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태풍 카눈을 피해 온라인으로 만났습니다. 태풍+몽골을 생각하니, 태풍 때문에 몽골 여행이 취소된 민호가 생각나는군요. 이번에 민호가 액땜을 해줬으니, 저희가 나중에 몽골 여행을 갈 때는 괜찮겠죠? ㅎ
바로 다음 시간 공지하겠습니다. 《몽골 비사》는 끝까지, 《하버드 중국사 당》 4장을 읽어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혜원누나에게 부탁하겠습니다~
기묘한 중앙과 지방의 관계 : 절도사의 황제에 대한 모순된 감정
이번에는 ‘절도사’란 당나라 고유의 관직을 중심으로 당나라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공부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봤었지만, 당나라가 약해지기 시작했던 사건이 ‘안녹산의 난’이었죠. 나중에 ‘황소의 난’이 일어나면서 약해진 당나라에 사형선고를 내리긴 했지만, ‘안녹산의 난’으로 약해지지 않았다면 아마 황소의 난에 그리 휘청거리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어쨌든 ‘안녹산의 난’은 당나라 역사에서 전반기와 후반기를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고, 여기서 안녹산이 ‘절도사’였다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절도사는 번진(藩鎭)이라는 행정 조직의 수장을 말합니다. 번진은 이전 행정 조직의 단위인 군진 여러 개를 묶은 새로운 행정 조직의 단위입니다. 왜 번진을 새로 만들었냐면, 기존의 병력 운용 방식, 그러니까 각각의 군진에서는 최대 1만명까지의 병력만을 운용할 수 있었는데요. 이것만으로는 돌궐이나 토번, 발해 같이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막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군진들을 합쳐서 더욱 많은 병력을 운용할 수 있도록 ‘번진’이라는 새로운 행정 조직 단위과 번진을 통치하는 ‘절도사’란 직책을 만든 것이죠.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절도사에 임명된 사람들은 모두 ‘비한족’ 출신인데요. 이는 절도사가 기존의 귀족 세력들을 견제하고자 했던 중앙 세력의 노림수였기 때문입니다. 황제와 그 측근들은 자신들의 양자로 재능 있는 비한족인들을 받아들이고, 이들을 나중에 절도사로 임명함으로써 기존의 한족 귀족들을 견제한 것이죠. 안녹산도 그렇게 절도사가 되고, 권력을 얻었고요.
그런데 절도사의 중앙에 대한 감정은 하나로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장안(중앙)에 대한 낙양(지방) 일대의 관계는 항상 어딘가 삐딱합니다. 한나라 때는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고, 1장에서 살펴봤듯이, 당나라 때도 절도사들은 장안으로 식량을 꼬박꼬박 보내지 않았죠. 안녹산의 난 이후에는 아예 절반 정도 독립한 절도사들도 있었습니다(유주, 성덕, 위박. 이른바 하북 삼진). 처음에는 비한족 출신이기 때문에 뿌리 깊은 충성심 같은 게 없었던 것인가 싶었고, 아니면 지리의 영(?) 때문에 중앙에 반감을 갖게 된 건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앙(황제)에 대한 충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황권이 약해지고 환관들이 권력을 남용할 때는, 혹시 환관이 황제를 해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견제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죠. 민족도 아니고, 집안(家)도 아니라면 중앙(황제)과 지방(절도사)의 유대감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참 궁금했습니다.
토론에서도 뾰족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는데요. 다만 이런 구도가 중국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 같단 얘기를 했습니다. 가령, 춘추전국시대에도 주나라에 대한 다른 나라들의 충성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미 춘추오패가 등장했을 시점에는 주나라의 권력이 별 볼 일 없게 됐는데, 그럼에도 주나라에 충성하는 다른 제후국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이들의 권력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항상 권력의 문제가 얼마나 강력하게 획득하고 휘두를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쓸 수 있는가의 관점에서 다뤄진 것 같다는 것이죠. 저희가 보기에 권력을 사용하기 위한 명분은 ‘허울’이고, 곧 ‘실리’에 반대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들의 정신구조에서는 명분이 동반되지 않는 권력의 사용은 다른 이들이 힘을 모아 몰아낼 수 있는 명분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알 듯 말 듯 한데... 좀 더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격동하는 중앙아시아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는 자료가 빈약하고, 불분명하기까지 했던 청년 시절과 달리, 좀 더 확실한 자료들이 있었습니다. 《칭기스 칸 기》와 《몽골 비사》는 확실히 다른 관점에서 서술되긴 했지만, 둘을 비교해보면 공통되게 나오는 장면과 대화들이 있죠. 기술한 바가 같으면, 아마도 확실한 사료로 추정된 게 있는 것 같은데요. 이번에 읽은 6권에서 옹 칸이 칭기스 칸을 배신했을 때, 칭기스 칸이 옹 칸과 그의 아들 셍굼, 자신의 의형제인 자모카에게 보내는 긴 대화가 그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죠? 이렇게 긴 이야기가 《칭기스 칸 기》와 《몽골 비사》에 비슷하게 서술돼 있다면, 이 대화가 어딘가에 기록돼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칭기스 칸 기》나 《몽골 비사》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참고한 걸까요?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칭기스 칸의 육성이 담긴 몇 안 되는 자료라는 건데요. 나중에 칭기스 칸에 대한 열전을 쓸 때 참고할 중요한 사료로 체크해두었습니다.ㅋ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부터 칭기스 칸이 본격적으로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부심 있는 사람들을 칭기스 카한이 굴복시키고, 주르킨씨들을 없애 버렸다. 사람들을, 그 나라를, 칭기스 카한이 자기 사유 백성으로 만들었다.”(104)
“그 뒤 닭해(1201)에 카다긴과 살지오드가 연합하여 (…) 종마와 암말을 베어 맹세하고 거기서 에르구네 강을 따라 이동하여 켄 강이 에르구네 강에 실어다 붓는 삼각주의 넓은 습원에서 자모카를 구르 카로 추대했다.”(106)
칭기스 칸은 정복하는 부족들의 고유함을 지우고, 칭기스 일족에 봉사하는 백성들로 만들었고, 비슷하게 자모카는 새로운 부족들을 통합해서 칸이 되고 있었습니다. 잠시 부연하자면, 자모카가 된 ‘구르 칸’이란 서요(西遼)의 군주, 그러니까 거란족의 통합 족장을 뜻합니다. 이는 칭기스 칸이 활동하는 오논 강 일대와 자모카가 세력을 규합한 에르구네 강(지금의 아르군 강)에서 혈통을 넘어서는 새로운 집단들이 탄생하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마 칭기스 칸의 대적자로 자모카가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도, 단순히 그의 재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칭기스 칸과 비슷하게 새로운 사회를 꾸리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대적으로 보면, 확실히 칭기스 칸이 몽골이라는 거대한 사회를 규합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개인적 재능만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도 한몫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는 유독 '때'를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그토록 약해지고, 외부로부터 시달렸지만, 결국 당나라가 망한 것도 특정 인물의 무능함이 아닌 여러 가지 요인들이 겹쳐 만들었던 '때' 때문이었고, 칭기스 칸이 몽골을 규합할 수 있었던 것도 '때'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주역을 공부하면서도 '때'를 사유한다는 게 뭔지 참 아리송한데요. "모든 것은 다 그럴 만한 '때'가 있다"는 식의 치트키 같은 말 이상으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흐름 같은 게 있음을 역사적으로도 사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