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저희는 <원앙 조조 열전>을 재밌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원앙 조조 열전>에는 황제에게 간언(諫言)을 잘하는 인물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간언은 신하가 황제의 언행을 문제 삼고, 정치적 선택을 문제 삼아 말로서 개입하는 것입니다. 간언하는 행동이 중요한 것은 강한 권력자(황제)도 한낱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언제나 공명정대할 수 없습니다. 황제 또한 사람이기에 신하의 행동에 대해 과한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사사로운 관계 앞에서 공정함을 잃기도 하고, 주변에서 아첨하는 인물을 못 알아보기도 합니다. 간언은 황제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도록 밝혀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번 편에 나온 원앙과 조조가 그런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원앙은 강직한 성품으로 간언을 일삼은 인물입니다. 황제의 잘못을 발견하면 곧바로 지적하고, 또 다른 신하들의 행동에서 문제점을 발견하면 곧장 황제에게 전달합니다. 그렇기에 ‘원앙’은 주변 사람들에게 ‘원망’을 많이 샀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의 직언은 강후를 승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환관 조동을 울리기도 합니다. 결국에는 황제 또한 원앙을 곁에 두기 부담스러웠는지 궁궐 바깥으로 내보냅니다. 그리고 결국 원앙을 원망했던 인물이 자객을 이용해서 그를 죽이게 됩니다. 조조 또한 마찬가지로 강직하고 냉철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원앙과 마찬가지로 황제에게 간언을 하고, 많은 사람의 원망을 사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저희는 여기서 정치를 한다는 게 참 어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간언을 하지 않으면, 황제는 잘못된 방향(치우친 선택)으로 나아가기 쉽습니다. 그런데 또 간언을 하게 되면, 간언한 자는 누군가에게 원망을 사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간언을 하는 신하들 간에도 서로 의견이 달라, 옳음과 옳음이 부딪히고 서로를 죽이려 듭니다. 그러면 도대체 간언은 언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에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때를 잘 읽고 적절한 타이밍, 적절한 분위기에 적절한 강도로 간언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렇게 세세하게 고려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세미나를 하면서 간언하는 자가 간언을 적절하게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간언을 잘 듣는 황제 또한 중요하겠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한 나라를 통일한 유방과 그렇지 못한 항우가 갈라지는 지점이 있다면, 간언하는 신하의 말을 잘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 의 차이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저희는 잘 듣는다는 게 무엇인지 고민해보았습니다. 잘 듣는다는 게 모든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인가? 간언하는 자들 간에도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재 우리 삶에서도 매체를 통해 수많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데 그 속에서 무엇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계속 가져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칭기스 칸은 악마인가? 영웅인가?
이번 주에 읽은 [제5절] 1211~1218과 [제6절] 1219~1227에서는 칭기스 칸이 본격적으로 정복 활동을 시작하고,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까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칭기스 칸의 활동력은 대단합니다. 40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죽을 때까지 쉼 없이 세계를 정복하고 다녔습니다. 말 위에서 세계를 평정한 전사! 멋있습니다. 칭기스 칸이 전쟁할 때는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한편으론 자비롭고, 한편으론 잔혹한 원칙이었는데요. 그것은 복속하는 자의 생명과 재산은 안전하게 보장하지만, 거역하는 자는 죽음뿐이라는 겁니다. 저희가 이번에 읽는 책 ‘라시드 앗 딘’이 묘사한 칭기스 칸의 장면을 보면, 그의 잔혹함이 잘 드러납니다^^ 한 번 보시죠. “[그곳을] 사막으로 만들어 이후로는 건물을 짓지 말고 어떤 인간도 그곳에 살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363) 칭기스 칸은 자신을 거역하는 지역은 황무지(사막)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 아니 사물까지 전부 없애버립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왜 서양인들에게 칭기스 칸은 악마의 이미지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칭기스 칸은 누군가에게는 자비로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자비한 존재였습니다. 