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명의 경제성장 그리고 호랑이의 사라짐 송(宋, 960년 ~ 1279년) 이후 원(元, 1271년 ~ 1368년) + 명(明, 1368년 ~ 1644년)시기에도 경제는 꾸준히 성장합니다. 당시, 서유럽은 물자도 부족하고, 도로도 엉망이고, 고립된 상태여서 중국과 비교했을 때 경제 수준이 형편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네치아의 상인 출신,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가 통치하는 제국을 만났을 때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수많은 도시와 마을, 그리고 흩어진 가옥들을 보면, 사람이 살지 않는 길목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어디를 가든지 쌀, 밀, 육류, 생선, 과일, 채소, 술 등이 널려있었고 모든 가격이 저렴했다.” 마르코 폴로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잘 일구어진 토지’였습니다. 폴로는 “경작될 수 있는 곳이라면 놀고 있는 땅이 없다.”고 감탄합니다. 그 정도로 원 제국은 농업 생산력은 뛰어났습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원-명 시기에 부유한 ‘도시’가 등장합니다. 원-명 시기 경제 성장 모델은 국가 + 민간 협력 사업이었습니다. “조직과 자본은 대체로 민간 영역에서 가져왔고, 운영은 정부 출연으로 설립된 기반 설비를 통해 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정부가 교통 체계를 마련해주면 그 체계를 통해 상품을 유통하고, 정부가 곡물을 저장했다가 기근 시에 곡물 시장에 개입해 위기를 막는 방식이었습니다. 중화제국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주도적인 역할과 힘이 강했는데, 한편으로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국가 행정을 능가하는 ‘상업 도시’들이 탄생합니다. 완전히 변하지는 않았지만, 역사적으로 ‘촌락’ 중심의 사회에서 ‘도시’ 중심의 사회로 조금씩 전환되는 모습이 보입니다. 송나라를 시작으로 해서 사농공상의 마지막에 위치했던, 상인들의 지위가 달라지는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도시의 발전과 함께 전국 각지에서는 상인 조합이 생겨나고, ‘촌락’ 중심의 행정(기존의 행정)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나라로 가면 상인들의 지위는 어떠할지, 상업 도시의 탄생은 역사에 어떤 영향을 줄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중국 역사에서 경제의 문제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쓰이고 있단 게 흥미로웠습니다. 그들에게 경제는 돈이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이었죠. ‘경세제민’의 뜻은 ‘세상을 바로잡고 백성을 돕는다.’였습니다. “경세가들은 국가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백성이 어려운 시기에 쇠하지 않고 좋은 시기에 번영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에 헌신하는 자신들의 소임”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이는 유요적 호혜의 원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신념이었습니다. 당시 지도자들은 기후의 문제에 있어서 도덕적인 책임을 느꼈듯이, 백성이 제대로 먹고 살지 못한 것은 정부가 천명을 잃은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동시대의 유럽과 달리 중화제국에서는 경제에 국가가 개입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허나, 원-명 시기에 국가 개입을 넘어서는 상업의 활성화가 진행됩니다. <하버드 중국사>의 저자, 티모시 브룩은 원-명 시대의 경제 성장으로 인해 동-식물의 피해가 발생했음을 주목합니다. 당시 중국은 산림 벌목이 빠른 속도로 진행됐는데, 무분별한 벌목으로 인해 수많은 산이 민둥산으로 변해버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산림 파괴는 나무가 사라지는 것 이상을 의미했습니다. 자본주의에서 숲을 밀어버리면서, 생태계를 파괴하고 ‘박쥐’와 인간이 만나 코로나가 발생했듯이 당시에는 숲을 밀어서 “중국 최고의 종” 호랑이와의 접촉이 빈번해지고, 그에 따라 호랑이를 사냥하는 일도 빈번해집니다. 여기서, 티모시 브룩의 시선이 흥미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역사를 기후의 문제와 연결하고, 용과 연결하고, 호랑이와 연결해서 봅니다. 경제 성장이라는 주제가 호랑이의 멸종과 관련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경제 성장이라고 하면 단순히 ‘인간 삶의 변영’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끝에 ‘호랑이의 사라짐’을 보여주면서 한쪽의 번영은 다른 한쪽의 멸망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2. 친족 네트워크 + 여성과 남성의 삶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한 인간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네트워크’가 반드시 필요했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봉건사회>에서도 두 가지 관계로 나누는데, 1) 혈족 관계 2) 가신 관계입니다. 9~13세기 당시 서유럽에서는 국가의 행정력이 약해서 ‘가족 네트워크’에 의존하거나 아니면 ‘봉건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가야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수호전>을 함께 읽는데, <수호전>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보입니다. 혈연 네트워크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인물들은 모두 ‘양산박’이라는 공간에서 ‘도적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함께 살아가죠. 