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로 달려가고 있는 마이너 세계사입니다! 어떻게 이번 4학기, 올해의 몽골사를 정리할까 고민했는데요. 평전 쓰기는 실패했고, 그렇다고 에세이 쓰기는 식상하고... 잠깐 짱구를 굴려본 결과, 우리가 배운 것을 10분짜리 영상으로 만들면 좋을 것 같더라고요! 자세한 건 저희 다시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죠!
그리고 이번 시간에는 뒤에 있을 청년 북토크 참여 때문에, 일정을 좀 당겨서 끝내기로 했습니다. 9시에 시작해서 점심 먹는 것까지 포함해서 1시에 끝내는 게 목표입니다! 좀 더 타이트하게 이야기를 나눠보죠.
이번에는 《하버드 중국사 송》 7~9장,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은 1장을 읽어 오시면 됩니다. 분량이 많이 적어졌죠? ㅎㅎ 간식은 혜원누나에게 부탁하겠습니다!
역사에서의 기후(feat. 13세기 소빙하기)
역사를 살펴보면, 역사적 흐름을 만든 중요한 요인 중에는 인간의 행위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인 측면들, 가령 지형의 특성이라든지 기후의 변화 같은 것도 있다는 것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읽은 《하버드 중국사 송》 부분에서는 13세기의 소빙하기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합니다. 대략 2~3도 정도 내려간 것에 불과하지만, 이로부터 비롯된 여파는 상당합니다.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바로 몽골 유목민들이 중앙아시아를 나와서 대규모 약탈을 추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저희가 읽은 몽골 역사에 따르면, 몽골이 그토록 넓은 영토를 지배하게 된 건 애초에 그럴 만한 야욕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정복 활동으로 확장된 네트워크로 인해 당시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던 세계적 흐름에 접속한 것이었고, 유목민 특유의 군사 능력과 칭기스 칸의 탁월한 통치 능력이 결과적으로 제국을 만들었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사실 유목민들이 중앙아시아 바깥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건 이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생존적인 이유도 있었죠. 소빙하기가 도래함에 따라 기온이 내려갔고, 풀이 이전보다 덜 자라고, 가축의 번식과 성장도 이전보다 더뎌졌습니다. 식량 생산에 차질이 생긴 유목민들은 그동안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아왔던 중앙아시아 바깥으로 향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시기적으로도 1206년에 대 쿠릴타이에서 칭기스 칸이 등장한 것, 이후 몽골 제국이 급속도로 세계를 지배한 것을 생각해 보면, 일리 있는 분석인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황하 유역에서 거주하던 많은 농민들이 양자강 이남으로의 남하한 것입니다. 이건 그동안 중국 역사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새로운 사건이기도 합니다. 당나라 때 안녹산의 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양자강 이남을 개발하긴 했지만, 여전히 인구는 압도적으로 황하 유역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소빙하기에 기온이 떨어지고 농사가 예년과 같지 않자(+높은 세금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많은 농민들이 따뜻한 양자강 이남으로 이사합니다. 또한 당시 북방에서 침입하던 유목민들 덕분에 조성된 공포 분위기와 맞물려서 처음으로 양자강 유역에 유례없는 인구가 밀집됐습니다. 이러한 인구의 변화는 나중에 남송이 끈질기게 항전할 수 있는 여력으로 이어집니다. 만약 남부에 그토록 많은 인구가 없었다면, 원나라가 황하 유역을 정복했을 때 남송이 그토록 오랫동안 버틸 수 없었겠죠. 그러면 뭉케 칸도 원정 도중 죽을 일이 없었을 테고, 유럽으로의 진격도 멈춰지지 않았을 테고, 지금의 유럽도 없었을지도 모르고... 아주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대단한 사건도 사소한 것들이 중첩되서 발생한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배경이라고 취급했던 것들이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뭔가 새로운 비밀을 발굴한 것 같은 고양감이 듭니다. ㅋ
중국인 사우마? 네스토리우스교도 사우마!
처음 이 책을 기획할 때는 사우마의 《서방견문록》,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같이 읽음으로써 유럽과 중국이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책 제목부터가 완전히 대비되니까요!? 하지만 사우마의 《서방견문록》을 읽으면서 ‘유럽vs중국’과 같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혹은 기대하는 도식으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미 문빈이 지난 공지에서 정리했지만, 유럽인들은(당시 이들이 생각한 유럽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우마를 “유럽에 도달한 것이 확인되는 최초의 중국인”이라고 정리했죠. 그런데, 어쩌면, 이런 식의 서술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심상으로 정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우마는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그가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내세운 정체성은 ‘네스토리우스파의 교인’입니다(무엇보다 이때 ‘중국인’이 과연 어떤 정체성을 의미하는지도 물어봐야겠지만요!). 수많은 제후들, 왕들을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바로 신실하고 박식한 네스토리우스교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정통 기독교의 교리와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긴 했습니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며 유럽인들이 물음표를 떠올릴 때, 알맞게 다음 목적지로 떠나긴 했지만요. ㅋ
어쨌든 사우마는 ‘중국인’이란 정체성을 애초에 강하게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사우마가 유럽에서 주로 서술한 것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시선은 중국인이라기보다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주로 종교 건축물, 성지들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을 뿐 다른 제도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사우마가 유럽인들을 만나서 설득할 때의 중요한 논리 또한 기독교의 포교였습니다. 몽골을 도와 맘루크 왕조를 공격하면, 드넓은 몽골 제국에 기독교를 포교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죠. 즉, 사우마의 유럽 방문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인으로서였습니다.
그러나 사우마의 서술에서도 알 수 있듯, 당시 유럽은 십자군을 결성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군이 결성되려면 교황이 있어야 합니다. 교황의 명에 따라서 유럽 각지에 산재한 병력들이 모일 명분이 생기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마침 사우마가 유럽을 찾을 당시에는 교황이 없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선출이 돼 있었죠. 그래서 사우마는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 더 깊이, 깊이 유럽으로 들어갔지만,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오고 맙니다.
결국 사우마의 사절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사우마의 견문록만으론 유추하기가 쉽지 않네요. 단순히 ‘최초의 중국인’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하기에, 그것이 표현하는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대에 완전히 정반대의 방향으로 떠난, 그리고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서술한 마르코 폴로와 같이 교차해서 읽으면 뭔가 보이지 않을까요!?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