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2학기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군요! 주역 에세이를 완성하기 위해 기진맥진하신 상태겠지만, 아직 저희에게는 마이너 세계사 2학기의 마무리 칭기스 칸과 쿠빌라이 칸의 인물 열전이 남아있습니다! 저와 은주쌤은 칭기스 칸을, 문빈과 힐데쌤은 쿠빌라이 칸을 쓰기로 했죠. 유목민처럼 마지막 시간까지 달려가보죠!
지리와 인간
역사적으로 긴 시간을 다룰 때에만 보이는 게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역사는 시간에 기반한 학문이지만, 사건사에 익숙한 우리는 대체로 인간의 시간을 가져옵니다. 하지만 역사에는 인간의 시간 외에 다른 존재들의 시간도 있습니다. 가령, ‘땅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번에 읽은 〈회남형산열전〉은 땅의 시간을 다루는 사마천의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사마천은 인물이 아닌 회남과 형산이라는 지형의 열전을 썼습니다. 독특하게도 한 인물의 관점이 아니라 지형의 관점으로 그 시대를 설명하려고 한 거죠. 〈회남형산열전〉에 대한 사마천의 평가에서도 그가 인간은 땅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존재라고 생각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회남왕과 형산왕은 골육지친으로 강토가 사방 천리이며 제후에 나열되었으나, 번신의 직무를 준수하여 황제를 보좌하는 데 힘쓰지 않고, 오히려 사악하고 부정한 계획을 품어 반역의 일을 도모하여 마침내 부자가 두 차례나 나라를 망하게 하여 각기 자신의 몸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는 왕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며, 그곳의 풍속이 두텁지 않아 신하들이 점점 물들어 그렇게 된 것이다. 무릇 형초의 사람들은 날쌔고 용맹스럽고 가벼우며 사나워 난을 만들기 좋아하였으니, 이는 예로부터 기록된 바이다.”
회남, 형산 일대의 지역(현재의 안휘성 일대)은 유방 때부터 문젯거리였습니다. 초대 회남왕 경포는 반란을 일으켰고,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킨 주역 오나라(현재의 상해)가 인근에 있었죠. 아마도 사마천은 역사적으로 살펴보니 유독 이 지역에서 자꾸 문제가 터지는 게 이상했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이쪽 인근에서 반란이 자꾸 일어납니다. 〈오태백세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이 지역 사람들은 유독 황하 유역의 사람들과 섞이기를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 기질적으로 그런 사람들만 모인 건지, 아니면 이 땅에 태어나는 사람들의 본성이 그렇게 되는 건지 애매합니다. 게다가 이 둘 중 어느 것을 원인으로 택해도 문제는 복잡합니다. 왜냐하면 이쪽 지역 사람들을 배제할 명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마천은 그 땅에 살았기 때문에, 그런 기질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란을 계획했던 회남왕 유안은 애초에 호전적인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책 읽기와 거문고를 좋아한 도가적 인물에 가깝죠. 그런데도 반란을 계획하고 망하게 된 건 그곳의 풍속, 그러니까 그 지형으로부터 형성된 고유한 생활양식에 의해서라는 거죠. 사마천은 그쪽 지역의 사람들의 날쌤과 용맹스러움, 가벼움, 사나움, 난을 일으키기 좋아함은 예로부터 기록된 것이라고 하면서 이런 기질이 역사적으로 오래된 것임을 지적합니다.
