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이 아닌 주변의 역사를 공부하는 마이너 세계사. 올해는 유목민의 역사를 주제로 1년을 열심히 달렸왔습니다. 슬슬 마무리할 때가 왔네요. 일단 지금 계획하고 있는 건 몽골이 ‘세계’를 통치한 방식을 칭기스 칸, 쿠빌라이 칸, 주치 울루스 각각의 관점에서 5~10분 정도의 동영상으로 정리하는 건데요. 각자의 아이디어가 더욱 필요합니다! 어떻게 마무리하면 좋을지 생각들을 모아보죠! 그리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다 읽었으니, <하버드 중국사 원, 명>만 끝까지 읽어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혜원누나에게 부탁할게요~
‘통합’을 열망하는 시대
티모시 브룩은 원나라와 명나라를 동시대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시기상 겹치기 때문은 아닙니다. 원나라와 명나라는 공통된 변화를 겪었고, 각자의 역사를 살핌으로써 이 시대의 전반적인 모습을 더 잘 포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원나라가 원인이 돼 명나라가 그러한 식으로 형성됐다고 설명하는데요. 특히 ‘문화’ 전반에 대한 설명이 그랬습니다. 지금 우리가 흔히 ‘중국의 문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고대 한나라’ 때부터 전해져온 것이 아니라 명나라 때 형성된 것이고, 명나라는 원나라의 많은 문화들을 계승했죠. 이민족이라고 해서 배척했던 송나라 때와는 달리, 이민족과 섞였고 섞일 수 있도록 문화를 재편성한 결과가 지금 중국의 문화입니다.(물론 ‘지금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나라, 근대 중국까지를 봐야겠지만요...!) 이번에 읽은 ‘믿음’ 파트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명나라 시대의 정신구조가 형성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티모시 브룩이 말하는 ‘믿음’이란 시대적으로 사람들이 무의식 중에 추구하는 정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명나라 때의 ‘믿음’은 원나라와의 격동 속에서 기존의 중국인이 가지고 있던 심상이 변형되고 있었죠. 대표적인 게 ‘중국인’에 대한 정의입니다. 송나라 때의 ‘중국인’이란 유학적 정신을 간직하고 유목민에게 빼앗긴 땅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자들이었죠. 반면에 원나라 때 ‘중국인’은 ‘(1)유목민, (2)외국인, (3)북중국인, (4)남한인’이란 위계 질서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목민, 외국인, 황하 유역에서부터 양자강 이남의 한족까지 모두 아우를 필요가 있었던 명나라에서는 이들을 모두 “화(華), 곧 중국인”으로 다시 규정합니다.(357) ‘새로운 중국인’은 명나라에서 추진한 이념적 작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가 중국인인지’를 새롭게 인식하는 흐름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티모시 브룩은 이때 명나라에서 나타난 패러다임은 ‘통합’, 여러 이질적인 것을 공존시키는 게 아니라 하나로 합치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건 통합적 ‘중국인’ 정체성이 생기던 흐름과 중국 바깥에 대한 거부감 커지는 흐름이 동시에 가속화됐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명나라의 ‘세계’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인식 속에서 이루어졌는데요.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낳다’고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은 속성만 다를 뿐 대등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늘이 무한한 만큼 땅도 무진하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선교사들이 가져온 유럽의 지식 속에서 땅은 한계가 있었죠. 어떤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렇게 중국 바깥의 사유가 흘러들어오면서 ‘중국의 사유’의 테두리 또한 명확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중국인들은 너무나도 중국적이지 않은 것들을 어떻게 중국적인 틀 속으로 통합할 것인지 고민했고요. 단순히 중국 전통과 위배된다는 이유로 거절하기에 사유뿐만 아니라 민족까지 너무 많은 것이 많이 섞여있었죠.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요. ‘중국의 뿌리’를 찾으려고 할수록 중국적이지 않은 것들이 계속 보이네요!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야기로 끝나고, 이야기로 이어지는 역사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다 읽었습니다! 하지만 이걸 과연 ‘역사’로 분류해서 읽을 수 있을지 저희는 중간중간 계속 질문이 나왔는데요. 이때 우리가 말하는 ‘역사’란 아마도 ‘사실에 근거한 기록’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신빙성을 사건의 연도, 등장인물, 이해관계, 지리적 특징 등이 얼마나 사실에 근접하게 기록됐는지에 따라 판단합니다. 그런 점에서 폴로의 서술은 꽤나 ‘역사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검증을 통해 오류가 밝혀진 것도 있지만, 또한 자료가 집약적이지 않았던 그 시대에서 꽤 정확하게 기록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자료들이 쌓여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실 여부를 따지는 식으로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꾸준히 반복되지만, 저희가 <동방견문록>을 볼 때 가져가는 키워드는 바로 ‘이야기’입니다. 폴로는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기록하겠다고 했고, 이번에 마지막 챕터인 ‘대초원’도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죠.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야기로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요? 그래도 저는 책을 마무리할 때 ‘세계’라든가, ‘기록’이라든가 나름의 소감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주치 울루스를 이야기하다 ‘노가이’라는 동시대인의 용맹함을 얘기하는 걸로 끝납니다. 토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갔는데, 이런 식의 마무리가 ‘또 다른 이야기로 열려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나 싶네요. 폴로는 동시대 인물인 노가이까지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 다음부터는 우리들이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붙일 수 있는 거죠.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란 폴로가 ‘세계’를 보고 듣고, 이해하려고 했던 노력인 것처럼, 우리 또한 누군가가 보고 듣고 이해할 ‘세계’를 담아낸 이야기여야겠고요. 이역만리팀에서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함께 읽어오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티모시 브룩의 '믿음' 파트가 확실히 인상적이었네요! 원-명 당시 사람들은 어떤 믿음 체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상상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역사 공부는 우리와 다른 믿음 체계를 지닌 사람들과 만나고, 지금 우리의 믿음 체계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되는 장점이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영혼을 믿고, 유-불-도의 통합을 믿고, 천원지방의 믿음이 다른 개념들을 토해 바뀌는 이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이역만리에서 <수호전>을 읽고, <동방견문록>을 또 함께 읽으니 '이야기'라는 키워드가 머리에 계속 남네요! 이야기와 역사를 어찌 사유할 수 있을지! 세미나하면서 계속 고민해봅시다!
명이라는 한 나라를 만드는 것은 새로운 중국인을 구성하는 작업이었다는 것이 인상적이네요. 지금 우리는 '중국인' 하면 한족의 역사를 떠올리지만, 그것도 결국 믿음의 문제일테고 말이죠. 각 시대마다 세상을 인식하는 그 합리성이 각각 달랐다는 것을 배우는 것, 지금의 합리성이 결코 자명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배우는 것이 역사를 읽는 즐거움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