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티마이오스》를 중간까지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이 대화편의 도입부에서는 ‘아틀란티스 신화’가 등장합니다. 크리티아스의 선조가 솔론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인데요. 솔론이 이집트에 갔을 때 한 현자가 바다에 가라앉은 섬 아틀란티스에 살던 아테네인들의 선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게 《국가》 편에서 소크라테스가 묘사한 최선의 정체와 몹시 닮아 있더라는 것이죠. 저는 이 대목에서 이집트인 현자가 솔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에 따르면 역사상 홍수나 대화재 같은 대규모의 천재지변이 아주 긴 주기에 한 번씩 일어나서 사람들이 몰살당하는 일이 일어나곤 했는데, 나일강에 의해 화재를 피하고 산악지대 덕분에 홍수를 피할 수 있었던 이집트인들과 달리 아테네인들은 그때마다 몰살을 피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그 이전에 살던 사람들의 행적에 관한 기억들이 전승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아테네인들은 ‘마음이 어리다’는 것이 이집트 현자의 주장입니다. 구전을 통하여 훨씬 더 긴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이집트인들에 비해, 그리스 문화는 비교적 최근의 전통과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걸 가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태미샘은 실제로 그리스인들이 전통이 없는 민족이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솔직히 잘은 모르지만 탁월하고 고귀한 삶, 최선의 정체에 대해 고민했던 그리스인들이 청년의 이미지를 보여 주는 반면 현세보다도 내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집트인들에게서는 노년의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태미샘께서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이 계속 범람하는 탓에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일찍부터 기록을 남겼어야 했다는 깨알 정보도 주셨고요.
저는 구술문화에서 사람들이 훨씬 더 긴 시간 속에서 살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주로 글로 남겨진 것들이나 유적들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하지만, 구술문화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또 그 문화의 고유한 삶의 방식으로 전해져오는 역사가 훨씬 깊고도 입체적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플라톤이 뻥을 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티마이오스》에 나온 이집트인 현자는 9,000년 전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방식까지도 알고 있다고 주장하니까요. 시간의 단위가 점점 더 짧아지는 것 같네요. 특히나 지금 우리는 ‘새로운 것’이 곧 ‘좋은 것’인 시대에 살고 있으니, 몇 달만 지나도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리고 20년 전의 문화에 향수를 느끼는 몹시 기이한 현상도 나타나는 것 같고요. 아테네인들의 마음이 어리다면, 우리의 마음은 아메바인 걸까요?
티마이오스의 우주발생론도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들은 필연적으로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렇습니다. 《테아이테토스》와 《소피스테스》를 거치면서 이제 우리가 달달 외울 수 있게 된 생성VS존재의 이분법이 또 등장합니다.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되 생성을 갖지 않는 것과 언제나 생성되는 것이되 결코 존재(실재)하지는 않는 것. 전자는 이데아이고 형상이고 지성에 의해서만 인식 가능한 것입니다. 후자는 변화이고 운동이며 물질이고 감각에 의해서 경험되는 것이죠. 티마이오스에 따르면 이 우주는 역시나 후자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가 감각 가능한 대상이라며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우주는 아무렇게나 운동하고 무작위적으로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아름다운 질서와 조화가 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티마이오스의 생각입니다. 우주는 분명 생성중이며 따라서 어느 시점에 어떠한 원인에 의해서 생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질서가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은, 최초에 우주를 탄생시킨 원인이 지성을 동원하여 우주를 제작한 이성적 존재라는 것과 그가 어떤 변치 않는 형상을 본따 우주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하여 티마이오스는 추측합니다. 우주는 데미우르고스라는 신이 영원하고도 완전한 형상을 모방하여 만든 작품이라고요.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의 입을 빌려 너무나 아름답고 세련된 우주발생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몹시 훌륭하고 다양한 영감을 제공하는 것임은 사실이지만, 어쩌면 여전히 조금은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편견 속에서 우주를 바라본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자연과 우주, 그리고 인간의 문명을 보고는 쉽게 경탄에 빠지게 됩니다. 밤과 낮이 있어서 우리가 활동하고 또 휴식하도록 해주고, 계절의 순환이 있어서 그에 따라 농사를 짓고 또 때에 맞게 삶을 꾸려갈 수 있고, 별들의 운행은 규칙성을 띠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가 직접 마련하지 않은 온갖 도구들과 자연의 이치에 대한 통찰이 집약되어 있는 관습 및 전통에 의존하여 살아갑니다. 이때 인간은 아주아주 자연스럽게 이 세계를 창조한 어떤 이성적 존재에 대한 관념을 상상해내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자연과 우주는 질서와 조화로 가득한 것일까? 자연에는 섭리 같은 것이 존재하는 걸까? 이런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분명 이 우주 안에서 갑자기, 무작위적으로, 우연하게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원인 없이 일어나는 사건은 없고, 따라서 모든 생성은 특정한 규칙성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규칙이란 것은 언제나 예외를 수반하고 예측불가능한 변형 속에서 변주됩니다. 계절은 반복되지만 한 번도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는 적은 없죠. 인간이 섭리를 발견하는 곳에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부단한 변이와 진화와 실험 같은 것들이 아닐까요? 아무튼 《티마이오스》가 우주와 인간에 대해 다양한 영감을 제공하는 텍스트인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합니다. 수학 얘기가 많이 나와서... 언젠가는 수학을 공부해야겠다는 부질없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고요.
다음 시간에는 《티마이오스》를 끝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제가 준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