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 세계사에서는 지도 공부를 포함해서 역사를 공부하죠. 늦은 감이 있지만, 신입회원 기강 한 번 잡아봤습니다. 현대 중국의 지도를 외우는 거였는데요. 흐음... 만족스럽진 않아요. 다음 주에 한 번 더 시험을 보기로 했습니다. 크크큭.
다음 시간에는 잭 웨더포드의 <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 1부, <하버드 중국사 당> 5장을 읽어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제가 준비할게요~!
도시, 장안과 낙양
이전까지는 당나라에서 장안의 수도로서의 위상이 자리 잡는 과정을 설명했다면, 이번에 공부한 부분은 수도 장안의 도시로서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미 여러 번 얘기했지만, 당나라는 이전 진나라와 한나라와의 연속성을 강조함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진나라와 한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을 중심으로 제국의 질서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장안이 그 어떤 도시보다 더욱 화려하고 질서 정연할 필요가 있었겠죠. 마치 유럽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연상케 하는 그런 도시 계획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황성까지 쭉 뻗어 있는 도로에 마치 바둑판처럼 놓여 있는 여러 건물들. 거기다 황성을 내려다볼 수 없도록 건물의 높이도 제한하는 등 신분에 따라 거주할 수 있는 건물의 모습도 달랐습니다. 유학생이 머무는 곳, 일반 백성들이 생활하는 곳, 농업이 시행되는 곳 등등을 구별하는 분명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계획도시로서 장안을 공부하면서, 모든 도시에 시공간의 통제와 도시의 질서, 통치 이념이 유기적으로 연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로지 관문서를 몸에 지닌 관리들, 특별한 허가를 받은 결혼 행진, 의사를 만나러 가는 응급 환자 그리고 상(喪)을 알리러 가는 사람만이 밤중에 주요 도로를 지나갈 수 있었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순라(巡邏)에게 발각되면 활줄을 튕기는 경고음을 듣게 되고, 그래도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순라는 경고의 의미로 화살을 쏘고, 최종적으로는 화살을 쏘아 맞춘다. 다만 음력 1월 14일에서 16일 사이에 벌어지는 등절(燈節)에는 연등을 구경하면서 여러 사원을 두루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192)
저희가 가장 신기해하면서 재미있게 읽은 부분인데요. 24/7 자본주의 리듬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유’란 ‘무제한 이용’과 동의어지만, 고대인들에게 그런 자유에 대한 관념이 없었습니다. 주요 도로에 대한 이용과 관련해서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야 도로 이용과 관련해서 큰 제약이 없다지만, 고대 중국인들, 당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도로’라는 공간은 언제나 특정한 ‘시간’의 제한과 더불어 규정됐고, 도로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조건을 충족해야만 했습니다. 순라가 활을 쏜다는 건 그러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일종의 치안을 유지하는 행위라 할 수 있죠. 즉, ‘도시’가 형성되는 데에는 공간적 구획만이 아니라 시간적 분배도 개입되는 것이고, 여기에서 도시를 통치하는 이념이 어떻게 형성돼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거죠.
저희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에도 이런 식의 구획과 분배, 이념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4시 편의점이 곳곳에 있다는 것, 어디에서도 이용 가능한 와이파이가 깔려 있다는 것은 단순히 ‘편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도 무언가를 소비할 수 있는 생활의 조건이 됩니다. 이런 걸 보면, 지금 서울이란 도시의 시공간에 나타나는 통치 이념은 고대와 매우 다른 독특함을 띠는 것 같은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이상 말하기가 쉽지 않네요. ㅋ; 재밌는 이야기일 것 같은데, 나중에 한 번 관련 책을 봐야겠어요.
통치자 칭기스 칸
<몽골비사>를 끝까지 읽었습니다. 칭기스 칸이 어떻게 죽는가에 관한 장면이 따로 나오지 않았는데, 이것도 뭔가 의미심장합니다. 일부러 누락한 걸까요, 아니면 기록할 만한 어떤 자료도 없었던 걸까요? 칭기스 칸의 무덤은 일부러 알려지지 않도록 했다고 하는데요. 죽는 그 순간에도 알려지지 않도록 할 만한 무엇이 있었던 건 아닐지 상상해 봅니다.