생각해 보면, 함께 지내는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땅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도 매우 당연한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도 기운이 있는 것처럼, 땅에도 기운이 있습니다. 우리 몸에는 여러 존재들이 남긴 흔적이 있을 거고, 그 중에는 분명 땅이 남긴 흔적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점점 더 땅의 기운을 별로 못 느끼는 시대로 가는 것 같아요. 땅은 그저 땅값으로만 평가되고, 우리는 어디에 살아도 아파트, 오피스텔 등 똑같이 생활합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땅의 기운이 다해서 어디에 살아도 똑같아진 건지, 인간의 기운이 땅의 기운을 다 균질화한 건지, 아니면 땅의 기운을 무시하면서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건지. 과연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수성(守城)의 어려움
읽으면 읽을수록 쿠빌라이 칸은 통치자로서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칭기스 칸은 뛰어난 정복자이긴 하지만 뛰어난 통치자로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반면에 쿠빌라이 칸은 통치 불가능한 요소들을 가지고도 제국을 운영했다는 점에서 이보다 더 뛰어난 통치자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이리 여러 번 지적했듯이, 쿠빌라이 칸은 정주민과 유목민의 공존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때로 정주민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그들과 동화되는 것 같다가도, 상인 같은 계층을 우대함으로써 유목적 특성을 정주 사회에 도입하기도 했죠. 물론 양쪽 다 쿠빌라이 칸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 둘을 포용하면서 몽골 제국을 운영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밖으로는 카이두를 비롯해서 자신이 칸 중의 칸임을 인정하지 않는 유목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에, 안팎으로 골치가 엄청 아팠을 게 분명합니다. 게다가 말년에 나름 믿었던 신하들도 죽고, 현명한 조력자이자 사랑했던 아내 차비도 죽었으니 스트레스가 주체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말년에 사람 보는 눈을 잃었다’, ‘통풍에 걸리고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뚱뚱해졌고, 과음을 일삼았다’고 하는데, 쿠빌라이 칸의 상황을 그리면 그릴수록 충분히 이렇게 망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쿠빌라이 칸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나라를 잃은 한족의 원한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쿠빌라이 칸의 통치가 어려웠던 이유는, 정주민과 유목민을 모두 포용해야 하는 쿠빌라이 칸의 입장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나라를 되찾고자 분발한 중국인들의 욕망도 한몫 했습니다. 특히 끝까지 항전했던 남중국인들이 그렇죠. 이들은 원나라의 신하가 된 이들을 ‘변절했다’고 손가락질하면서 게릴라전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원나라가 망하고(1368년), 쿠빌라이 칸을 비롯한 원나라의 역사를 정리할 때도 최대한 어리석게 묘사하려고 노력했죠. 밖에서 쿠빌라이 칸의 권위에 도전하려고 한 세력은 없었지만, 내부적으로 쿠빌라이 칸을 무너뜨리려는 움직임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쿠빌라이 칸은 이 모든 혼란과 분열을 감수하면서 제국을 통치했습니다. 이런 부분은 모리스 로사비가 정확하게 잘 짚어낸 것 같아요. 기록된 내용에서는 쿠빌라이 칸의 뛰어난 통치자의 면모가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존재 자체가 완벽한 성인처럼 기록하거나 반대로 흉악하고 어리석은 결점 투성이로 그리죠. 그러나 모리스는 쿠빌라이 칸에 대한 왜곡된 기록에서 그의 역량을 포착하려고 매우 노력했습니다. “그는 당시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인구가 많은 제국을 단순히 착취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통치하고자 했다. 유목적인 유산을 이어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비전을 지녔던 그는, 타문화에 대한 배려가 거의 드물었던 시기에 다종다양한 신민들의 행복을 지키고 그들의 이익을 촉진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치ㆍ경제 정책을 통해, 문화와 상업에 대한 지원을 통해,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통해, 그는 아시아를 몽골의 헤게모니 아래 통합하고자 했다.”(377)
하지만 원나라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이미 쿠빌라이 칸의 통치 말년에 분열의 조짐이 슬슬 보였는데요. 이는 쿠빌라이 칸의 통치가 특별히 잘못됐다기보다 애초에 원나라의 상황이 분열의 원인을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정 적자임에도 유목 제국의 주인으로서 계속해서 정복 원정을 떠나야 했고, 유목민과 정주민은 계속해서 대립각을 세웠죠. 그럼에도 원나라가 다음 후계자에게 넘어갈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쿠빌라이 칸의 뛰어난 통치 덕분이었습니다. 비록 원나라는 오랫동안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이게 쿠빌라이 칸의 통치술을 폄하할 이유가 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은 감당하지 못할 상황을 오랫동안 책임졌다는 점에서 뛰어났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의 제국, 사회를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쿠빌라이 칸을 통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확실히 칭기스 칸이 위대한 정복자라면, 쿠빌라이 칸은 뛰어난 통치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존재라는 생각도 듭니다^^! 허나... 이번 주에 읽은 쿠빌라이 칸의 말년의 모습은 쓸쓸해 보였습니다. 가장 신뢰하던 신하(유학자 그룹)들이 다 죽고, 사랑하는 아내 차비+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진금의 죽음은 그를 크게 흔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저는 쿠빌라이 통치 말년에 곳곳에서 터진 분열의 모습을 보면서, 역으로 쿠빌라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을 해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종교 간의 갈등을 조율하고, 서로 다른 지역&민족 간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고, 여러 타자들을 단순히 착취한 게 아니라 통치하려 했다는 점은 정말 훌륭한 것 같습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