저희는 이러한 칭기스 칸의 ‘잔혹함’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이리저리 헤맸던 것 같습니다. 전쟁은 잔혹함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고, 소수의 몽골 민족으로 넓은 영토를 관리하기에 어려움이 있기에 복속하지 않는 자들은 초토화시킨 게 아닐까 이야기 나눴습니다. 그리고 유목민에게는 정착하고, 땅을 넓혀서, 소유를 축적하겠다는 생각이 없기에 어떤 지역을 초토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칭기스 칸의 정복 활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는 공부하면서 조금 더 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칭기스 칸의 마지막을 그리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칭기스 칸은 아들들을 모아두고 유언을 합니다. “너희들은 각자의 왕국과 울루스로 가라. 왜냐하면 왕국이 소홀히 방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집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으며, 나의 명성과 영예를 위해 [저승으로] 가겠노라.”(384) 편안한 집 안이 아니라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칭기스 칸의 말에는 평생을 거리에서 거칠게 살아온 그의 삶이 녹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평생을 이동하며 살아가는 유목민들에게 집이란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이번 주 후기는 여기까지구요! 다음 시간에는 〈오왕비열전〉, 〈위기무안후열전〉, 〈한장유열전〉과 《칭기스 칸 기》 끝까지 읽어 오시면 됩니다^^! 목요일에 만나요-!
이번 학기에 미는 거지만, 확실히 간언 혹은 고대 중국의 말하기를 철학하는 일요일에 들었던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드로스 사이의 대화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ㅋ 죽일 수 있는 권력의 수직적 구조가 간언 하나가 개입하는 순간 완전히 다르게 펼쳐지죠. 황제로서 올바르게 행동하려면 신하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데, 이때 간언하는 신하는 올바른 황제의 행동에 대한 앎을 소유하고 있는자고 반면에 황제는 그러한 앎을 결여한 자의 수직적 관계로 역전됩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하면, 그건 푸코의 주체 해석학을 읽으면서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ㅋㅋ
그리고 칭기스 칸에 대한 '악마' 이미지는 아무래도 너무 서양인들을 피해자 입장에서 서술된 게 아닌가 싶어요. 저희가 역사를 배우면 배울수록 일방적 피해자와 가해자 구도가 점점 세워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서양인들 자신도 '악마' 같은 짓을 벌여왔을 텐데, 뭔가 칭기스 칸에 대한 지나친 이미지화가 진행되는 것 같단 말이죠? 물론 칭기스 칸의 학살을 미화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유목민들에게는 칭기스 칸의 정복이 단순히 학살이기만 한 것 같진 않았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서 나누지 못했는데, 다음 시간에는 한 번 얘기해보면 좋겠군요!
깔끔한 후기 잘 봤어요. 덕분에 복습 잘 하고 갑니당.
이번 학기에 미는 거지만, 확실히 간언 혹은 고대 중국의 말하기를 철학하는 일요일에 들었던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드로스 사이의 대화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ㅋ 죽일 수 있는 권력의 수직적 구조가 간언 하나가 개입하는 순간 완전히 다르게 펼쳐지죠. 황제로서 올바르게 행동하려면 신하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데, 이때 간언하는 신하는 올바른 황제의 행동에 대한 앎을 소유하고 있는자고 반면에 황제는 그러한 앎을 결여한 자의 수직적 관계로 역전됩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하면, 그건 푸코의 주체 해석학을 읽으면서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ㅋㅋ
그리고 칭기스 칸에 대한 '악마' 이미지는 아무래도 너무 서양인들을 피해자 입장에서 서술된 게 아닌가 싶어요. 저희가 역사를 배우면 배울수록 일방적 피해자와 가해자 구도가 점점 세워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서양인들 자신도 '악마' 같은 짓을 벌여왔을 텐데, 뭔가 칭기스 칸에 대한 지나친 이미지화가 진행되는 것 같단 말이죠? 물론 칭기스 칸의 학살을 미화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유목민들에게는 칭기스 칸의 정복이 단순히 학살이기만 한 것 같진 않았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서 나누지 못했는데, 다음 시간에는 한 번 얘기해보면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