이번에 저희가 읽은 <하버드 중국사 원, 명> 편에서도 그 당시 유대 관계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원-명 당시 사람들은 1) 행정망, 2) 친족망에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혈통 관계 중에 남계친 혈통은 개인에게 뿌리 정체성을 제공한다면, 인척 관계는 개인을 다른 세상으로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원-명 당시 ‘가족’은 다른 시기(당, 송)와 차이가 생기는데요. 그것은 당이 멸망하면서 당대의 오랜 귀족 가문이 사라지고, 원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송대의 왕실 가문 역시 사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원-명에 들어와서는 ‘뼈대 있는 가문’이 드물었습니다. 훌륭한 가문이 계속 출현했지만, 금방 사라지기를 반복했는데요. ‘오래된 가문’이 없고, 또 금방 흩어지다보니, 가문을 유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각 종족에서는 구성원과 그들의 자산을 꼼꼼히 기록했으며, 특히 명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기록을 간추려 족보를 편찬하고 잠재적인 상업 거래처나 배우자 후보들과 공유했다.” 친족 구성원이 누구인지 한 사람, 한 사람 기록하고, 또 사실 ‘부정확한’ 족보를 편찬하여 자신들이 뿌리있는 가문임을 강조하고, 친족 유대 관계를 강조합니다. “친족망이 원-명 사람들의 삶의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면, 성의 구별은 친족망을 구성하는 원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명 당시 성의 위계는 여성보다 남성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형성됐는데요. 남성 노동력 확보와 제사를 지낼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들을 중요시했고, 그리하여 여아를 살해하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원-명 당시 결혼 제도에 있어서도 여성에게 불리한 이념을 강요했습니다. 여성은 과부가 되어도 재혼이 불가능했고, 국가는 ‘정숙한 부인’으로 남도록 유도합니다. 29세부터 49세까지 재혼하지 않으면 국가의 표창을 받을 수 있었는데요. 도덕적으로는 재가를 허용하지 않았지만, 현실에서는 과부의 재가가 정절보다 훨씬 보편적이었습니다. 많은 여성은 한 번 이상 결혼했습니다. 남성의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성 우위의 구조는 역으로 남성 지배의 발목을 잡기도 했습니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여아를 살해하면서 인구 불균형이 심해집니다. 인구 데이터가 허상일수도 있지만, 그 당시 데이터상의 비율을 보면 남성100명에 여성이 50명 이하로 내려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남성은 여성의 수가 부족해지면서 장기적인 독신을 피할 수 없었고, 일처다부제의 결혼 풍습, 남성끼리의 결혼 등 특이한 편법이 성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성에게는 의례 + 경제적으로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기에 엄청난 부담 속에서 살아갑니다. 당대에까지만 해도 여성과 남성의 불균형이 심하지 않았는데, 송대부터 원-명 시대로 오면서 점점 그 불균형이 심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지위에 불균형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궁금증이 또 생깁니다.
3. 마르코 폴로와 인도양으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으면, 마르코 폴로가 대체 어떤 인간일까? 상상하게 됩니다. 제가 느끼기에 마르코 폴로는 수다쟁이임은 틀림없고, 용기와 생존력(적응력=유연성)을 지닌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르코 폴로는 ‘미지의 세계’, ‘어둠의 영역’을 어떻게 이렇게 잘 돌아댕겼을까요?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지키고자 했으면, 풍성한 이야기를 얻어오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넉살 좋고, 깡이 있고, 극강의 친화력을 가진 인물인 것 같습니다. 언어적 장벽, 문화적 장벽, 인종적 장벽, 종교적 장벽을 쉽게 뛰어넘고 그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록하고, 유럽 세계에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전달합니다. 저는 <동방견문록>을 보면서 그가 보고 느낀 것에 특정한 기준이 없다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는데, 이번에는 좀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겠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는 그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들으려고 한 게 아니기에 특정한 기준이 없는 게 아닐까요? 그는 그가 그 자리에서 보고 만난 것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일 뿐입니다. 자기 기준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낯선 공간에서도 유연하게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마르코 폴로는 세계의 수많은 이야기를 줍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보면, 다른 문화, 다른 종교에 대해 배척하는 크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보다 기독교, 유럽인의 삶이 더 우월하다거나 그들의 풍습은 미개하다고 함부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풍습을 가진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줄뿐입니다. 