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한 주가 지났는데 저희의 지도 수준이 확 올랐어요. 지난주만 해도 아프리카-아라비아 반도-이란이 매우 개성 넘치게 이어졌는데 말이죠. ㅋㅋㅋ 이제는 어느 정도 비율이 맞게 그려지는 것 같아요. 아직 외워서 그리는 수준도 아니고 여전히 그리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그래도 모여서 같이 그리다 보면 금방 숙달되겠죠?^^ 나중에 어떤 지도를 그리게 될지 기대됩니다!
다음 주에는 《역사학의 거장들》에서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와 카를 마르크스를 읽습니다. 정통 역사가는 아니지만, ‘역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 유명한 마르크스가 껴 있네요! 그리고 《세계의 역사》는 8~9장을 읽습니다. 입 발제와 간식은 은주쌤께 부탁드릴게요~!
역사란 뭘까?
이번에 저희는 쥘 미슐레와 테오도르 몸젠을 만났습니다. 미슐레는 프랑스인이고, 몸젠은 독일인인데요. 이 둘을 통해 그 시대의 프랑스와 독일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1789년 혁명과 1830년 7월 혁명 등을 겪으면서 ‘프랑스’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정의 내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비슷하게 독일은 1871년 연방에서 통일된 나라를 세우면서 어떻게 나라를 어떻게 운영해갈지 고민하고 있었죠. 둘 다 ‘민중’ 혹은 ‘국민’이란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등장했죠.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역할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미슐레와 몸젠도 이러한 시대적 자장 안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역사란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들의 현재를 정립하기 위해 되묻는 작업이었습니다.
서양의 ‘역사학’을 공부하다 보니 ‘동양에는 역사가 없는 걸까?’라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일단 사(史) 혹은 기(記)라는 글자가 붙은 텍스트들은 많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도 있네요! 하지만 아마 서양의 역사학자들의 관점에서는 동양의 역사 텍스트들을 그 자체로 역사서라고 보기에는 좀 애매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에서 신화나 민담 같이 물질적 증거로 증명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에서 그들은 근대 역사가가 탄생했다고 보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저희가 그들의 관점을 그대로 수용할 필요는 없죠. 그들이 자신들의 문제의식 속에서 역사학을 정립했듯이, 저희도 저희의 문제의식 속에서 역사를 고민하면 되니까요.
결국 ‘역사란 뭘까?’ ‘역사란 무엇을 기술하는 걸까?’ 같은 질문으로 귀결됐습니다. 첫 시간에 채운 선생님께서 강의해주셨던 내용을 다시 떠올려 보면, 저희의 관념에 돌을 던질 수 있는 사건들이 기술돼야겠죠. 그런데 이쯤 되면, 푸코가 말한 것처럼, 역사는 단순히 과거를 기술하는 작업일 수가 없는데요. 음... 점점 더 역사가 미묘해집니다. 거장들을 따라가면서 하나씩 짚어보죠!
민족적 숭배를 비판한 민족 역사가, 쥘 미슐레(1798~1874)
이번에 저희는 쥘 미슐레와 테오도르 몸젠을 배웠습니다. 미슐레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날을 기념하는 축제에서 지금도 회자되는 인물이고, 몸젠은 ‘독일 최초 노벨문학상’, ‘가장 뛰어난 로마사학자’ 등의 수식어로 아직도 저명한 인물입니다. 저희는 아주 알짜배기로 거장들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어요!
쥘 미슐레에게 붙은 부제는 ‘민족적 숭배를 비판한 민족 역사가’입니다. 여기서 ‘민족적 숭배를 비판’했다는 것은 그가 ‘비당파성’, 그러니까 인종이나 신분, 계급 같은 정치적 이해와 거리를 두는 것을 역사가의 주요 태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새삼 랑케의 영향력을 실감하게 되네요). 그러나 똑같이 ‘비당파성’을 주장하더라도 역사가들마다 그것을 요청하는 맥락이 다르죠. 가령, 랑케가 비당파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사건’을 서술할 때 신이 어떻게 이 세계에 개입했는지 분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었죠. 반면에 미슐레가 비당파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민중(people)’을 제대로 포착하기 위해서입니다. 오히려 친민중적이라는 점에서 미슐레는 랑케와 달리 어떤 점에서는 매우 정치적이기도 했습니다. 책에서도 그를 “정치적 역사가”라고 표현했죠.
