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사기 열전>은 흉노 열전에 이어서 한(漢) 제국의 외부(주변)인 남월 열전, 동월 열전, 조선 열전, 서남이 열전을 읽었습니다. 저희는 주로 사마천이 '주변적인 것을 어떻게 사유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한(漢) 제국에 포섭되지는 않지만, 한(漢) 제국을 둘러싸고 있는 국가들을 사마천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사마천의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희에게 주변적인 것은 어떤 이미지일까요? 저는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서양(중심적인 것) 주변에 있는 국가는 저희에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아프리카의 역사, 중동의 역사, 중앙아시아의 역사 등등. 저희는 그 공간에서 어떤 기질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고, 어떤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왔고, 또 현재에는 그 공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혹 알더라도 거칠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주변적인 것'을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너무 쉽게 문명/야만, 인간/비인간, 중심/변방으로 이분화하고 배제하거나 적대시합니다.
그런데 사마천은 주변을 ‘중심적이지 않은 미개한 곳’으로 퉁치지 않습니다.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뚜렷하게 긋기보다 중심과 주변이 얼마나 섞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서로의 역사에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줍니다. 동해왕은 오초칠국의 난 당시, 오나라 왕 유비를 따랐지만, 오나라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곧바로 배신하여 그를 죽이면서 한(漢) 제국의 정치적 상황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고 남월은 남쪽 변방에 위치하여 더위와 습기, 그리고 전염병 때문에 한(漢) 제국이 점령하기 어려운 땅이었습니다. 그 공간의 특수함 덕분에 한(漢) 제국을 괴롭힐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또 완전히 고립된 땅은 아니었습니다. 남월은 한(漢)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태자를 한나라로 보내고, 또 그곳에서 배우고 익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태자는 한나라의 여인을 만나고, 두 사람이 다시 남월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중심과 주변은 서로 침범하고, 서로 융합되고, 또 새로운 걸 창조하는 관계였습니다. 사마천은 이렇게 주변적인 것을 단순히 야만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중심적인 것과 상호 교류하며 변화를 일으키는 모습들을 포착합니다.
(어마무시한 원나라 땅)
중국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이번 주에는 쿠빌라이 칸이 제국을 어떻게 통치했는지, 그 구체적인 이야기를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통치자로서의 쿠빌라이 칸은 위치가 상당히 애매했습니다. 중국의 정주 문명을 기반으로 통치해야 한다는 현실 조건이 있었고, 그렇다고 중국의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몽골 민족의 정체성과 가치를 지킬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균형이 어긋나게 된다면, 중국 백성들에게 외면받거나 몽골 민족에게 외면받을 위험이 있었습니다. 저자는 중국을 통치해야 하는 몽골인, 쿠빌라이 칸에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한 번 보시죠!
“유학자들은 몽골 황제들이 자신들의 의례와 행동 규범을 무시하거나 철폐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덜 알려진 종교들(예를 들어 이슬람교)은 몽골인들이 보이는 태도에 불안해했다. 더욱이 몽골인과 중국인 군인들의 운명은 불확실했다. 이 두 개의 엄청나게 다른 군대는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군대는 전통적인 몽골 사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까?”(p. 202)
쿠빌라이 칸이 중국을 통치할 때 만난 ‘엄중한 문제’는 그 밖에도 많은 것이 있었습니다. 오랜 전쟁(몽골 vs 금나라)으로 황폐해진 ‘북중국’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농민과 유목민 사이의 질서는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 쿠빌라이 칸은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는(납세 제도 수정, 과도한 부역 제한) 농업 정책을 펼치고, 또 유목민들의 가축이 농지를 돌아다니게 하는 걸 금지하는 정책을 냅니다. 확실히, 쿠빌라이 칸은 중국 농민들을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쿠빌라이 집권 초기에는 착취와 압제를 일삼는 관료들의 행태를 저지하고, 중국 신민의 복지와 그가 통치하고자 했던 영토의 경제적 회생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쿠빌라이 카-안!)
