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이어서 저희는 잭 웨더포드의 <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를 읽었습니다. 이전 후기에서 말씀드렸듯이, 저자는 “어떻게 위대한 정복자가 우리에게 종교적 자유를 주었는가?”라는 일관된 질문을 갖고 칭기스 칸의 일대기를 서술합니다. 종교의 자유라는 키워드로 칭기스 칸의 삶을 조명하고 있어서, 이전 몽골 역사 책들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내용이 많아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칭기스 칸이 정복지를 통치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아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칭기스 칸의 몽골 군대는 대략 10만 명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복지가 늘어나면서 통치해야 할 백성들의 수는 수천만 명이 됩니다. 몽골 군에 비해서 통치해야 할 인구가 너무 많은데, 이러한 상황을 칭기스 칸은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칭기스 칸은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정복지에 군사 중 일부를 주둔하는 방법, 정복지 귀족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아내고 떠나는 방법 등등. 하지만 위의 두 가지 방법은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전자는 군사력에 손실이 생기고, 후자는 돌아서면 반란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칭기스 칸은 군사를 주둔할 수도 없고, 충성을 믿고 떠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합니다. 칭기스 칸은 어떻게 통치 할 수 있을지 몰라서 우선 정복지에 반란이 일어나면, 반군을 모조리 처형하여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공포심을 주는 정책을 펼칩니다. 하지만 금방 그러한 공포 정치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지합니다. 칭기스 칸은 잔혹한 정치가 아닌 다른 방법을 어디서 찾았을까요?
우선, 칭기스 칸은 탐욕과 착복을 일삼는 전형적인 귀족/엘리트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에게 나라를 맡기면, 기회가 날 때마다 반란을 일으킬 것이 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대체하여 행정 업무를 하는 집단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칭기스 칸의 눈에 들어온 사람들이 바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장점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교육을 많이 받았고, 문자에 익숙했으며, 성문법을 해석하고 시행하는 일에 능숙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반 대중들과 소통하고 지도하고, 원칙과 이상에 헌신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칭기스 칸은 그들에게 정복지를 통치하도록 맡깁니다. 이러한 칭기스 칸의 정책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안정적으로 통치를 했고, 그 덕분에 정복지는 안정되고, 군대는 마음껏 다른 영토를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미뤄 봤을 때, 칭기스 칸이 종교계 인사들을 널리 만나고, 다양한 종교를 포용하는 정책을 펼친 이유에는 구체적인 정치적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원인으로는 칭기스 칸의 종교관을 말할 수 있습니다. 칭기스 칸에게는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종교는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의 몽골 제국이 있지만 그 안에 다양한 국가가 있는 것처럼, 종교도 하나의 보편 종교가 있지만 모두가 다르게 표현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몽골 제국이 서로 다른 언어, 다양한 관습을 지닌 사람을 정부를 이루고 있듯이, 제국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권리를 주었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어떻게 위대한 정복자가 우리에게 종교적 자유를 주었는가?’에 대한 힌트를 얻어봅니다.
당 제국과 종교
이번 주 <하버드 중국사(당)>에서도 칭기스 칸과 더불어 ‘종교’ 파트를 읽었습니다. 당 왕조의 시기에는 제도 종교인 도교와 불교의 발전이 중국 역사에서 최고 정점을 찍었던 시대로 유명합니다. 당 제국의 국가 종교는 ‘도교’였습니다. 안티오이디푸스에 따르면 제국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모든 관계를 일자로 초코드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 제국은 건국 초기, <도덕경>의 저자로 추정되는 ‘노자’를 신격화하고, 초월적 존재를 중심으로 주변국들을 결집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당 제국 당시 도교는 여성들이 피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었습니다. “가난한 어린 여자아이들이 질병이나 기근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 부모들에 의해서 도관에” 보내졌고, “강제로 시집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임시로 여관”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당대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여관으로 활약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대에 공식적으로는 도교가 최상위의 종교였지만, 불교는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이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중국 사회 내에 뿌리내린 당대 불교는 ‘중국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중앙아시아나 인도와 분리되고 중국 불교가 그 자신만의 불교적 성지를 조성하고 중국 자체에서 새로운 토착적인 지적, 의례적 불교 전통이 출현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당대 불교의 흥미로운 지점은 여러 계층이 다양한 방식으로 불교에 접속했다는 점입니다. 사회 최상부층(황제와 황후)은 ‘영적인 무기’로 제사, 의례에 이용됐고. 여행자들과 과거 시험 응시생들에게는 숙소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사찰들은 병자들을 위한 진료소나 병원, 배고픈 자들을 위한 식당,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 노인을 위한 안식처 그리고 자선 활동을 제공”했습니다. 이상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잭 웨더포드의 <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 4부, <말 위의 개척자, 황금 천막의 제국> 서론, 1장, 2장을 읽어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혜원샘이 준비해주시기로 했습니다!
확실히 당나라와 몽골을 보면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읽고 있는 '전제 군주 사회'가 많이 생각났습니다. (전날 세미나를 해서 그런가...ㅋㅋ ) 그러나 똑같은 제국이면서도 확실히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에서, 이게 정주민과 유목민의 차이인가 싶기도 했어요. 정주민인 당나라 제국에서는 자신들의 중심 종교를 도교로 정했고, 노자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동시에 노자를 신성시하면서 자신들의 피를 신성하게 만들었죠. 반면에 유목민에게는 중심 종교 같은 건 없었죠. 누가 뭘 믿든 간에 크게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언제든지 종교를 바꿀 수 있도록 '우리가 믿는 건 결국 다 똑같다'는 논리를 만들었죠. 중심 종교를 설정할 필요성, 종교와의 관계에서도 유목과 정주의 차이가 나타나는가 싶기도 했어요. 여러모로 공부할수록 흥미진진합니다!
확실히 당나라와 몽골을 보면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읽고 있는 '전제 군주 사회'가 많이 생각났습니다. (전날 세미나를 해서 그런가...ㅋㅋ ) 그러나 똑같은 제국이면서도 확실히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에서, 이게 정주민과 유목민의 차이인가 싶기도 했어요. 정주민인 당나라 제국에서는 자신들의 중심 종교를 도교로 정했고, 노자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동시에 노자를 신성시하면서 자신들의 피를 신성하게 만들었죠. 반면에 유목민에게는 중심 종교 같은 건 없었죠. 누가 뭘 믿든 간에 크게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언제든지 종교를 바꿀 수 있도록 '우리가 믿는 건 결국 다 똑같다'는 논리를 만들었죠. 중심 종교를 설정할 필요성, 종교와의 관계에서도 유목과 정주의 차이가 나타나는가 싶기도 했어요. 여러모로 공부할수록 흥미진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