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습니다~ 《역사학의 거장들》에서 거장들의 문제의식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고, 《세계의 역사》를 참고하며 지도를 그리는 것도 쉽지 않아요.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기본적인 척도조차 맞지 않습니다.ㅋㅋ;; 사진만 놓고 보면 자기만의 지도를 그려보자는 원대한 포부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16주 뒤에 한 번 봅시다. 분명 당당히 ‘이게 우리 지도다!’라고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적절히 일정을 짜 놓을게요!
다음 시간 공지입니다~ 오전 《역사학의 거장들》은 쥘 미슐레와 테오도르 몸젠을 읽어 오시면 됩니다. 오후 《세계의 역사》는 5~7장을 읽어 오시면 되고, 입발제와 간식·후기는 영님쌤께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이번 주에는 최소한 아프리카 대륙을 그릴 줄 아셔야 됩니다. 세세하게 국가들과 지형을 그릴 필요는 없지만, 《세계의 역사》를 읽으면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흔적들을 기입해주세요. 가령, 저는 이집트 문명이 탄생한 ‘나일강’과 이집트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수메르 상인들의 움직임 같은 것을 그리려고 합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그릴 때는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의 움직임을 그리려 하고요. 주목하는 포인트는 각자 다르겠지만, 모두 역사가 가미된 지도를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하죠! 그리고 저희의 머리를 아프게 했던 두 명의 거장 ‘에드워드 기번’과 ‘레오폴트 랑케’를 정리하는 걸로 공지를 마무리할게요.
근대적 역사서술의 개척자, 에드워드 기번(1737~1794)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라는 방대한 텍스트를 저술한 거장입니다. 사실 《로마제국 쇠망사》뿐만 아니라 기번이란 사람 자체를 이번에 처음 들었어요...! 하지만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당대부터 지금까지도 손꼽히는 ‘로마제국사’, ‘명문장’이라고 합니다. E.M. 포스터, 조지 고든 바이런, 데이비드 흄, 버지니아 울프, 자와할랄 네루 등 어디선가 이름이라도 들어봤을 사람들이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 푹 빠졌다고 하네요. 안타깝게도 저희 중 누구도 들춰본 적조차 없기 때문에 그 명성을 실감할 수는 없었지만요.
소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이, 그는 ‘근대적 역사서술’을 최초로 시도한 역사가입니다. 여기서 ‘근대적 역사서술’이란 역사를 서술할 때 신학적 관점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관점을 채택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아직 기번에게는 랑케와 같은 역사 사료에 대한 엄밀한 기준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어떻게 1,300년 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원인과 망하게 된 과정을 사회·구조적으로 분석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읽은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존속할 수 있었던 원인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마가 몰락하게 된 요인으로서 기독교를 가져와서 몽테스키외의 분석(로마제국의 몰락은 “너무 거대함으로써 야기된 자명하고 불가피한 결과”과 무엇이 다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어쨌든 읽은 부분에 한해서 내용을 정리해 본다면, 기번은 ‘교희와 사제의 특권’에 의해 로마제국이 멸망했다고 분석합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그러한 분석이 타당한가 아닌가를 떠나서 기독교의 등장을 세속사의 일환으로 다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기독교 공동체의 조직력과 흡수력이 그토록 뛰어날 수 있었는지를 당시 로마제국의 시대적 배경과 더불어 분석하죠. 로마제국의 역사도 무지하고, 기독교의 역사도 무지한지라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읽었는데요.^^;;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기번의 작업이 어떤 점에서 역사에 한 획을 그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19세기 ‘학문화된 (독일) 역사’에 집착하는 것을 극복하는 역사서술의 역사에 관심이 증대하면서 기번의 중요역할도 더욱 강하게 강조되어 왔다. 이것은 모미글리아노가 힘주어 설명한 바와 같이 기번이 과거를 학문적으로 다루는 데서 이전에 분리되었던 모형을 성공적으로 종합시켰다는 것에 근거한다. 하나의 서술적 역사저술에서 골동품 수집으로서의 학식과 철학적 고찰이 지양되었고, 동시에 세속사와 교회사의 분리가 극복되었다.”(48~49)
물론 여기서도 ‘학문화된 역사’, “이전에 분리되었던 모형을 성공적으로 종합시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게 너무 많네요! 그러나 당대 유럽의 분위기,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등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상대방과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색을 가지려고 한 학문적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기번의 작업은 랑케를 필두로 하는 ‘독일의 역사학’에서 벗어나는 데 있어서 기념비적이라고 하는 것 같고요. 나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역사가에도, 그의 저작에 대해서도 무지하기 때문에 책을 따라가면서 ‘어떤 점에서 그가 역사학의 거장인지를 정리하자’는 게 저희의 목표입니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기번이 그은 하나의 획은 ‘교회의 출현과 확장을 사회·구조적으로 다루고 분석한 서술방식’입니다.
