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에서 보기 드문 ‘글쓰기가 중심이 아닌 세미나’ 마이너 세계사가 시작됐습니다~ 저희의 목표는 ‘연표 외우기’와 ‘지도 그리기’입니다. 사유를 점검하고 촉진하는 데 있어서 글쓰기도 훌륭한 수단이지만, 암기 역시 공부하는 데 있어서 훌륭한 수단이죠. 게다가 어설프게 자기 문제를 넘어가려고 치장할 바에야 차라리 ‘외우기’가 훨씬 낫죠. 이 말에 격렬하게 환호하셨던 선생님들의 반응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ㅋㅋ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신청하신 분부터 어쩌다 시작하신 분, 글쓰기를 피해 오신 분까지 다양하게 계셨는데요. 어쨌든 저희는 이제 한 배를 탔씁니다. 신청은 맘대로 할 수 있지만, 그만두는 건 맘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올해 저랑 같이 끝까지 달리시는 거예요.^^
다시 저희 세미나 진행에 대해 간단하게 브리핑할게요. 이제부터 저희는 오전에 《역사학의 거장들》을 읽으며 ‘역사’를 질문하고, 오후에 《세계의 역사》를 읽으면서 연표를 정리하고 진도에 맞게 지도를 볼 겁니다. 오전과 오후 둘 다 기본적으로 입발제를 하면서 같이 중요한 부분들을 짚어가면서 내용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역사학의 거장들》은 ‘역사’에 대한 질문을 심화시키는 방식으로 읽고, 《세계의 역사》는 지리적 특성과 더불어 역사를 공부할 겁니다. 포인트가 조금씩 다르니까 염두에 두고 읽어주세요~
토론 도중 ‘역사의 시작’에 대한 얘기가 있었죠. 맥닐은 호모 사피엔스의 유형성숙(幼形成熟)을 얘기하면서 문화적 진화의 속도가 생물학적 진화의 속도를 압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역사가 시작됐다고 말하긴 했습니다만, 사실 문화적 측면과 생물학적 측면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게 쉽지 않죠. 문화적으로 생활 양식이 바뀌면 그와 동시에 몸을 쓰는 방식도 바뀌니까요. 유목 생활을 했던 사람이 정주 생활을 시작하는 순간 요구되는 태도, 추구해야 하는 가치, 생활 리듬 등이 전면적으로 바뀌죠. 당장 지하철과 스마트폰 같은 문물이 발명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공간과 나아가 세계와 맺는 관계가 전면적으로 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무엇을 역사로 볼 것인가에 대한 어렴풋한 기준을 세운 건 아닌데요. ^^;; 그래도 16주 동안 가져갈 질문 하나 정도는 건진 것 같습니다.
또 인상적이었던 건 ‘관개시설’이 문명의 주요한 특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교과서에서 웬만한 국가를 얘기할 때 항상 ‘관개시설’이 나왔지만, 개인적으로 왜 자꾸 관개를 얘기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관개시설은 ‘가족 공동체’ 이상의 집단이기 때문에 요구되고 관리될 수 있습니다. 관개시설이 요구되는 것은 하나의 강을 두고 여러 집단이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정착민들 같은 경우에는 강 근처에 살아야 농사도 짓고 식수도 구하고 가축도 기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강을 관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이때 단순히 기술만이 아니라 누가 얼만큼을 쓸지를 합의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왕정(혹은 지배계층)은 이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확인할 수 있었죠. 그리고 관개시설을 짓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려면 대규모 인원들이 동원돼야 하는데, 인원들을 감리하고 감독할 수 있는 지배계층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구성원들이 있음을 반증합니다. 왜 역사책에서 자꾸 관개시설이 언급됐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오후에는 채운쌤의 ‘역사를 왜 공부해야 하는가?’ 인트로 강의가 있었습니다. 역사를 공부한다고 할 때 유념해야 할 질문들을 던져주셨죠. 역사를 풀어보면, ‘지나온 것에 대한 기록’인데요. 이때 어떤 지난 기록들을 ‘역사’로 간주할 것이고, 그때 ‘역사’로 간주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누구나 중요하다고 생각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 있다고 할 때, 그때 역사적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 있을까요? 오인되지 않은 기록(혹은 기억)이 있을까요? 이 질문들은 《역사학의 거장들》을 읽으면서 풀어가보죠.
일상적 취미부터 구체적 공간까지 점점 삶의 양식이 전세계적으로 균질해지면서 어떻게 보면 저희는 이제 세계의 모든 사람과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하게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르게 보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세상에 무관심해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채운쌤은 그것을 어떤 뉴스든 구체적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신체로 설명해주셨죠. 실제로 제주도 예맨 난민을 떠올려보면,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가 아니라 그냥 난민이 여기에 와서 싫다고만 반응했죠. 그들이 그 공간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지구적 위기 같은 것을 생각하기보다 그저 ‘난민 싫어!’라고만 반응한 거죠. 이런 식의 반응은 실제로 난민이 어떻다가 아니라 우리가 현재 우리 자신과 그리고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한국에서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끊이지 않고, 러시아에서는 푸틴의 종신집권이 거의 확실하고, 미국에서는 트럼프의 인기가 도무지 식지를 않습니다. 얼핏 달라보이지만, 이 셋은 국민들로 하여금 '내가 사는 나라는 강하다'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이 셋에 대한 인기는 국민들이 스스로를 '강한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현재 우리 자신을 기억하는 방식이 실제로 대통령을 뽑는 것부터 난민 같은 이방인들에 대한 태도와 연관이 되는 것이죠. 역사 공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실존과 직결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희 세미나의 지도 그리기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구체적 현장을 포착할 수 있는 지각력(?)을 기르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저희가 불러왔던 '세계사'는 그 정체를 파헤쳐 보면, 사실 유럽 혹은 미국 중심의 제국사죠. 그러한 서술 방식에서는 '난민' 같은 문제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도 그리기는 막연하게 ‘세계’ 혹은 ‘역사’라 퉁쳐왔던 것들이 어떤 구체적 공간 위에서 벌어졌던 것인지 다시 짚어보는 거죠. 채운쌤도 말씀하셨지만, 그리하여 저희의 상식적 기억(편견)을 교란시키고, 그 다음에 저희의 관점에서 저희의 이야기를 쓸 수 있습니다. 당초에 공언한 것과 달리 스케일이 약간 커진 것 같지만, 여전히 저희의 목표는 연표 외우기와 지도 그리기입니다! 다만 이런 문제의식으로부터 세미나가 출발했다는 정도만 공유하는 거죠. ㅋ
다음 시간 공지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오전에 《역사학의 거장들》 에드워드 기번과 레오폴트 랑케를 읽고 오후에 《세계의 역사1》 3~4장을 가지고 지도를 그립니다. 간식과 《세계의 역사》 3~4장 입발제는 현주쌤께 부탁드릴게요.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