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다음 시간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몽골비사》 2~3장, 《하버드 중국사 당》 2장을 읽어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문빈에게 부탁할게요~!
중심과 주변, 두 개의 강 이야기
《하버드 중국사 당》은 단순히 시간에 따른 사건들의 나열로 당나라의 역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당나라의 역사에서 중요한 테마를 정리하고, 당시의 문학이나 인구 통계, 제도 같은 것들을 참고하면서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하죠. 이번에 읽은 <당 제국의 지리적 경관>에서는 당나라의 심상지리가 어떻게 형성돼 있는지를 보여줬습니다.
흔히 ‘중심’을 생각하면 원의 한 가운데를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 ‘중심’은 그런 양적인 거리감으로만 규정되지 않습니다. 진나라 시대 때부터 중국에서 ‘중심’은 황하였고,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수도 장안과 제2의 수도인 낙양이었습니다. 지도상으로는 서쪽에 위치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여기서 장안과 낙양이 중심이 된 이유는 식량 생산량이 특출하거나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됐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나라 때부터 수도였고, 통일 한나라에서도 수도였기 때문에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도시여서 중심이 된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중심이란 지리적 심상은 역사성과 연관된 개념인 거죠.
문제는, 이러한 인식이 사람들로 하여금 주변에 대한 폄하, 그러니까 양자강 주변에 대한 기피로 이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중심에 가려고 노력하지 주변으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살기에는 중심보다는 주변이 훨씬 낫습니다. 중심지, 특히 장안 같은 경우에는 식량 생산이 용이한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주변 도시들로부터의 식량 보급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써 놓고 보니 지금 서울이 생각나네요. 사람들이 비싼 땅값임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자꾸 인구가 몰려드는 이유도 장안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일자리를 찾는다든지 문화적으로 무언가를 누리기 위해서라든지 등등 사람을 만나고,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수도로 가야 하는 건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장안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과정에서 사회ㆍ정치적 차원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장안은 황제가, 낙양 일대의 중원 평야는 절도사들(제후와 같이 그 땅을 다스리는 관직)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절도사들은 인구가 늘어나면서 자신들의 땅조차 감당하기 힘들어지자 점차 장안으로 식량을 보내지 않았죠. 황제도 안녹산의 난(755~763)을 겪으면서 절도사들에 대한 불신이 생겼고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강을 통해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대규모의 토목 건설이 진행됐습니다. 양자강에서 황하로 연결되고, 장안까지 이를 수 있는 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한 거죠. 덕분에 ‘오랑캐가 사는 땅’으로 인식됐던 양자강이 조금씩 개발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부유하지만 상대적으로 비군사화된 남부가 전략적인 이유로 북부에 위치한 수도를 실질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지속시켜 주는 지정학적인 구조는 후기 중화 제국의 전형”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중국의 역사를 왕조의 교체가 아니라 황하와 양자강의 위상이 어떻게 변하는가로 서술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역사와 신화의 관계
《몽골비사》로 다시 칭기스 칸의 생애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라시드 앗 딘의 《칭기스 칸 기》에서 봤던 내용들이 다시 떠오르기도 하고, 새롭게 보이는 지점도 있었죠. 무엇보다 좀 더 스토리를 만들어서 서술하기 때문에 눈에 잘 들어오기도 하고요. ㅋㅋ
그런데 새삼 역사와 신화의 관계가 궁금해졌습니다. 흔히 역사는 사료로 확인할 수 있는 영역이고, 신화는 공동체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생각되죠. 얼핏 둘은 대립적으로 이해되기도 하는데요. 그런데 이번에 읽은 《몽골비사》도 그렇고, 지난번에 읽은 《사기》에서도 그렇고, 사료로 증명할 수 없는 신화와 사료로 증명되는 신화는 하나의 연속선 위에 놓여 있습니다. 《몽골비사》에서는 칭기스 칸의 선조 ‘보돈차르’의 탄생을 신화적으로 묘사하죠. ‘알란 미인(=알란 코아, 알란 고아)’이라는 과부가 “밤마다 밝은 노란색 사람이 게르의 천창이나 문의 위 틈새로 빛으로 들어와” 배를 만지고 갔더니, 세 아들을 낳았다고 하죠. 《사기》에서도 ‘뼈대’에 해당하는 《본기》는 오제(五帝)라는 신화를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았죠.
