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는 이분법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애나칭의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은 플렌테이션 방식의 자본주의와 구제 축적을 내부화하는 두 가지로 설명하는 듯해 보였습니다. 그 것은 토론 시간에 중심 주제이기도 했던 리좀적인 것과 수목적인 것을 이해하는 방식과도 같았습니다. 들뢰즈 – 가타리는 리좀적인 것을 수목적인 것과 대비하여 설명합니다. 하지만 리좀적인 것 안에 수목적인 것이 있고 수목적인 것 안에 리좀적인 것이 있다고도 설명합니다. 채운 샘은 들뢰즈 – 가타리가 이분법을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언어로 사유합니다. 언어는 분별적이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분별적이지 않은 언어는 하나 마나 한 말입니다. ‘천개의 고원’에서 이분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분별적이지 않은 것을 도출하는 것에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분별적입니다. 하지만 A와 ~ A 인 세계는 논리일 뿐입니다. 자본주의는 전제 군주기계의 어떤 부분으로부터 생성되었습니다. 어떤 사회에서 지금까지 통용되던 가치가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되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를 탈코드화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배치가 바뀌게 되는데 그 것이 사회변동일 것입니다. 자본주의도 그런 식으로 생성되어 온 것입니다. 우리가 언어를 통하여 사유하기 때문에 항상 도식적 사유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봉건제 사회 이후 자본주의가 왔다.’고 말입니다. 마치 한 사회체가 분절적으로 도래하는 듯이 생각하고 있지요. 들뢰즈 – 가타리가 ‘사회’ 나 ‘구조’ 대신에 배치나 기계 혹은 체를 사용하는 이유는 우리 관계가 역동성 – 운동 속에 있음을 표현하기 위함일 겁니다.
모든 사회 시스템은 자유와 억압의 배치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배치에 따라 다르게 발현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자본주의는 고장과 함께 작동하고 있는 지점을 포착했습니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는 탈코드화를 자기 동력으로 합니다. 탈코드화 지점을 공리계로 포섭하며 체계를 유지할 뿐이지요. 자본주의 경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동시에 비자본주의적 지점들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애나칭은 송이 버섯을 통하여 그 지점을 멋지게 고찰해 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폐허에서 균처럼 살아가는 삶을 배움으로써 질문을 바꿉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서 ‘그 폐허에서 삶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로 바뀝니다. 곰팡이가 자본주의를 삭히고 그 것이 문턱을 넘으면 사회도 변화할 것입니다.
강의는 ‘다양체(multiplicity)’의 설명으로 나아갔습니다. 다양체는 ‘1+1=2’인 논리를 비판합니다. 그 논리에는 세상은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전제와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전체, 즉 초월, 중심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은 언제나 주변입니다. 우리는 n-1의 세계만을 살아갑니다. 중심이 없는 세계는 연결 접속하는 세계입니다. 연결 접속은 n+1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연결 접속하면서 전체가 바뀌고 서로의 본성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자본주의 체계의 문제점만을 비판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입니다. 언제나 상호 의존 적으로 자기를 구성하고 있으니까요. 자본주의는 우리의 삶에 기대어 있고 우리의 삶은 자본주의가 터전입니다. 그렇기에 자기의 삶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사유하고 실천해 나가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애나칭은 곰팡이의 세계를 리좀적 방식으로 고찰해 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송이 버섯에 대한 실천적 사유는 리좀의 추상성을 감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다음 주 버섯에서 고찰하고 있는 구체적 현장들과 들- 가의 다양체의 사유를 종합 토론하기로 했습니다. 아직도 희미한 세계를 더듬고 있지만 우리 세계를 다르게 볼 수 있는 자기들의 사유를 기대해 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애써서 분석해서 제시한 전환, '자본주의의 극복'으로부터 '폐허에서 삶의 구성'으로의 질문 변환이 애나 칭에게서 이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애나 칭의 연구와 글쓰기와 사유를 들뢰즈의 '지도 그리기'로 복기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며 비자본주의적 지점들을 알아차리기,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을 구성하기가 무엇인지 애나 칭을 통해 구체적인 모습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들뢰즈의 사유와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연결시켜볼 수 있을지, 다음 시간이 기대되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