이번주에는 마르코 폴로가 인도양을 여행한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인도양에서는 아주 기이하고 잔인한 이야기가 많았는데요. 사람을 뼛속에 있는 골수까지 모두 먹어치우는 이야기, 12개의 칼을 이용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야기, 원숭이를 인간 난쟁이로 속이는 이야기, 독수리를 이용하여 다이아몬드를 캐내는 이야기 등등. 그 공간에서 어떤 존재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 이야기를 할뿐입니다. 마르크 폴로는 좁은 유럽 땅 밖에 광활한 ‘세계’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이야기 보따리를 들고 온 것입니다. 세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누군가를 이해하고, 어떤 사건을 이해할 때 ‘이야기’의 형식을 주고받습니다. 사실이든 거짓이든 과장됐든 축소됐든 상관없이 ‘이야기’에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마이너 세계사 후기는 여기까지고요! 다음에는 <하버드 중국사 원, 명> 7장 믿음, 8장 물품 거래 파트를 읽어오시면 됩니다. <동방견문록>은 끝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용에 이어 호랑이...산림벌채로 호랑이가 마을로 내려오고 그것이 호랑이르 개체수 감소로 이어졌다는 게 참 아이러니 합니다. 호랑이의 접촉이 늘어난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의 활동 때문인데 말이죠ㅠㅠ
가문을 유지하고 대를 잇기 위해 여아살해가 빈번했다는 끔찍한 역사는 최근까지도 이어져 왔었죠. 귀족이라 할 사람들은 당나라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는데 족보를 사고 팔면서 '뼈대 있는 가문'이라는 것을 만들었다는 걸 보면서...어떻게든 자기 대를 잇고 싶어하는 이 심리는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박규창
2023-11-28 11:44
조선에서 강조하고 있는 수많은 문화적 전통이 있었죠. 대표적으로 여성의 삶이 그랬는데, 그것들이 원-명 시대에 생겨나거나 중요해졌다는 부분이 놀라웠습니다. 티모시 브룩의 놀라운 지적 중 하나는 우리가 오늘날 '중국의 전통'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원나라를 거치면서 변형된 중국인의 문화였죠. '한족'이라고 묶을 수 없을 정도로 이미 당시 양자강 남쪽에 사는 사람들과 황하 근처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가 달랐고, 여기에 외국인들과 유목민들까지 섞인 것이 중국의 문화로 자리잡은 것이죠. 조선이 '사대부의 예절'이라고 섬겼던 많은 것들도 이러한 문화였고요. 이걸 보면, 역시 '역사는 섞임이다'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어요... 후후..
그리고 폴로를 '이야기를 줍는 자'라고 보는 것도 재밌네요. 일단 폴로는 '그럴듯한 이야기' 혹은 '우리가 알아야 할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주웠던 것 같습니다. 그가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야기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었으니까요. 여기에 편견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도 매우 대단하게 보이고요. 흐음...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폴로의 기록을 '역사'로 보고 있는 건데, 여기서 역사와 이야기의 관계가 다시 고민되는군요. 이야기와 역사... 이... 이역만리..!
용에 이어 호랑이...산림벌채로 호랑이가 마을로 내려오고 그것이 호랑이르 개체수 감소로 이어졌다는 게 참 아이러니 합니다. 호랑이의 접촉이 늘어난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의 활동 때문인데 말이죠ㅠㅠ
가문을 유지하고 대를 잇기 위해 여아살해가 빈번했다는 끔찍한 역사는 최근까지도 이어져 왔었죠. 귀족이라 할 사람들은 당나라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는데 족보를 사고 팔면서 '뼈대 있는 가문'이라는 것을 만들었다는 걸 보면서...어떻게든 자기 대를 잇고 싶어하는 이 심리는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조선에서 강조하고 있는 수많은 문화적 전통이 있었죠. 대표적으로 여성의 삶이 그랬는데, 그것들이 원-명 시대에 생겨나거나 중요해졌다는 부분이 놀라웠습니다. 티모시 브룩의 놀라운 지적 중 하나는 우리가 오늘날 '중국의 전통'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원나라를 거치면서 변형된 중국인의 문화였죠. '한족'이라고 묶을 수 없을 정도로 이미 당시 양자강 남쪽에 사는 사람들과 황하 근처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가 달랐고, 여기에 외국인들과 유목민들까지 섞인 것이 중국의 문화로 자리잡은 것이죠. 조선이 '사대부의 예절'이라고 섬겼던 많은 것들도 이러한 문화였고요. 이걸 보면, 역시 '역사는 섞임이다'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어요... 후후..
그리고 폴로를 '이야기를 줍는 자'라고 보는 것도 재밌네요. 일단 폴로는 '그럴듯한 이야기' 혹은 '우리가 알아야 할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주웠던 것 같습니다. 그가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야기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었으니까요. 여기에 편견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도 매우 대단하게 보이고요. 흐음...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폴로의 기록을 '역사'로 보고 있는 건데, 여기서 역사와 이야기의 관계가 다시 고민되는군요. 이야기와 역사... 이... 이역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