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시드 앗 딘의 <칭기스 칸 기>를 다 읽었습니다!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죠. 어려운 개념이 등장한 건 아니지만, 여러 사건이 무미건조하게 나열돼 있어서 뭘 주목해야 할지 좀 막막했죠. ㅋ 그래도 이슬람적인 관점에서 봤기 때문에 칭기스 칸의 독특함이 살아난 부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가령, 이슬람의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처럼 40살 이후에 전성기를 맞이했다거나, 주변 유목 부족들의 피로 얽힌 은원관계를 끊고 ‘몽골’이라는 새로운 유대관계를 형성했다는 것 등이 그랬죠. 제국을 건설하게 된 계기도 야욕이 있었다기보다는 식량 문제 혹은 배신자 처단 등 때문이었죠. 여러모로 같이 생각하게 된 지점들이 있었습니다. 다음 학기에도 칭기스 칸을 공부할 예정이니, 그의 어떤 점에 주목하면 좋을지 계속 생각해보죠!
다음 시간에는 〈이장군열전〉, 〈흉노열전〉과 《수성의 전략간, 쿠빌라이 칸》 1~2장을 읽어 옵니다. 간식은 은주쌤께 부탁드릴게요!
“오초칠국의 난이 왜 일어났냐면…”, 사건사를 넘어서는 역사
오초칠국의 난은 한나라가 세워진 이후에 일어난 최초의 동성 황족 간의 내전입니다. 왜 오초칠국이냐하면, 오나라 왕 유비가 주축이 되어 초, 교서, 교동, 제남, 치천, 조나라 7개의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인데요. 이 사건을 계기로 한나라에 제후에게 영토를 나눠주는 봉건제 대신 황제가 뽑은 관리를 보내고 다스리게 하는 군현제가 적극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다고 하죠. 이후 중국의 역사에서 봤을 때도 큰 획을 그은 사건이라 할 수 있는데요. 저희들은 종종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들에 대해 그 사건이 일어난 원인을 질문합니다. 오초칠국의 난에 대해서도 그것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인과를 따지려고 하죠.
그런데 사마천은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인물의 관점마다 다르게 서술합니다. 즉, 실체로서 존재하는 오초칠국의 난 같은 건 없습니다. 가령, 원앙조조열전에서는 일견 조조의 제후 봉토 삭감 정책이 문제였던 것처럼 서술했지만, 이번에 읽은 오왕비열전에서는 대략 30년 전에 있었던 오나라 태자가 한나라 태자에게 맞아 죽은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설명을 시작하죠. 이뿐만 아니라 오초칠국의 난에 참여했던 다른 6개 제후국의 사정도 있을 겁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고려하다 보면,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는 한나라 건국, 우주의 탄생까지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원인으로 포함되겠죠. 사마천은 원인이 다양하게 규정될 수 있는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다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 같진 않습니다.
원앙조조열전에서도 그렇고, 오왕비열전에서도 그렇고 사마천은 인물들 간의 불화가 어떻게 심화되는지를 잘 묘사합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들일수록 그에 상응하는 거창한 원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마천이 보여준 건 아주 사소한 기분 나쁜 일들의 쌓임이었죠. 물론 아들이 죽은 걸 두고 사소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이후로 한나라에 대한 오나라의 태도가 달라졌고, 그것을 감지한 한나라도 오나라의 달라진 태도에 대해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하죠. 오나라가 한나라에 대해 난을 일으키고, 한나라가 오나라 왕에 대해 자비 없이 굴게 된 데에는 꽤나 많은 앙금이 쌓였던 거죠. 사마천은 이렇게 감정적인 것들이 쌓이고 쌓여 나중에 역사적 사건으로 터지게 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역사에서 대의명분 같은 것 이전에 사람의 마음에 주목한다는 건 새로운 관점인 것 같아요. 아직 이 부분은 잘 정되지는 않는데, 역사의 동력을 ‘마음’이라고 지목하는 건 뭔가 중국적인 질문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럴 때 기존의 역사에서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끄집어낼 수 있을 것 같고... 그렇습니다. 이때 마음은 무엇이고, 마음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등등을 질문해야겠지만요. 흐음... 공부할 게 많습니다!
칭기스 칸을 만든 여성들, 혹시 중국의 영향...!?
