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7후기
세계 끝의 버섯을 4주에 걸쳐서 읽었다. 다른 제목은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이다. 버섯과 자본주의가 어떻게 만나게 될까 궁금해진다. 시작부터 <서로 얽히게 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얽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얽힘은 소란스럽고 불편하며 내가 통제할 수 없이 겪어지는 것이지 않을까? 책에선 “이 책은 진보의 이야기 없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삶이 얽혀 있는 방식의 열린 배치를 그려낼 것이다.” 얽힘은 배치나 패치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산책을 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버섯을 발견한다.” (21)저자는 버섯으로 감각이 살아난다고 말한다. 우리도 숲에 가면 나무 근처에 다양한 버섯을 볼 수 있다. 그래도 그냥 지나친다. 그보다 눈에 띄는 꽃이나 동물들에 관심이 간다. 그런데 그녀는 “불확정성의 공포 속에서도 아직 즐거움이 있음을 알게 된다”(22)고 말한다. 버섯을 만나면서 난 식용, 나에게 필요로만 다가오는 버섯을 저자는 즐거움으로 만난다. 기후 위기를 걱정하며 지구 생명체가 직면한 위험을 감지하면서도 말이다. 그녀는 통제 받지 않은 버섯이 삶의 선물이고 길잡이가 되며 근대화와 진보의 발판도 없이 삶에 상상력을 동원해서 도전해보는 일이라고 한다. 송이버섯이 우리를 호기심의 세계로 인도한다면 이 호기심은 불안정한 시대에 협력해서 생존하기 위한 첫 번째 필요 요건이 된다.
“브라운은 번역이라는 실천을 통해 채집인들이 화합하게 만들었다. 번역이라는 실천은 너무 쉬운 해결책으로 안주하는 것을 저지하면서, 차이의 해소 대신에 창조적인 듣기를 장려하며 차이를 용인한다.”(448) 산림청 사람들과 채집인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각각의 언어로 통역한다. 서로 다른 억양으로 순차 통역을 듣는 과정은 경청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일 수 있다. 우리는 모르는 말은 들을 수 없다. 들었더라도 알 수 없어 지나쳐버린다. 통역은 창조적인 듣기를 만든다.
수요일은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집회가 있는 날이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같이 이동할 권리를 확보 받기 위해서 활동하는 단체이다. 오전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한 친구들도 있다. 그들의 얘기에 따르면 활동가들은 새로운 사람의 등장에 기운이 난다고 한다. 장애인 말을 들을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집회에 동참하는 것으로도 경청과 실천이 이루어진다.
해민샘은 석탄화력발전소 이야기와 함께 이야기를 풀어갔다. 지역민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생계와 환경은 어디에 방점을 찍을 수 있을까? 어떻게 차이를 인정하면서 창조적인 듣기로 대안 제도를 찾아갈 것인가? 예은샘은 공유지에 대한 애기로 윤순샘은 공동의 얽힘, 우리 세미나를 패치로. 민호샘은 호기심을 영주샘은 공유와 배움으로~
같이 책을 읽는다는 기쁨을 느낀 책이었다. 재미있고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많아도 A4에 정리하기. 아쉬운 부분을 다른 샘이 적어오거나 풀어주고 이야기 나누는 기쁨이 있다. 공유지에 대한 토론에서는 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요즘 시국과도 연결이 되고. 해민샘과 예은샘은 기후에 관한 토론회에 참석했었다. 어느 활동가에 대한 평가에서 두 샘의 시각이 정반대였다. 그에 얘기를 듣는데 두 샘 얘기를 경청하고 창조적 듣기를 하면서 차이를 용인하는 우리를 본다. 같은 책을 읽고 서로 다른 느낌을 받고 여기에 생각을 더하면서 우리의 공부는 계속될 것이다. 이것이 패치가 아닐까?
샤오메이는 매우 맛이 강한 검은 산딸기를 따먹고 가치없는 아름다운 빨간색 버섯을 주우러 쫓아다닌다. 샤오메이의 열정은 애나칭을 감염시켜 버섯을 좋아게 만들고 2년 뒤에 다시 방문했을 때, 길가의 텃밭과 “진보의 서사가 말하는 ‘텅 빈 공간’”인 공유지로 안내하면서 꽃을 관찰하고 딸기를 따먹고 버섯을 찾아다녔다. 샤오메이는 여전히 삶의 달콤함과 호기심을 잃지 않았다.