토론에서는 이에 대해 둘은 대립적이라기보다 보완적이란 얘기가 있었습니다. 역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우리가 이 시공간에서 어떤 삶을 보냈는지를 돌이킨다면, 신화는 ‘땅’이 우리를 규정하는 바, 다시 말해 집단정신 같은 것을 표현한다는 거죠. 그리고 역사가 ‘인간들’에 한정해서 쓰였다면, 신화는 인간이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죠. 근거를 들면서 토론한 건 아니지만, 저한테는 그럴듯하게 들렸습니다. 어쨌든 핵심은 역사와 신화가 대립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데요. 그렇다면 역사와 대립하는 것은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사료로 입증 불가능한 것들이 역사와 대립하는 게 아니라면, 무엇이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될까요? 흐음... 고민이 됩니다.
보돈차르, 칭기스 칸 이전의 칭기스 칸
(의자에 앉은 게 알란 코아고, 바로 오른쪽에 있는 파란 옷을 입은 남성이 보돈차르입니다.)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는 아직 칭기스 칸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칭기스 칸과 비슷한 삶을 산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 있었죠. 바로 알란 미인의 막내이자 칭기스 칸의 선조인 ‘보돈차르’입니다. 왜 많고 많은 선조 중에서 굳이 보돈차르를 주목했을까요? 나중에 몽골 역사에서는 보돈차르를 몽골 부족을 세운 최초의 족장으로 거론하는데요. 실제로 보돈차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몽골 부족을 누가 결성했는지는 사료로 입증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들도 나중에 원나라 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종합한 결과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돈차르가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스 칸과 비슷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보돈차르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전사로서의 재능이 출중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보돈차르' 뒤에 '바보'를 뜻하는 '문카그'라는 말도 덧붙었다고 합니다. 다른 형제들도 ‘어리석고 약하다’고 평하며 동등한 형제로 대해주질 않았다고 하죠. 어쩔 수 없이 떠날 수밖에 없었던 보돈차르는 나중에 다시 형제들과 만나고, 자신만의 부족을 규합함으로써 몽골 제국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몽골 부족을 세우는데요. 어쨌든 전사로서 각성하는 장면이 꽤 쇼킹합니다.
보돈차르는 형제들과 헤어진 뒤, 매를 잡아서 길들였습니다. 아마도 전사로서의 능력을 각성한 것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싶은데요. 보돈차르는 나중에 자신이 음식을 얻어먹은 부락을 “만만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형제들에게 “우리가 그 사람들을 약탈하자!”라고 제의하죠. 그 뒤에 여자를 약탈하고, 아이를 낳아 자신만의 부족을 형성하게 됩니다. 여기서 전사로서의 능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해 부족에서 쫓겨나고, 그러나 나중에 충분히 성장하게 된 다음에 다시 돌아와 부족을 통솔하게 되는 모습이 어쩐지 칭기스 칸의 유년기와 비슷하게 보였습니다. 칭기스 칸도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은 뒤에 자신이 속했던 부족으로부터 쫓겨나 매우 비참하게 살다가, 먼 곳에서 전사로서의 재능을 개화한 뒤에 돌아오죠. 어쩌면 칭기스 칸의 생애에 맞게 보돈차르의 생애도 변형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의문은 실제로 그곳을 여행하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함께 들어야 하는데... 몽골 사람들은 '보돈차르'라는 인물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칭기스 칸과 어떤 관계를 설정할지 궁금하네요.
당나라 중심지(장안과 낙양)는 식량 공급에 매 시기마다 문제가 있었다는 게 흥히로웠습니다! 농사하기에 부적합한 땅임에도, 식량을 다른 땅으로부터 끌어와야 하는 수고로움(대운하 건설)을 감당하면서까지 그 땅을 수도로 삼았다는 건 재밌는 지점인 것 같네요. 그리고 정말 우리나라의 서울로 상상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역사서마다 '신화'가 있다는 것도 재밌는 지점인 것 같아요. '역사'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과거의 사료를 기반으로 작성된 객관적이고 진실된 서술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한 '역사' 안에 신화적 요소가 곳곳에 등장한다는 점은 생각해볼 지점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