칭기스 칸은 어떻게 칭기스 칸(가장 위대한 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카리스마나 무력은 물론이고 지혜, 포용력 등 개인의 뛰어난 능력도 한몫했을 테고, 시대적인 맥락과 운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겠죠. 하지만 저는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칭기스 칸에게 조언을 해준 두 사람의 도움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왼쪽은 칭기스 칸의 아내 보르테의 초상화. 오른쪽은 영화 <몽골>에 나온 보르테. 어머니 호엘룬의 사진은 마땅한 걸 못 찾겠네요.@_@)
저희가 읽은 부분에서 잘 드러나진 않았지만, 칭기스 칸에게는 두 명의 조력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칭기스 칸의 어머니 후엘룬과 아내 보르테인데요. 어머니 후엘룬은 남편 이수게이가 죽고 떠나는 일부 부하들을 휘어잡아 다시 데려오기도 했고, 아내 보르테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조언을 함으로써 칭기스 칸으로 하여금 보다 현명하게 생각하도록 도왔죠. 그래선지 칭기스 칸은 단순히 여성을 탈취해야 할 재산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게 칭기스 칸만의 생각인지 아니면 당시 통용되었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칭기스 칸에게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칭기스 칸이 훌륭했던 것만큼 그의 옆에 온 두 명의 여성도 칭기스 칸 못지않게 훌륭했던 것 같아요. 칭기스 칸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듯(?)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남편은 스스로 모든 곳에 모습을 보이는 태양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아내는 남편이 사냥이나 전쟁하러 나갔을 때 집을 정돈하고 장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신이나 손님이 집에 머물면, 모든 것이 정돈된 것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좋은 음식을 만들어 손님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편의 좋은 이름이 퍼지고 그의 명성이 높아져, 집회나 모임에서 마치 산처럼 고개를 쳐들 수 있어야 한다. 남편의 미덕은 아내의 미덕을 통해서 가능하다. 만일 아내가 나쁘고 못된 사람이라면, 그로 말미암아 남편도 무도하고 엉터리라고 알려질 것이다.”
남편이 밖에서 사냥과 전쟁을 담당한다면, 아내는 집안을 정돈함으로써 손님을 만족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죠. 그리고 남편이 밖에서 명성을 높일 수 있는 건 안에서 아내가 미덕을 발휘했기 때문이죠. 마치 풍화가인괘(風火家人卦)를 연상시키는 듯한 말인데요. 저흰 이걸 보면서 유목민의 사고가 중국 유교적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그 당시에 널리 퍼졌던 사고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많은 신화(?)를 보면, 여성의 역할이 중요했으니까, 아마도 그런 자장이 공유된 건가 싶기도 했고요. 한편으로는, 근거는 없지만, 유목민의 독특한 기질인 잘 배우고 섞이는 능력이 그간 알게 모르게 발휘되어 중국인의 사고를 배운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어쨌든 칭기스 칸은 남성으로서 자신이 미처 발휘하지 못한 부분을 여성인 어머니와 아내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했던 것 같고, 이게 다른 부족들을 집어삼킬 수 있었던 여러 요인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인재 통치의 또 다른 면(?)을 본 것 같습니다. 흔히 뛰어난 통치자의 자질로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것을 꼽는데요. 그게 집안에까지 적용될 수 있다는 건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몽골에서는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정주민의 정치와 비교하면 재밌을 것 같기도 하네요.
오초칠국 난에 대한 다층적인 사마천의 시선이 흥미로윘습니다. 또 사마천과 라시드 앗 딘의 역사 서술 방식의 차이도 재미있었는데요, 라시드는 (칭기스 칸 기) 를 코란 서술 방식으로, 사마천은 (사기)를 통시적 공시적 서술 방식으로 작성한 것이 차이인 것 같습니다. 사마천의 서술 방식에 감탄하게 됩니다.
역사적 사건의 원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역사에서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습니다! <사기>에서는 확실히 오초칠국의 난이 어떻게 일어났을까에 대해 사마천은 나름의 원인을 규명해보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 같아요. 아들의 죽음, 오나라의 재물 축적, 오왕의 기질 등등. 역사적 사건에는 수많은 원인이 있을 텐데 그것을 어떻게 봐야할지 함께 공부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