다나카 씨는 정년퇴직했다. 천연 제품과 공예품을 전시하는 센터를 세우고 사토야마 풍경을 가꾸면서 방문객들에게 선물을 한다. 마을 아이들을 초대해서 숲에서 노는 방법을 알려주며 숲의 특별한 장소를 발견하길 바란다. 그는 사람들이 자연에 대한 감각이 달라진다면 세상도 살만한 곳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기 위한 프로젝트
소농민의 삶에서 숲은 식량과 땔감, 다양한 형태로 도움을 받는다. 그들이 도시로 가고 난 후의 숲은 다시 버려졌다. 버려진 숲을 회복하는 방법은 전통적인 규모의 교란으로 자신을 배열한다. 크루세이더스의 좌우명은 “‘우리 모두가 스키야키를 먹을 수 있도록 숲을 회생하자.’” 숲을 회생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감각적인 즐거움으로부터 변화를 자극한다. 그들의 생전에 송이버섯이 나타날지도 모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숲을 교란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과 숲을 소규모의 교란으로 소외상태에서 끄집어내기를 희망한다. 이 활동은 균근의 방식인 상리공생의 변형을 모델로 삼는다. 생활방식의 세계를 서로 겹치게 만들어서 구축하려고.
잠복되어 있는 공유지. 선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다. 민호샘의 명륜FC의 성균관대 운동장의 예는 공유지를 쉽게 떠올려준다. 이것이 소외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얽힘의 일시적 순간들일까? 공유지는 잠복되어 있어서 결코 제도화될 수 없고 똑같은 형태로 존재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 공유지는 누구에게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도 아니다. 어떤 생물종은 전멸할 수도 있다.
세미나에 유쾌하고 즐거운 얘기가 많이 나왔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문장으로 쓰기는 어렵지만. 책을 읽으면서 샤오메이가 간 야생의 개간되지 않은 변두리 공간, 다나카씨가 가꾸는 숲이 보고싶어진다. 내가 가는 주말 농장에는 국화를 심고 계시는 어른이 계신다. 이른 봄에 잡초들로 버려진 공간에 국화를 옮겨심으며 가을에 사람들이 꽃을 보고 좋아하는 모습을 즐긴다. 간식을 나눠드려도 받지 않고 인사를 하면 그것으로 만족하신다. 5평의 자기 밭을 가꾸느라 다른 것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꽃을 보며 즐거워진 마음으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게 할 마음을 내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애나 칭은 이 책도 협업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책도 있고 영화도 만들어졌으며 다른 책들도 나오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관심이 이 책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기를~
책의 마지막 부분 “만약 원하는 무언가를 담는 것이 인간의 특징이라면, 그것이 유용해서, 먹을 수 있어서, 또는 아름다워서, 가방에, 또는 바구니에, 또는 나무껍질이나 나뭇잎으로 만든 두루마리 조각에, 당신의 머리카락으로 짠 그물망에, 또는 당신이 가진 어떤 것에든지 담는다면, 그리고 나서 집으로, 또 다른 더 큰 종ㄹㅍ의 주머니나 가방, 사람을 담는 그릇인 집으로 가져간다면, 그리고나서 나중에 그것을 꺼내서 먹거나, 함께 나누거나, 고체 용기에 담아 겨울을 대비해 저장하거나, 약재 꾸러미에 넣어두거나, 사원이나 박물관, 신성한 장소, 성스러운 것이 살고 있는 지역에 놓아두거나, 그리고 나서 다음날 당신은 똑같은 일을 아마도 다시 할 것이고-만약 그것을 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것이 인간이라서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결국 인간이다. 완전하게, 자유롭게, 기쁘게, 태어나서 처음으로.(504~505)”
샘이 이 책을 읽으며 느끼신 기쁨이 그대로 전해지는 후기네요^^ 지난 시간에 나눴던 이야기들도 다시 떠오르고요. 버섯과 함께한 4주간 정말 즐거웠습니다. '열린 배치의 얽힘으로서의 삶'에 관해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었어요. 들뢰즈의 개념과는 어떻게 연결켜볼 수 있을지 궁금해지네요.ㅎㅎ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