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은주쌤께서 몸이 아프셔서 현주쌤, 저, 영님쌤 셋이서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봄을 만끽하면서 산책도 하고, 규문각 암송 이벤트로 커피도 마시면서 알차게 보냈습니다. 너무나도 평온한 하루였고, 그래서 그날 풍경이 왠지 더 마음에 남네요. 다음에는 은주쌤도 꼭 함께했으면 합니다~~
다음 시간과 다다음 시간이면 마무리네요. 당초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세미나도 진행되고 있어서, 이번 시즌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고민 중입니다. ^^ 뭐, 이렇게 공부하는 거 아니겠어요? ㅋㅋ 세계 지도 그리기를 목표로 달려보죠! 벌써? 아직 절반 남았어요. ㅋ
다음 시간에는 《역사학의 거장들》에서 마르크 블로크와 에른스트 칸트로비츠, 《세계의 역사1》을 끝까지 읽어 오시면 됩니다. 입 발제는 현주쌤께 부탁드리고, 간식은 제가 맡을게요.
요한 하위징아, 역사서술의 한계를 넘어선 문화사가(1872~1945)
아마 어디선가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란 말을 들어보신 적 있지 않나요? 이 말을 처음 만든 게 요한 하위징아입니다. 그는 《호모 루덴스》라는 책에서 ‘놀이’라는 활동에 주목해서 각 국의 언어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용되는지를 분석합니다. 이때 ‘놀이’란 문화를 만들고 결정하는 인간 특유의 정신 활동입니다. 하위징아는 이러한 정신 활동이 인간의 본질이며 역사를 추동한다고 봤죠. 그의 말을 인용하면 “역사는 문화가 자신의 과거를 해명하는 정신적 형태”입니다. 이런 식의 역사 서술을 ‘문화사’라고 합니다.
저희에게 익숙한 역사는 주로 일련의 사건들의 연속(사건사)이나 특정 민족을 중심으로 점점 더 나은 삶을 획득하게 된 경위(민족사)를 밝히는 식으로 서술되죠. 정치사나 사회사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문화사는 역사를 사건 혹은 민족 중심으로 서술하지 않고, 특정한 형태나 형식의 문화를 중심으로 여러 시대를 서술하는 역사를 말합니다. 하위징아와 부르크하르트가 여기에 해당되죠. 특히 하위징아는 역사를 어떤 정신의 활동, 그러니까 문화로 포착하느냐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그려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만드는 문화의 역사를 추적할 수 있고, 인류의 허영의 분석하는 역사를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사는 당대의 “역사적 실제의 다양성을 올바르게 평가하지 않는 람프레히트의 역사 개념에 대항”한 결과이기도 합니다.(206) 여기서 람프레히트는 역사를 온전히 사회적 차원에서 서술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랑케의 정치사를 비판하고, 문화생활을 위주로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고 주장한 문화사가이지만,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것들만으로 일반 법칙으로서의 역사를 서술해야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똑같이 문화사를 서술하더라도 람프레히트에게는 ‘다양성’이 허락되지 않는 반면, 하위징아에게는 적극적으로 권장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하위징아는 역사가의 책무가 다양한 형태의 정신을 밝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자기 마음대로 역사를 써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문화 분석을 통해 한 시대의 표상세계를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죠.
모든 역사서술이 금방 새로운 역사서술에 의해 반박되듯이, 하위징아의 작업들도 역사학계에서는 낡은 것이 됐습니다. 게다가 이렇다 할 학파나 후계자도 없었기 때문에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토론 중에는 하위징아의 역사서술 혹은 ‘문화사’를 지금 시대에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하위징아의 역사 서술의 뛰어난 점은 ‘정신’에 초역사적 위치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령,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 우리의 정신이 작동하는 방식은 매우 달라졌죠. 조너선 크레리가 쓴 《24/7 잠의 종말》을 보면 스마트폰과 동기화된 신체 리듬이 어떤지 매우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번 우크라이나-러시아의 전쟁을 ‘틱톡 워(TikTok War)’라고 얘기하기도 하고요.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 우리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공부하면 할수록 ‘역사학’이라는 분과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매우 활발하게 다양한 담론들로 갱신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사건사, 민족사, 정치사, 정치경제사, 사회사… 그런데 한편으로는 역사에 대한 이런 관심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하위징아의 생애에서 추리해보면,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해 불가능한 사건들을 계속 마주쳤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나중에 왜 사람은, 그리고 저는 역사를 공부하는지 나름대로 정리하고 싶은 욕구가 점점 강렬해집니다...!