근대 역사학의 창시자, 레오폴트 랑케(1795~1886)
그 다음은 랑케입니다. 사실 ‘역사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랑케인데요. ‘실증주의 역사관’, ‘역사학의 아버지’ 같은 이름으로 어디선가 이름은 들어봤던 것 같아요. 그런 랑케가 《역사학의 거장들》에서 두 번째 포지션을 차지하게 될지는 몰랐네요. 이해를 잘 못해서 그렇지 기번의 업적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거겠죠?
그런데 기번까지만 해도 역사와 신화, 민담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역사를 썼다고 하지만, 어떤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주요한 사료로 삼는 것도 서슴지 않았죠. 그런 점에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가 아름다운 문체를 훈련할 수 있는 문학 작품으로 읽을 수는 있어도, 로마제국의 역사를 공부하기에 적합한 역사서로 읽을 수 없다는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랑케는 엄격한 기준 속에서 사료들을 점검했고, 객관적으로 ‘본래 어떠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역사를 쓰고자 했습니다. ‘나’를 지우고 최대한 사건으로부터 분리되어 역사를 서술하는 것. 여기까지가 어디선가 주워들은 랑케의 실증사관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랑케에 대한 부분을 읽어보니, 제대로 오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랑케가 보여주려고 했던 ‘본래 그러함’이란 ‘비당파성’과 연관됩니다. 그에 따르면, 역사는 객관적 진실, 사건 그 자체를 서술해야 하고, 이때 견지돼야 하는 태도가 ‘비당파성’입니다. 그런데 ‘비당파성’은 랑케 이전에 기번이 중요시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랑케의 ‘비당파성’과 기번의 ‘비당파성’은 다릅니다. 기번에게 ‘비당파성’이 신학적 뉘앙스를 걷어내는 것이라면, 랑케에게는 “각각의 역사적 현상을 넘어서 역사 자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이미 결정된 규범적인 또는 인과적인 법칙”을 포착하는 것입니다.(64~65) 이때 “이미 역사적 현상을 넘어서 역사 자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이미 결정된 규범적인 또는 인과적인 법칙”이 가리키는 것은 신입니다. 랑케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서술했을 때, 현실에 신이 어떻게 개입했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랑케가 아무리 ‘국가’를 하나의 개체로 간주한 최초의 역사가라 하더라도, 이때 국가는 신의 입김으로 성립된 진보의 산물이자 현존하는 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랑케는 로마, 독일, 프로이센, 프랑스, 영국의 역사를 기술함으로써 ‘유럽 국가체제의 역사’에 주목했는데요. 시대적으로 ‘유럽’이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지만, 강대국만이 역사 서술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과격한 것 같은데, ‘현재 잘살고 있는 나라와 민족’만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도 본 것 같습니다. 발전사관이 랑케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군요.
그럼에도 랑케가 사료를 분석하는 태도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후대에도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사료를 분석하는 것은 르네상승 이후로 있어왔지만, 랑케처럼 ‘남아 있는 것’을 중심으로 과거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방식은 없었습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랑케가 있었던 당시만 하더라도 별다른 증거 없이 구전된 이야기 혹은 전통적으로 서술된 기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료로 인정받았습니다. 랑케는 그가 아무리 저명한 역사가라 하더라도 검증되지 않은 것이라면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죠. 실제로 랑케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근대사는 더 이상 이전의 저술가가 만들어 계속 물려준 전통에 따라 쓰이지 않고, 문헌보관소에서 발견되는 지난 세기들의 직접적인 기념물로써 기술된다.”(69)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요약하자면, 랑케가 역사학의 거장인 이유는 ‘사료를 분석하는 필요성을 제기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가가 ‘사료 분석’에서부터 역사를 쓴다는 점에서, 모든 역사가는 이미 그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있는 그대로의 역사’란 개별적 사건 배후에 있는 신의 뜻입니다. 개인의 주관적 견해, 인종적·정치적·종교적·세계관적 주장을 모두 배제했을 때 가장 분명하게 신이 이 세계를 어떤 의도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역사 스스로 말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죠.
세미나 후에도 잘 정리가 되지 않아서 시간이 걸려버렸네요. 앞으로도 난항이 예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