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네요. 날씨가 바뀐 게 슬슬 실감이 납니다. 마이너도 어느새 마무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사가 얼마나 서구 문명 중심적으로 기술된 것인지 알 수 있었죠. 동시에 다른 세계사에 대한 갈증이 생겼는데요. 이번에 중국사와 몽골사를 공부하면서 그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이역만리 세미나에서 ‘역사는 섞임이다!’를 잠꼬대처럼 반복하고 있는데요. 언제, 어떻게 섞이고 있는지를 주목하느냐에 따라서 ‘세계사’가 다채롭게 서술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누구의 관점에서 서술되느냐, 서술돼야 하느냐, ‘세계’를 다시 서술하려는 욕망인 것 같은데요. 이 부분은 좀 더 고민해봐야겠습니다. ㅋ
다음 시간에는 《하버드 중국사 원ㆍ명》 1~2장,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3장을 읽어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은주쌤께 부탁드릴게요!
송나라, 중국 문명의 결정체
송나라는 참 역설적인 나라입니다. 어마어마한 생산량과 운송체계를 이룩한 동시에 금나라(거란)나 원나라(몽골) 같은 이민족들로부터 쓴맛을 맛봅니다. 이보다 더 외세로부터 시달린 시기가 있을까 싶은데, 한편으론 어느 때보다 문명을 꽃피웠죠. 저한테는 이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었어요. 문명이 꽃피우는 것과 외세에 시달리는 것이 겹칠 수 있다니!?
근거는 없지만, 저의 고정관념에서는 문명의 발달 정도와 군사력은 비례합니다. 지금 선진국들을 봐도 대체로 문명이 발전할수록, 발전된 기술에 기반해서 파괴적이고 효율적인 무기를 만들죠. 그래서 저한테는 문명의 발전, 과학적 지식의 생산, 강력한 군사력 이것들이 모두 비슷한 정도로 진행되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송나라는 주변국에서 벤치마킹할 정도로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지만, 정작 송나라는 조공을 바침으로써 주변국들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변국들은 송나라의 문명을 받아들임으로써 더욱 강성해졌죠. 똑같은 문명인데, 다르게 나타나다니.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비슷한 시기의 중세 유럽과 비교하면 그리고 주변에 세워지던 유목민들의 국가와 비교해도 송나라만큼 풍족한 국가는 없었습니다. 13세기 말 양자강 하류에만 1,5000척이나 되는 선박이 운행했고, 보통 배수량이 180톤이상이었다고 합니다. 최대 길이 24.2미터, 너비 9.15미터 300톤 용적의 선박도 발견됐는데, 1492년 콜럼버스의 함선의 최대 적재량이 약 110톤인 것과 비교해보면, 당시 송나라가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알 수 있죠. 이밖에도 화폐를 제작하고, 농기구를 비롯한 일상 도구들을 주조하는 야금술이 발전했다는 것, 종이 지폐를 발행하고 관리할 수 있을 정도로 행정체계가 잘 잡혔다는 것 등등 근대 국가의 기초라 할 만한 것들이 이미 마련돼 있었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있을 건 다 있었는데, 자본주의가 결코 발생하지 않았죠.
사실 송나라의 발전은 그 이전 왕조부터 쌓인 노력들에 힘입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양자강 이남이라는 새로운 옥토를 발견한 덕이기도 하지만, 발달된 기술력도 한몫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술력은 송나라 이전의 수나라와 당나라가 피땀이 서린 흔적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습니다. 수나라는 양자강과 황하를 연결하는 ‘통제거(通濟渠)’, 황하와 발해만을 연결하는 ‘영제거(永濟渠)’를 건설함으로써 이후 양주에서 항주까지 이어진 거대한 운하 체계의 기틀을 마련했죠. 당나라는 사천으로 피신해 있는 동안, 양자강 이남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전국을 뒤덮는 연락망을 발명했죠. 이후 송나라에서 인쇄술, 항해술 같은 것을 발명하고 활용할 수 있었던 것도, 수나라와 당나라에서부터 쌓아 올려진 것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죠.
어쩌면 왕조는 바뀌고 있었지만, 중국 자체적으로 문명을 건설하는 흐름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도 저는 ‘기술력이 발전하면 곧 외부 세계를 정복해야 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송나라는 이미 자체적으로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었고, 이미 외부에서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네트워크도 충분히 마련한 상태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다른 정복 문명들을 보면, 밖으로 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죠. 유럽과 중앙아시아만 하더라도 먹고 살기 위해서 밖으로 눈을 돌려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들의 문명의 패러다임은 밖에서 무언가를 노획하는 식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는 반면, 송나라는 외부를 정복하는 군사력과 무관했을지도 모릅니다. 주역에서도 ‘문명’은 이괘(離卦)로 설명했고,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포용적 역량 혹은 이질적인 것과 관계 맺는 연결의 역량처럼 나타났었죠. 여러모로 중국의 문명은 우리에게 익숙한 ‘문명’과 지향하는 바나 작동 양상이나 달랐습니다. 원, 명의 중국사를 보면서 지리적인 관점에서 중국의 문명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볼 수 있겠죠?
