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을 부분까지 해서 사마천의 당대 역사 기록이 일단락됐습니다. 이 다음부터는 주로 한나라 주변의 여러 이민족들의 이야기가 나오고요. 그 중에는 조선도 있습니다. 이번에 쿠빌라이 칸이 고려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한나라는 조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지 조심히 읽어보죠. 생각과 다르(?)더라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시고요. ㅋㅋ
다음 시간에는 〈남월열전〉, 〈동월열전〉, 〈조선열전〉, 〈서남이열전〉, 《쿠빌라이 칸》 3~4장을 읽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현주쌤께 부탁드릴게요~
흉노 정벌에서 내정(內政)으로
열전도 나름대로 흐름이 있습니다. 막연히 여러 인물들의 삶을 나열했다기보다 하나의 시대를 수많은 인물들의 관점으로 동시적으로 포착합니다. 특히 지난번에 읽었던 〈이장군열전〉, 〈흉노열전〉부터 이번에 읽은 것까지를 보면, 흉노에 대한 한나라의 태도가 어땠는지 잘 드러납니다. 사마천은 당시 한나라의 흉노 정벌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면서 어떻게 진행되고 마무리됐는지는 보여줍니다. 이번에 읽은 〈위장군표기열전〉과 〈평진후주보열전〉은 흉노 토벌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위장군표기열전〉은 흉노를 토벌하는 데 매우 뛰어났던 대장군 위청과 곽거병에 대한 이야기고, 〈평진후주보열전〉은 한나라에 매우 핵심적인 제도를 설립했던 공손홍과 주보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각 개인에 대한 인물 평가뿐만 아니라 이 두 개의 열전을 통해 한나라가 흉노 토벌에서 내정(內政)에 신경 쓰기 시작한 시대적 전환을 함께 볼 수 있었습니다.
위청과 곽거병, 공손홍과 주보언의 출세는 한나라의 욕망이 어디를 향하느냐를 보여주는 표지였습니다. 위청과 곽거병은 미천한 출신이지만, 누구도 범접 불가능한 공적을 세움으로써 제후의 반열에 오릅니다. 그런데 이 둘이 뛰어난 장수로 기용되고 출세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재능 덕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무재가 활약할 수 있었던 시대적 조건, 흉노를 토벌하려는 한무제의 욕망 덕분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시대를 잘 타고난 것이죠. 애초에 한나라에서 적극적으로 흉노와 전투를 하지 않았다면, 이들이 몽골을 넘어 바이칼호 근처까지 흉노를 추격할 일도 없었고, 공적을 세워서 벼락출세할 기회도 없었으니까요. 몸종에 가까운 취급을 받던 서자들이지만, 사마천은 사람이 때를 잘 만나면 제후도 될 수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계급의 장벽이 매우 높았던 시대를 살았음에도 사마천은 역사를 통해 유연한 시야를 갖게 된 것 같아요.
비슷하게, 공손홍과 주보언도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승상이 돼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죠. 이들이 승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학식 덕분이긴 하지만, 더 이상 흉노 토벌이 아닌 내정(內政)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무제의 변심 덕이기도 했습니다. 위청과 곽거병이 죽고, 흉노를 토벌할 수 있는 장군들이 사라지면서 무제의 욕망도 한풀 꺾였죠. 반고는 이를 한나라의 여름이 드디어 저물었다고 표현했는데, 확실히 그것도 맞는 것 같아요. 더 이상 바깥으로 뻗어나가기보다 내부를 다스리기 시작하니까요. 무제가 더 이상 흉노를 토벌하면 안 된다는 주보언과 서락, 엄안의 상소문에 대해 감탄한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았죠.
분열, 욕망과 이해관계의 난립
칭기스칸이 세웠던 몽골 제국은 쿠빌라이칸 때로 오면서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이 분열이 매우 자연스럽게 보였어요. 쿠빌라이칸이 칭기스칸보다 무능해서 분열이 일어났다기보다 이미 서로가 같은 제국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해졌습니다. 칭기스 칸의 아들들은 각자 칭기스 칸으로부터 지역을 나눠받았는데, 그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그곳의 문화와 섞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특히 민심을 사로잡으려면 최소 그곳에 지배적인 종교와 섞여야 했죠. 그런데 이 종교적으로 섞이는 과정에서 서로의 가치관이 조금씩 달라지고, 쿠빌라이칸 때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양립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나게 됩니다. 실제로 쿠빌라이칸은 정통 몽골 귀족들과 중국인들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는, 그러나 쉽게 만족시킬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책에서는 쿠빌라이칸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쿠빌라이의 주요한 적대 세력은, 그가 중국과 일체감을 보인다고 의심하는 몽골의 보수주의자들과 이방인의 통치를 혐오하는 중국 본토인들이었다. 그가 어떤 정책을 택하든 이 두 그룹 가운데 한쪽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양족의 비위를 모두 맞출 수는 없었다.”(103)
이 이야기를 확장하면, 중국 문화에 관용적이었던 쿠빌라이칸은 항상 다른 몽골 귀족들로부터 ‘정통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들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릭 부케, 카이두와의 싸움이 그걸 증명하죠. 이들은 상대적으로 몽골 정통 보수주의자로 분류되는데요. 쿠빌라이칸이 중국 문화에 물들어 몽골의 정체성을 잃고 있다는 회의감이 든 세력은 모두 이 두 사람에게 모였고, 두 사람은 그 세력을 바탕으로 쿠빌라이칸과의 싸움을 전개했죠.
그런데 사실 문제는 이보다 더 복잡했습니다. 단지 정통과 급진 세력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온갖 세력들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던 훌레구 같은 경우에는 영토가 닿아있던 주치 울루스의 칸 베르케와 자주 영토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훌레구가 쿠빌라이칸에게 붙자 베르케는 상대 세력인 아릭 부케에 붙었죠. 이런 식으로 종교적 갈등, 영토 분쟁 등의 문제와 함께 각 세력에 여러 파벌들이 붙거나 떨어졌습니다. 애초에 각자 맡은 지역이 너무나도 다양하다 보니, 어쩌면 이 분열은 몽골 제국의 탄생과 함께 예정된 사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나라를 공부하다 보니, 진나라에 대한 관심이 증폭됩니다. 진나라는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한 지 20여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는데, 그 원인이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주나라는 너무 약해서 천하를 잃었고, 진나라는 너무 강해서 천하를 잃었다고 사마천은 말합니다. 시대 변화에 따라 강약을 조절하지 못하고 전쟁을 지나치게 일삼았기 때문에 진나라가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흉노를 토벌하는 대신 내정에 관심을 갖게 된 한무제는 때를 읽었고 강약을 조절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 사마천과 함께하는 역사 공부는 흥미진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