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가 너무 늦어버려서 다섯 번째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네요(죄송합니다!). 나들이 세미나 네 번째 시간에는 <세계 끝의 버섯>을 끝까지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난 4주간, 애나 칭이 들려주는 버섯 이야기에 우리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며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가는 시간들이 정말 즐거웠습니다. 많은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는 책이어서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번 주에도 여러 얘기가 오갔습니다. 애나 칭은 ‘경청하는 법’에 관한 이야기로 4부를 시작합니다. 버섯 채집인과 산림청이 만나는, 좀처럼 성사되기 어려운 모임의 회의 광경을 들려주지요. 크메르어, 라오어, 미엔어뿐 아니라 과테말라식 스페인어까지 통역되고 다시 통역되어야 하는, 그래서 단순한 질문이나 규칙 설명조차도 매우(책에 굵은 글씨로 강조되어 있죠ㅎㅎ) 긴 시간이 걸리는, 허둥거림과 소란스러움과 불편함이 공존하는 그 회의에 대해 애나 칭은 말합니다. “나는 우리가 경청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이해한다. 우리가 아직 토론하는 방법을 알지는 못할지라도 말이다.”(448쪽)
이 회의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은 ‘지치지 않는 활동가’인 베벌리 브라운이 남긴 유산 덕분입니다. 그는 자신이 자라면서 인지하게 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무언가 할 것을 다짐했고, 권리를 박탈당한 벌목꾼들과 다른 시골 백인들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덕분에 상업 채집인들에게 소개되고, 그러면서 더 큰 격차를 뛰어넘어 경청하는 야심적인 프로젝트를 계획하게 되었고요. ‘듣기’는 브라운의 정치 활동의 시작점입니다. 우리는 차이를 해소하는 활동을 정치 활동이라고 생각하지만, 브라운의 정치 활동은 “너무 쉬운 해결책으로 안주하는 것을 저지하면서, 차이의 해소 대신에 창조적인 듣기를 장려하며 차이를 용인”(448쪽)합니다. ‘차이를 용인하는 창조적인 듣기’가 무엇일지 잘 그려지지 않지만, 애나 칭이 소개한 채집인과 산림청의 회의가 바로 그런 창조적 듣기, 정치적 듣기를 배우고 있는 장이겠지요.
정치적으로 듣는 행위란 “아직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은 공통의 의제들이 남긴 흔적을 발견하는 것”(450쪽)이라고 애나 칭은 말합니다. 회의가 아닌 일상에서 이를 실행하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거대한 차이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죠.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일은 많은 종류의 ‘각성’을 필요로 합니다. 게다가 그 일에 대한 힌트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고, 약하고, 얼룩져 있고, 불안정합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희미하게 깜박이는 빛 정도를 찾을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토론에서도 나눈 것처럼, 그렇다고 우울해하거나 무력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애나 칭이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듯이, 우리는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인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얽히고, 생겨나고, 해체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애나 칭은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충분히 좋은’ 세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고요. 그리고 덧붙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충분히 좋은’ 것은 항상 불완전하고 수정된다.”(451쪽)
일본 교토에서 숲을 회생키기 위해 ‘풍경을 교란하는 활동’을 하는 ‘마쓰타케 크루세이더스’의 활동과 바람은 또 다른 힌트를 줍니다. “봉사자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자 기다리면서 자신들을 유용할 것 같은 풍경 교란의 일부분이 되게 한다. 그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공유지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들의 활동이 잠복해 있는 공유지, 달리 말하면 공유화된 집회(shared assembly)를 분출하도록 자극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456쪽) 이들은 ‘행하고, 생각하고, 관찰하고, 다시 행하기’의 원칙을 실행합니다.
매번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잔뜩이어서 아쉬운 채로 마무리했지만, 우리에겐 아직 더 이야기 나눌 한 번의 세미나가 남아있지요. 공지해드린 것처럼, 다음 시간에는 <천 개의 고원> 1,2장에 관한 채운샘의 강의가 있고, 그 다음 시간에는 <천 개의 고원>과 함께 <세계 끝의 버섯>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각자 마음에 남은 이야기들을 챙겨보아요!
- 다음 시간에는 <천 개의 고원> 1,2장을 읽고, 질문들을 생각해옵니다.
- 간식은 재겸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내일 저녁에 뵈어요!
'차이를 용인하는 창조적 듣기'...
듣기가 창조적인 사건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듣는 행위와 더불어 우리가 번역하고 번역되는 과정 속에 있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필요한 '많은 종류의 각성', 희미한 빛의 깜빡거림을 쫓을 수 있을 뿐, 계속 수정되는 '충분히 좋은 것'을 향한 노력.
오염, 듣기, 교란 등의 용어로부터 애나 칭은 시종일관 결코 쉽지도 단순하지도 아름답지도 요약될 수도 없는 종류의 변형과 애씀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어려움을 기꺼이 감당하고자 하는가, 동시에 거기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는가...
버섯은 좋다 나쁘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묘하게 뒤섞인 향이 나는 책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