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마이너 세계사 3학기도 7주차에 접어들었습니다. 공부할수록 몽골에 대해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배우며 호기심이 더해지고 있는데, 동시에 당나라를 비롯한 중국에 대해서도 그런 마음이 생기고 있습니다. 문제는, 기존에 계획했던 학기 마무리인 ‘정주민vs유목민의 토론’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둘의 생활양식이 매우 다를 거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계획했던 건데, 비교 가능할 정도로 ‘다르다’고 할 수가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칭기스 칸과 쿠빌라이 칸을 통해 유목민을 배우고 있지만, 이들은 ‘유목민’적인 것을 다르게 변형시킨 자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 유목적으로 보이지 않고 정주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기도 하죠. 물론 이렇게 단순하게 나눌 순 없지만, 어쨌든 이번 학기 마무리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아...
다음 시간에는 《하버드 중국사 당》은 끝까지, 잭 웨더포드의 책은 3부를 읽어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현주쌤께 부탁드릴게요!
사실 우리는 모두 형제!?
이전부터 확신에 가깝게 의심하던 것이지만, 이번에 확실하게 밝혀졌습니다. 한족(漢族)이란 민족 정체성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진나라 다음 전국을 통일한 한나라 때였으면 몰라도, (이때도 한족이란 개념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수나라, 당나라 때의 한족이란 정체성은 발명된 것입니다. 한족은 어떤 때는 핏줄로 이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문화적인 것으로 규정되기도 하는데요. 수나라와 당나라를 세운 집안들 모두 북부와 서부 변경의 스텝 지역의 민족들과 강력한 문화적 유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유대감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만 아니라 실제로 서로에게 섞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당나라 태종이 돌궐제국을 다스리고, 그들로부터 ‘칸’이란 지배자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도 유목민을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진나라나 한나라 같은 경우에는 과연 ‘제국(empire)’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제국’이란 게 무엇인지부터가 의심스러워집니다. 국가와 제국은 같은 걸까요? 진나라와 한나라는 분열되었던 중원을 통일하고, 사유와 온갖 생활양식을 단일화했습니다. 이른바 ‘표준’이라는 것을 만들었죠. 하지만 이것만으로 ‘제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반면에 당나라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이민족이라 할 만한 존재들과 계속해서 교류하고, 그들의 사유를 받아들이면서 경계를 확장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도시 구조에서부터 드러납니다.이방인들이 지낼 수 있도록 공간을 구획화했고, 그들의 사유이자 문화라 할 수 있는 불교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죠. 심지어 중국과 그동안 적대적이었던 유목민들마저도 포용하려고 했죠. 특히, 태종은 한족과 비한족 모두 공통적인 본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은 ‘천가한(천자이자 칸이란 뜻)’이 돼 안팎을 아우르는 지배자가 되겠다고 밝히기도 했죠. 야심일 수도 있지만, 이것은 질적으로 이전 중국인들의 사유에서 봤을 때 이질적인 부분입니다. 고대 중국 황제들에게 유목민은 야만인으로서 몰아내야 할 적이었을 뿐 정복하고 교화해야 할 대상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제국적인 것을 생각한다면, 질적인 측면에서 경계선의 확장과 연관돼야 하지 않을까요? 스텝 지대부터 다른 대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유와 문화를 담아내려 한 수나라, 당나라는 그런 점에서 매우 제국적인 면모를 보였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 두 나라의 무력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떠올리는 제국이라 부르기에 좀 부족한 감이 없진 않은데요. 하지만 제국적인 것을 생각할 때 무력보다 중요한 건 다양한 것들과 교류할 수 있는 광범위한 네트워크, 그것을 포용할 수 있는 비전이 아닌가 싶어요. 전에는 영국의 식민사업 떠올리면서 제국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폭력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건 제국과 강력한 무력을 동일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난민과 이민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지금 시대에, 우리는 더욱 제국적인 것을 생각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이 섞이는 여기는 중앙아시아
제국으로서의 몽골이 등장하기 전 중앙아시아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저희는 몽골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몽골 덕분에 중앙아시아의 문화들이 섞이는 연결망이 형성된 것처럼 얘길 했는데요. 하지만 사실 몽골 제국이 등장하기 전부터 중앙아시아는 다양한 사유가 섞이고 공존하는 실험실이었습니다. 당장 칭기스 칸을 도와줬던 케레이드족의 토오릴 옹 칸만 하더라도 기독교의 한 지파인 네스토리우스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죠. 그리고 《몽골비사》에 나오는 여러 표현들은 단순히 몽골 부족에 내려오던 전통적인 게 아니라 마니교적인 교의와 매우 흡사하다고 하죠. 예를 들어, 마니교의 사제처럼 영적 자문관의 의복을 ‘흰색’으로 규정한다든가, 몽골 부족의 신화적 잉태에 나오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남성’이라든가, 정화의 상징으로서의 ‘불’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마니교적인 것 외에도 위구르적인 사유도 칭기스 칸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보고 자란 것들이 위구르 전통의 사유와 매우 흡사하다고 하죠. 정확하게 칭기스 칸이 어떤 것들에 영향받았는지 말할 순 없어도, 적어도 여러 대륙의 사유가 칭기스 칸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에 떠돌고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의 사유는 그것이 유래된 곳의 사유와 매우 달랐다고 합니다. 1254년, 뭉케 칸의 궁정에 프랑스 사절 루브룩이 왔었는데, 반(反) 무슬림 동맹으로 몽골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죠. 이들에게 몽골은 ‘페르시아와 중국 사이에 존재한다고 전해지던 기독교 공동체’였는데요. 그런데 이들이 보기에, 몽골의 기독교는 너무나도 불경했습니다. 신의 아들인 예수를 믿고 있는 유럽의 기독교와 달리, 몽골의 기독교는 ‘신은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우상 숭배를 일체 금지했던 유럽과 달리, 소중한 사람과을 추모하기 위해 상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기존의 애니미즘, 토테미즘이 기독교적 교리와 섞이면서 변형된 게 유럽인의 시각에서는 매우 기괴하게 보였던 것이죠.
이번에 중앙아시아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다양한 문화가 섞이는 곳이었는지를 알게 되니, 칭기스 칸이란 존재의 필연성에 대해 조금은 이해하게 됐습니다. 유목민의 전통 속에서 나올 수 없는 존재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유목민의 전통 자체가 무수한 변형의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칭기스 칸의 독특함, 기존의 샤머니즘을 개인의 인격으로 흡수한 것 등의 파격적인 행보 또한 유목적인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당 제국 역사를 배우면서 정주 제국의 역사에서도 유목 제국과 마찬가지로 이질적인 것들을 충분히 받아들였으며 융합되고, 그러면서 변화된 상황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 속에 있었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당 제국을 공부하기 전 정주 제국의 이미지는 차이를 소거하고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단순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역사를 배우면서 정주 문명에도, 유목 문명에도 정주적인 것과 유목적인 것이 혼재되어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이 두 문명 간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공부하면서 차차 정리해나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