는 본질과 가상을 현상과 현상의 드러남으로 대체한다. 칸트의 가상은 지성적 본질과 그것의 감각적 가상이라는 이원론적 개념쌍 속에서 취해지거나 모델이나 원인으로서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현상 자체가 드러나게 되는 초월론적인 조건들만을 가리킨다. 칸트는 가상과 본질이라는 이접적 개념쌍을 드러남과 드러남의 조건이라는 통접적 개념쌍으로 대체했다. 플라톤이 이념의 시간적 전개에 민감한 모습을 보였지만, 니체는 신체적 힘들의 복합체라는 측면에서 시간적 전개를 표현하면서 사유를 이념의 시공간적 복합체와 경험적으로 대면시킨다.
변용과 자발성의 혼합은 들뢰즈가 관심을 두는 것이며, 이념 아래서 벌어지는 드라마, 현실화되는 이념을 규정해 주는 파토스적 역동성, 즉 이념의 수동적 발생을 포착하겠다는 의도를 내세우면서 들뢰즈가 표현하고 있는 것 또한 이 혼합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사유가 독특한 기호에 의해 자극되는 한에서 스스로의 감성을 예민하게 만들 때뿐이다. 이때 각각의 인식 능력은 자신을 변용시키는 어떤 독특성의 폭력에 의해 초월적(비자발적) 실행으로 고양될 뿐만 아니라, 배운다는 것은 앎과 모름 사이의 ‘살아있는 이행’이 된다. 이 살아있는 이행은 문제제기적인 기호의 역량 아래서 산출되는 새로운 사유를 설명해 준다.(332)
자기 말로 정리한다는 게 쉽지 않은 거 같아요ㅠ 이번 책은 다양한 철학자의 사유가 연결되어 있어서 더 그런 거 같기도 하고요.
그래도 조금씩 해보다 보면 조금씩 나아지겠죠!ㅎㅎ
저는 적어주신 극화에 관한 내용 중에서 '논리상의 것에 불과한 가능한 것을 이념의 잠재적 실재성으로 대체하고, 칸트식으로 역동성을 개념에 외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출현, 사유의 발생을 실재적으로 규정하는 이념에 내적인 것으로 파악한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오네요. 이걸 한마디로 정리한 인상적인 문장도 있었죠. "칸트의 도식론을 받아들여 보완하면서 로고스의 평온한 중립성을 드라마의 파토스적 두께로 대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