미슐레는 ‘민중의 역사가’라고도 불리는데요. 그는 프랑스 대혁명(1789)이야말로 ‘프랑스가 자신에 이를 수 있었던 사건’이고, 그것을 주도한 민중들이야말로 ‘진정한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짧은 구절에서도 프랑스에 대한 미슐레의 어마어마한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프랑스는 프랑스가 만들었으며, 운명적인 인종의 결속은 내게 이차적인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는 그 인종적 결속에서 자유롭게 태어난 딸이다. 인간은 인류의 진보에 가장 생동적으로 관계한다. 인간은 그 자신의 창조자다.”(93~94) 이 구절에서 ‘비당파성’과 진보의 산물로서 간주된 ‘프랑스인’이 엿보이는데요. 실제로 당대에 미슐레의 강의를 들으면 피가 끓어올랐다고 합니다. 정치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그는 결국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도 쫓겨났는데요. 마지막 강의에서 약 1,500명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미슐레의 역사학이 당대와 깊이 공명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하지만 미슐레의 작업이 호평만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 국립문서 보관서의 ‘역사부서’ 책임자로 임명됐던 그는 다른 역사가들보다 더 많은 일차 사료들에 접근할 수 있었음에도, 다른 역사가들의 분석을 마치 자기 것인 것처럼 가져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해요. 그리고 랑케가 독일인을 진보의 산물로서 강조하면서 독일의 국가적 민족성을 강조한 것처럼, 미슐레도 ‘민중’의 탈을 씌었을 뿐 프랑스의 민족성을 강조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미슐레의 작업은 르페브르 같은 후대의 학자들에게 이어졌다는 점에서 여전히 계속 다시 읽히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모든 역사적 자료를 역사적 사료로 다루었다는 점, 역사가에게 필요한 재능으로 사료지식을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감동’할 수 있는 능력을 꼽았다는 점에서 지금도 다른 역사가들의 모델이 됩니다.
역사적 연구와 문학적 구성을 결합하다, 테오도르 몸젠(1817~1903)
이번에 저희가 읽은 두 명의 거장의 공통점을 꼽자면,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소한 ‘비당파성’을 유지하며 역사적 서술에서 객관성과 중립성을 유지하려 했던 미슐레와 달리, 테오도르 몸젠은 ‘비당파성’조차 넘어갑니다. 애초에 그는 자신의 정치적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는 작업으로서 로마사를 서술합니다. 그리고 그의 저술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카이사르입니다.
몸젠의 대표작은 《로마사》입니다. 그러나 전체 로마사를 서술한 기번과 달리, 몸젠은 철저히 카이사르를 중심에 두고 로마사를 서술합니다. 《로마사》를 읽으면 그가 얼마나 카이사르를 애정하는지 알 수 있다고 하는데요. 지금 우리에게도 익숙한 카이사르의 이미지, ‘시대의 흐름을 읽고 민중의 마음을 휘어잡는 뛰어난 정치인’으로서의 면모 역시 몸젠의 저술로부터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카이사르에 대한 이러한 팬심(?)은 그 당시 정치 지도층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만들어졌습니다. 그의 서술이 문학적 색채를 띄는 이유는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의 영향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카이사르에 대한 그의 애정도 주요한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실제로 몸젠은 진보당 소속 의원으로서 비스마르크와 정치적으로 빈번하게 충돌했습니다. 몸젠이 보기에 카이사르 같은 걸출한 인물을 죽이는 무능한 지도부는 그 자신이 살았던 당대에도 되풀이되고 있었던 것이죠. “카이사르를 죽이는 것을 권리와 의무로 여겼고 개혁의지 없이 무능력하기만 했던 지도부 엘리트의 상은 모든 대립적인 논쟁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복사판으로 계속해서 확산되었다.”(112) 몸젠은 또 다른 카이사르의 등장을 위해 그리고 그런 카이사르를 살해한 무능한 지도부를 예방하기 위해 역사를 서술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책에서는 이러한 몸젠의 작업을 “참여 역사서술”이라고 설명합니다.(106)
모든 역사 연구가 후대의 자료와 이론에 의해 폐기되듯이, 몸젠의 역사서술 방식과 이론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몸젠이 기틀을 마련한 ‘금석학’은 여전히 유효하게 이용되고 있습니다. 금석학이란 비석이나 비문 같은 자료들을 통해 과거를 고고학적으로 분석하는 연구방식을 말합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이전의 역사학의 대가들의 자료를 존중하던 전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몸젠이 수집하고 분석했던 비문들은 아직도 유용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금석학 외에도 문헌학 같은 다른 분야의 학문들을 역사적 분석틀로 활용했고요.
사전지식도 풍부하지 않고, 한 명의 거장을 소개하는데 대략 20~30쪽 분량의 이야기는 간략한 느낌이 없지 않아서 읽는 데 참 힘이 드네요!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역사를 쓰는 태도(혹은 마음)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곱씹게 됩니다. 결국 문제의식 없이는 역사를 쓸 수도 없다는 아주 막연한 생각이 드는데요. 음... 그러면 역사를 쓰는 것과 우리가 글을 쓰는 것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느낌인데요. 계속해서 읽어가야겠습니다.
마무리로 은주쌤과 현주쌤의 산책하는 모습을 올립니다. 다음에는 영님쌤도 함께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