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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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적으로 돌아오므로 신뢰할 수 있는 어둠, 곧 밤이 없고 밝음과 어둠의 상호작용이 없다면, 생명은 존재할 수 없음을 늘 되새겨야 한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생물은 가마득한 과거부터 낮과 밤의 끊임없는 교체 속에서 살며 성장해왔다. 인간과 기타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물들은 그 두 조건 모두에 잘 대처하고 적절히 녹아드는 법을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 모두는 새로운 낮을 맞이하기 위하여 항상 다시 밤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낮도 다시 다음 밤으로 이어질 따름이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 <밤을 가로질러>, 해나무, p.9)
불을 통제하고 환경을 불의 빛과 온기로 물들이는 능력은 여러 이유에서 현대인의 등장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 단지 불을 이용해서 어둠을 쫓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뜻만이 아니다. 불은 유용한 온기와 열도 제공했다. 열은 무엇보다도 먼저 식재료를 삶거나 구워서 더 먹기 좋게 만드는 데 쓰였다. 불의 열이 식재료에 들어 있는 박테리아와 기타 병원성 기생충을 죽였고, 불로 익힌 음식은 더 쉽게 소화되었다. 인류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최초의 불을 통제하게 된 사람들은 대단한 도약적 발전을 이뤄냈다. 진화생물학자들은 그 발전을 무엇보다도 뇌의 발달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뇌는 점점 더 확대되었고 이제는 오로지 생존에 집중할 필요가 없게 되면서 새로 얻은 자유를 이용하여 최초의 문화 형태들을 개발할 수 있었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 <밤을 가로질러>, 해나무, p.97)
도덕의 원천은 내가 마주한 개별 인간의 특수성에 대한 감각지각이다. 일반적인 것은 비현실적이며 나의 도덕을 차갑게 만든다. 오로지 이론적 기능에 의지하는 학문은 존재에서 당위로 나아가지 못한다. 반면에 특수한 것을 주목한다면 사정이 달라지며, 더 나아가 내가 특수한 것의 아름다움을 지각하기까지 한다면,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을 가능성이 높다. 감각적으로 지각된 존재는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의 내면에서 당위로 이어진다. 한스 요나스의 말을 빌리면, "바라보면 알게 된다." 예컨대 당신이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으로서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려면, 아이를 바라보면 된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 <밤을 가로질러>, 해나무, p.302)
도덕은 본질적으로 이중 도덕이라는 점을 명심할 때만, 도덕에 희망을 걸어도 좋다. 이처럼 도덕의 분열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심리학자 노르베르트 비쇼프에게서도 발견된다. 비쇼프는 저서 <도덕>에서 도덕에 관한 견해들을 제시하는데, 꼭 이 책이 아니더라도 그는 더 많은 관심과 인정을 받을 자격이 있다. 책의 부제가 호기심을 일으키며 알려주듯이, 비쇼프의 관심사는 "도덕의 본성, 도덕의 역동, 도덕의 그림자"다. 비쇼프는 책의 서두에서 도덕은 "인류의 가장 고귀하고 복된 성취들" 중 하나라고 말한다. 도덕은 "창조 업적의 백미"이다. 그럼에도 도덕은 "가장 위험하고 무자비한 살인 도구"로 전락했다. "참혹한 자연 재해에 목숨을 잃은 사람보다 도덕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더 많다." 어디를 뒤지고 어디를 보든지, 우리는 선과 악을 발견하고 빛과 그림자를 만나고 낮과 밤을 경험한다. 이 쌍들 각각을 이루는 두 짝꿍은 "동일한 것의 두 측면일 뿐"인데도, 즉 매우 고귀하게 여겨지는 도덕의 두 측면일 뿐인데도 서로 맞선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 <밤을 가로질러>, 해나무, p.322)
이번 책도 마음을 끄는 구절로 넘치네요. 선과 악, 동일한 것의 두 측면일 뿐... 도덕이란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시작된다는 구절에는 마음이 또 뜨끔하고요... 도덕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사유로 시작된다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요. 눈팅족이지만 샘들이 올려주시는 글을 기다리며, 조금씩 따라 읽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