정주민과 유목민의 차이
<쿠빌라이 칸>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상인 계급’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정주민의 삶에서 상인은 전통적으로 “기생적이고 교활하며 탐욕스러운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계산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태도가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쿠빌라이는 상인에 대한 편견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상인에게 높은 지위를 부여했고, 그 덕분에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 중동 · 페르시아”에 이르는 교역이 아주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쿠빌라이 칸은 제도적으로 상인들의 무역을 보호하고 장려했습니다. 전국적인 범위에서 지폐 사용을 추진했고, 교통 시스템도 개선했습니다. “쿠빌라이의 통치 말기까지 중국에 1400개 이상의 역참이 설치되었으며, 말 5만 마리, 수소 8400마리, 노새 6700마리, 마차 4000대, 배 6000척, 개 200마리, 양 1150마리가 배속되어 있었다. 곳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긴 했지만, 역참은 대개 방문객을 위한 숙소, 취사 시설, 거실, 동물용 울타리, 곡물 저장고를 갖추고 있었다.” (p. 214) 그리고 이와 함께 의학의 교류, 과학의 발전, 지도 제작 기술의 발전이 왕성해졌습니다.
저희는 상인에 대한 두 가지 다른 태도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상인은 땅과 땅, 국가와 국가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정주민의 생활 방식에서는 타자와 섞이는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오는 상인 집단과 섞이는 게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을 거 같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하지만 유목민은 언제나 유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외부와 마주치고, 섞이는 경험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것들과 섞이는 데에 부담이 적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상인의 활동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상으로 후기는 마무리하구요! 다음 주에는 <사기열전>은 사마상여열전, 회남형산열, 대원열전, 그리고 <쿠빌라이 칸>은 7장, 8장을 읽어오시면 됩니다! 10주차 열전-쓰기 파이팅!
우리는 주변적인 것을 열등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사마천은 주변을 '미개한 곳’으로 퉁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왜 우린 중심을 중시하고 주변을 무시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 중심의 기준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자본화된 토대일 수도 있고 그래서 황폐해진 곳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지도와 함께 읽는 후기는 한나라와 그 주변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쿠빌라이처럼 경계인으로서 중국을 통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느껴보고자 합니다. 또 쿠빌라이 칸의 모습도 '선명하게' 볼 수 있어 눈 호강을 하고 갑니다.
박규창
2023-07-05 11:13
정주민에게, 특히 인과 의, 효 같은 것을 중시하는 한나라에서 '사농공상'은 엄격한 위계질서, 사회적 평가가 전제됐죠. 하지만 이걸 쿠빌라이 칸이 몽골인의 방식으로 뒤집는 게 참 재밌더라고요. 어느 것 하나 배척하지는 않지만,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을 특히 높이 평가하는 건 확실히 자신들과 기질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동안 중국을 통치했던 지배자들과 다른 시선에서 보기 때문에, 사회 체제나 문화 예술 같은 것들도 완전히 다르게 변하고 있었던 것 같고요. 역참 같은 게 대거 설치된다든지, 예술이 급격하게 발전했다든지... 이렇게 생각하면 섞이는 게 오히려 기회인지도 모르겠단 말이죠. 물론 한족에게 원나라의 지배는 우리가 일본에게 지배 당한 것과 비슷한 아픔이겠지만, 이 부분은 좀 더 생각할 필요가 있겠군요. 섞임을 역사적으로 본다는 게 과연 무엇일 수 있을지..!?
우리는 주변적인 것을 열등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사마천은 주변을 '미개한 곳’으로 퉁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왜 우린 중심을 중시하고 주변을 무시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 중심의 기준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자본화된 토대일 수도 있고 그래서 황폐해진 곳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지도와 함께 읽는 후기는 한나라와 그 주변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쿠빌라이처럼 경계인으로서 중국을 통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느껴보고자 합니다. 또 쿠빌라이 칸의 모습도 '선명하게' 볼 수 있어 눈 호강을 하고 갑니다.
정주민에게, 특히 인과 의, 효 같은 것을 중시하는 한나라에서 '사농공상'은 엄격한 위계질서, 사회적 평가가 전제됐죠. 하지만 이걸 쿠빌라이 칸이 몽골인의 방식으로 뒤집는 게 참 재밌더라고요. 어느 것 하나 배척하지는 않지만,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을 특히 높이 평가하는 건 확실히 자신들과 기질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동안 중국을 통치했던 지배자들과 다른 시선에서 보기 때문에, 사회 체제나 문화 예술 같은 것들도 완전히 다르게 변하고 있었던 것 같고요. 역참 같은 게 대거 설치된다든지, 예술이 급격하게 발전했다든지... 이렇게 생각하면 섞이는 게 오히려 기회인지도 모르겠단 말이죠. 물론 한족에게 원나라의 지배는 우리가 일본에게 지배 당한 것과 비슷한 아픔이겠지만, 이 부분은 좀 더 생각할 필요가 있겠군요. 섞임을 역사적으로 본다는 게 과연 무엇일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