칭기스 칸의 업적 중 하나는 ‘몽골’이란 정체성을 만든 것이었죠. 그동안 피로 이어지고 맺어졌던 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모두 끊어내고, 그것을 ‘초원에 사는 유목민이라면 모두 몽골이다!’라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운 것이죠. 지난번에 읽은 부분에서는 이런 운동을 칭기스 칸뿐만 아니라 자모카도 했었다는 걸 볼 수 있었는데요.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는 칭기스 칸이 단순히 모두를 단순히 ‘몽골’로 환원시킨 게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모카를 이기고, ‘몽골’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칭기스 칸은 논공행상을 시행합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표현 중에, “~형제들이 모든 부족마다 흩어져 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 형제를 모으겠습니다!”, “그렇다면 ~ 형제를 모아 그대가 대대로 맡고 있도록 하라!”라는 대화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건 새로운 정통성을 보유한 집단을 만들어내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어떤 식으로든 각 부족마다 나름의 신화를 가지고 자신들이 어떻게 이곳에 살게 됐는지 설명하게 됐다면, 칭기스 칸의 허락하에 성(姓)을 공식적으로 보유하고, 집단을 만들게 되는 것이죠.
토론에서는 이것이 정주민의 통치 방식과 매우 비슷하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한나라의 건국 당시를 생각해봐도, 개국공신들에게는 봉토를 나눠주고 자기 성을 딴 가(家)를 이루도록 했죠. 칭기스 칸도 이와 비슷하게 그들의 성을 딴 집단을 만들도록 인정합니다. 다만 유목민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땅’을 부여하는 것보다 ‘사람’을 준다는 것에서 다릅니다. 그리고 아무리 고유한 집단을 형성했다고 해도, 개국공신들은 언제나 창건자에 예속된 존재들입니다. 칭기스 칸은 이를 나타내기 위해 자신의 친위대를 따로 만들고, 아무리 개국공신들이라 하더라도 친위대보다 높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포하죠. “밖에 있는 천호보다 나를 친위하는 자가 높다. 밖에 있는 백호, 십호들보다 나를 친위하는 자의 구종이 높다. 밖에 있는 천호들이 자신을 감히 나를 친위하는 자와 대등하다고 여겨 다투면 천호 되는 사람을 벌하도록 하라!” 칭기스 칸은 이런 식으로 새로운 집단 또한 철저하게 자신의 영향 아래 두려고 한 것이죠.
통치자로서 자신의 권위를 분명히 하려는 작업은 종교를 통합하려는 데에서도 나타납니다. 칭기스 칸은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고난 뒤, 자신을 대신 돌봐준 뭉릭을 마치 아버지처럼 따랐습니다. 그런데 당시 뭉릭에게는 일곱 아들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쿠쿠추’라는 가장 최고 직위에 있는 무당이 있었습니다. 이를 ‘탭 탱게리’라고 표현하는데요. 칭기스 칸이 ‘대칸’이 된 뒤에도 그의 신민들이 쿠쿠추 탭 탱게리에게 찾아가 복속되는 일이 잦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당시에 전사로서의 칭기스 칸과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쿠쿠추 사이에서 최종 권력을 누가 잡을 것인가에 관한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칭기스 칸이 쿠쿠추를 죽이는데, 이건 종교적 권위까지 흡수하는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쿠빌라이 칸이야말로 ‘제국의 통치자’라는 모습에 걸맞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읽으면서는 ‘종교와 정치를 통합’한다든지, ‘역참을 설치하면서 국토 개념’을 발명했다든지 등등 칭기스 칸이 연합 부족을 벗어난 제국의 기틀을 확실하게 다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공간에 대한 감각을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공간이라는 게 엄청 자본의 흐름에 안성맞춤이었구나 하는 걸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구요. 유목민들의 도시와 달력이 없는, 오로지 사람만 있는 시공간의 인식 방식도 흥미로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