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며 이것들을 존중하는 사람으로서는 이런 까닭으로 해서 하나인 것이나 여러 형상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정지 상태인 만물(to pan)을 받아들이지 말아야만 하는 것이,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있는 것(실재)을 모든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전적으로 귀담아듣지 말아야 하는 것이 전적인 필연입니다. 아이들의 소원처럼, 하고많은 변화하지 않는 것들과 변화하는 것들, 양쪽 다가 ‘있는 것(to on)’이며 만물이라고 말해야만 하는 것이라고.”(플라톤, 《소피스테스/정치가》, 서광사, 145~146쪽)
지난 시간에는 《소피스테스/정치가》를 끝까지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저는 이번에 읽은 내용을 통틀어서 《소피스테스》 후반부의 형이상학적인 논의가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소피스테스》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엘레아학파 출신의 ‘손님’은 ‘변화냐 형상이냐’라는 지겨운 논쟁을 넘어가고자 합니다.
한 쪽의 사람들은 물질만이 전부라고 말합니다. ‘물질’의 특징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경험적인 차원에서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변화입니다. 모든 것은 생성되어 끊임없는 변화를 겪다가 결국 소멸합니다. 여기에 착안하여 물질론자들은 변화만이 실재한다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즉 변화만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이들보다 조금 더 세련된 취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반대쪽 편에 있습니다. 이들은 지성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들 그리고 물질적이지 않은 형상들을 참된 존재라고 강렬하게 주장합니다. 이들은 생성과 존재를 구분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실재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니체가 떠올랐습니다. 니체는 ‘진리에의 의지’에 괄호를 치고,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합니다. 그러니까 인식은 ‘진리’라는 어떤 외적 실체를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양한 충동들에 복종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진리에의 의지가 얼마나 상이하고 대립적인 욕구와 존재방식에 의해 작동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근대 과학은 감각할 수 있는 것만이 진리의 조건을 충족한다고 믿고 ‘물질’을 탐구해갑니다. 이와 반대로 플라톤을 위시한 형상론자들은 감각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리의 구성요건에 부합한다고 믿고 감각불가능한 대상들, 지성에 의해서라야만 알려지는 것들에 천착합니다.
‘진리의 역사’를 쓰는 사람이 있다면 여기서 곤란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니체적 관점에서 보자면 실체로서의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진리에의 의지’들만이 역사적 조건 속에서 작용하고 있을 뿐이므로 상이한 진리 의지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충동과 힘의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니체의 독창적인 해석에 따르면 근대적 물리학은 천민의 취향에 기초해 있습니다. 이는 대중적인 감각주의의 진리 규준에 따르는데, 그러한 규준에 따르면 “비로소 볼 수 있고 더듬어볼 수 있는 것”만이 설명 가능하고 명료합니다. 반면 플라톤주의는 보다 품위 있는 취향에 호소합니다. “플라톤적인 사유방식의 매력은 바로 감각 충족에 대한 반항”(니체, 《선악의 저편》, 32쪽)에 있었다는 것이죠. 감각을 단순히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 감각을 지배하는 것에서 더 높은 승리를 찾고자 하는 의지. 이것이 플라톤적인 관념론에서 우리가 추론해낼 수 있는 충동이라는 것입니다. 물질이냐 형상이냐, 니체는 이 사이에 사변적인 논쟁이 아니라 감각에 대한 상이한 입장, 존재방식과 삶의 윤리에 있어서의 대립이 놓여 있었음을 포착해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소피스테스》를 보면 어떨까요? 여기서 플라톤은 이원론적인 존재론을 수립합니다. 그는 이전의 철학자들이 ‘물질 대 형상’이라고 말하던 것을 ‘운동과 정지’라는 용어로 대체합니다. 그리고 ‘실재’는 물질이나 형상, 다시 말해 운동이나 정지 어느 한 쪽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둘 모두와 관계하는 제 3의 항이라고 말하죠. 운동과 정지는 서로가 서로를 지양하는 관계이므로 상호작용을 하지 않지만, 실재는 운동과 정지라는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될 수 있고, 그러한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 이에 따라 세계는 둘로 쪼개집니다. 운동하는 세계와 정지해 있는 세계, 변화하는 실재와 고정불변하는 실재. 즉 생성소멸하는 모상의 세계와 그 어떤 것도 겪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 이 둘은 직접 관계를 맺지 않으나 존재론적인 위계를 형성합니다. 감각에 의해 경험되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따라서 모순과 대립과 오류로 가득한 ‘이 세계’는 진리 그 자체로 존재하는 ‘저 세계’를 닮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서만 존재의 정당성을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이원론. 저는 여기에 세계를 하나의 내재적인 전체로서 이해하려는 의지의 적극적인 단념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령 생성과 변화를 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단 하나의 원리로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조차 그의 관점에서는 근원적인 원리로서의 변화와 생성이 표현되는 하나의 방식일 따름이었죠. 그러나 플라톤은 세계를 둘로, 이 세계와 저 세계로 나누어버립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언가를 손쉽게 포기해버릴 수 있습니다. 즉 감각되는 이 세계, 변화하고 덧없는 이 세계로부터 의미를, 윤리를 구해내려는 노력을 포기해버릴 수 있습니다. 어차피 '이 세계'에 의미를 내려주는 것은 '저 세계'니까요. 사람들이 저마다의 견해에 갇혀서 지리멸렬한 다툼을 되풀이하는, 깔끔한 해답이 도출될 수 없는 현실, 그러한 삶을 끌어안을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죠. 나와 이 유일무이한 순간을 함께하고 있는 것들이 아니라 저 너머의 완전한 것들에 시선을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일방적인 해석일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플라톤의 이원론에서 이러한 단념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 충동이 후에 이 세계와 저 세계, 죄 있는 현세와 완전한 내세, 유한한 인간과 초월적인 절대자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대립을 수립하는 기독교 신학과 접속을 이루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아무튼, 다음 시간에는 《티마이오스》를 읽고 만납니다. 책은 서광사 기준 149쪽(53C)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