‘세계’를 서술하다
지난번 공지에서 문빈도 지적했지만,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세계의 서술》을 임의적으로 바꾼 것입니다. 애초에 마르코 폴로의 목표는 ‘동쪽으로 향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보겠다’는 거였죠. 이를 마르코 폴로 개인의 모험심으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당시 유럽인들의 심상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징조로 봐야 할까요?
마침 이역만리에서 《봉건사회》를 읽고 있던 저희에게는 단지 마르코 폴로 개인의 모험심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르크 블로크에 따르면, ‘유럽인’이란 정체성은 봉건사회(9~13세기)를 거쳐 형성된 것이고, 그것이 뚜렷해진 건 봉건사회가 끝나갈 무렵이었죠. ‘유럽인’이란 심상이 뚜렷해지기 시작한 건, 유럽이 아닌 것들, 그러니까 유럽과 유럽 바깥의 경계선이 생기면서입니다. 그리고 마르코 폴로가 ‘세계를 서술’하기 전에 이미 폴로의 아버지와 숙부가 1260년 베니스를 떠나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카라코룸을 다녀왔죠. 즉, 13세기에 다녀온 건데, 이는 블로크가 말한 바와도 일치합니다. 둘을 함께 놓고 본다면, 당시 유럽인으로서 마르코 폴로 일가가 유럽 바깥의 세계를 서술하고자 한 욕망이 생긴 것도, 자신들이 머무는 곳을 명확하게 인식하고자 하는 ‘유럽인’의 심상 구조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계를 서술한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마이너 세계사’를 기획한 이유는 ‘다른 관점에서 세계사’를 서술하기 위함이었는데요. 세계사를 서술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근본적으로 ‘세계사를 서술하고자 하는 욕망’은 과연 무엇일까요? 적어도 폴로 일가로 대표되는 당시 유럽인들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비슷하게 저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도 어떤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요. 브뤼노 라투르가 얘기한 것처럼, 앞으로는 ‘녹색 계급’ 같은 개념이 더욱 대두될 것이고, 우리는 이민자들과 섞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해왔던 ‘세계’가 깨져나가고 새롭게 ‘세계’를 그려야 한다는 징후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점에서 마르코 폴로의 서술은 단순히 ‘유럽인이 본 동방’이 아니라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가 깨져나가는 한 인간이 새로이 세계를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읽힙니다.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건, 폴로는 ‘국가’가 아니라 ‘종교’에 따라 지역을 구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는 무함마드를 믿고, 어디는 칸을 따르고, 어디는 기독교가 지배하고... 피부색이나 민족, 국가 같은 정체성이 그렇게 중요하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당시에는 ‘종교’를 중심으로 정체성을 파악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런데 폴로는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적대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성격이 나쁜 사람들도 왜 그렇게 됐는지를 나름대로 서술하죠. 비합리적이고 편파적으로 보일 만한 게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어떻게든 그 지역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폴로의 노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건 우리가 어떤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지, 우리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한 노력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의 역사가 아니라 내가 있지 않은 곳의 역사를 알고자 했다는 점은 지금 우리가 세계를 서술하고자 할 때도 잊지 말아야 할 태도인 것 같습니다.
송나라의 역설! 문명은 찬란했지만, 군사력은 약했던 게 확실히 흥미로운 점 같습니다. 당나라 당시에만 해도 (수도 장안이 여러 차례 장악당했지만) 군사력이 약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는데, 송나라에서 군사력이 취약해진 것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말하는 무인 중심 사회에서 문인 중심 사회로 이전된 것이 원인일까요? 아니면 다른 어떤 원인들이 있을까요? 그리고 지금의 문명은 기술의 발전과 군사력이 비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지 또 탐구해봅시다!!
그리고 마르코 폴로가 ’세계‘를 서술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도 아주 재미난 것 같습니다. 봉건사회를 통해 봤듯이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유럽은 다른 세계와 완전히 고립된 채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후 ’세계‘를 알고 싶다는 마음이 그들에게 떠오른 것이 흥미롭습니다. 저희가 토론하면서 세계를 알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에는 자신이 얼마나 좁은 세계에 갇혀 있음을 아는 것이고, 세계에 대한 앎을 통해 익숙한 세계가 깨지면서 새로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이해되는 것과 연관된다는 게 좋았습니다. 저희가 ’마이너 세계사’ 세미나를 하면서 다양한 세계의 역사를 배우고 있는데, 확실히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이 새로이 이해되고 그려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마르코 폴로는 왜 ‘세계‘를 그리고자 했고, 또 왜 그런 방식(종교를 중심으로 파악하고, 신비한 이야기도 서술하고, 국가를 중심에 놓지 않는 등등)으로 세계를 서술했는지. 마르코 폴로의 길을 따라가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만들면서 나아가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