찰스 비어드(1874~1948)‧제임스 로빈슨(1863~1936), 대중에게 다가간 진보사학파 역사가들
처음으로 등장한 미국인 역사학의 거장입니다! 국가가 형성되고, 두 개의 세계대전을 겪었던 이전의 거장들에 비하면, 이들의 삶은 다소 평온해 보입니다. 물론 이들도 나름대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실존을 고민했던 유럽의 지식인들에 비하면 뭐랄까... 살짝 심심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유럽계 지식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역사를 사유하더라고요.
이들은 역사란 무엇이어야 한다고 정의내리는 것보다 학생들 스스로 역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체계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로빈슨의 필생의 작업은 우선 학교와 대학교육의 개혁에 집중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었고, 또한 그것이 역사학 발전에서 그가 기여한 바이기도 했다. 19세기 말에 많은 대학원 학과에서 여전히 관례적이었던, 학생들에게 사실과 정보를 외우게 하고 복습하면서 질문하는 강의 절차를 그는 거부했다. 그의 목표는 학생들에게 역사와 지금까지의 역사서술을 독자적이고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에 있었다. 역사수업은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독자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224)
실제로 비어드와 로빈슨은 학생들이 1차 사료를 독해하고 자신만의 견해를 가질 수 있도록 새롭게 교과서를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이 매우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학생을 포함한 일반인도 접근할 수 있도록 사료집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죠. 어떻게 보면 역사학계에서 최초로 출현한 대중지성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ㅋ 스스로 판단할 줄 아는 인식능력을 대중적 차원에서 시도했으니까요. 실제로 이들은 역사학을 통해 사물이 발생하고 이러한 방식으로 발전된 연유를 기존의 견해와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사고하기를 중요시했죠.
이것은 하위징아의 문화사와 다른 방식으로 기존의 역사학을 무너뜨리는 시도였고, 유럽사를 넘어서려는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전통적 역사학은 유럽에서 발생한 것들이 대부분이고, 그것들은 대체로 왕조사, 군사사, 제도사로 요약됩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것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실 미국에서는 그런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죠. 대신에 이들은 ‘산업혁명, 상업, 식민지, 유럽 국가들의 내부 개혁, 과학의 일반적 진보’ 같이 경제적 사안들이나 정치적 사안에 주목해서 역사를 서술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들 덕분에 많은 점에서 유럽사적 해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의 관점에서 봤을 때 ‘대중성’을 제외하면 이 둘의 작업은 가장 평범해 보였습니다. 유럽사적 해석을 걷어낸다고 해도 역사적으로 넓은 시간 속에서 다뤄지는 진보와 발전이란 테마가 핵심이더라고요. 그가 “역사학은 사회가 과거에서 해방되는 것을 돕는 진보적” 활동이라고 정의했을 때, “좀더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향해 움직이는 미래”라는 오래된 관념이 어쨌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책에서는 이들의 비판적 태도를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에는 ‘실제로’ 그러했을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관점으로부터 과거를 분석하는 구성적 역사가로서의 소명이 전제돼 있다고도 말하죠. 하지만 이런 부분들을 읽으면서 “오류가 있을 수 있고” 파편적이며, 선입견에 사로잡혀 불완전할 수 있는 역사 서술을 그럼에도 한다는 것은 무엇일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상대주의를 강화하는 경향을 나타냈다고 정리됐는데, 이건 비어드와 로빈슨의 서술에만 국한되는 질문은 아닌 듯합니다. 사실 역사를 쓴다고 해도 역사가는 자신이 놓인 자리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죠. 첫 번째 인트로 강의에서 채운쌤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선도 없고 나와 무관한 사건을 인식할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경험하고 우리 자신을 관통한 것들에 대해 쓸 수밖에 없는데, 이때 역사란 과연 어떤 것일 수 있을까요? 으음~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두 거장들을 통해 역사란 단순히 '역사학'이란 분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하위징아는 '문화사'를 통해 기존의 역사서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고, 비어드와 로빈슨은 미국이란 시공에서 출발함으로써 유럽사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죠. 어떻게 보면, 학문적 분과로 환원되지 않으려는 노력 자체가 역사에 내재된 자생적 힘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잘 모르지만 한 번 던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