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사기 세가>에서는 양 효왕 세가, 오종 세가, 삼왕 세가를 읽었습니다. 저는 양 효왕 세가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양 효왕은 효경제(황제)와 같은 어머니(두 태후)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두 태후는 특히 양 효왕을 총애하고 아꼈습니다. 그래서 효경제(황제) 다음으로 동생 양 효왕이 뒤를 잇기를 바랐지만, 대신들이 황제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설득했고 이후 양 효왕을 후사로 삼는 일은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신들을 원망한 양 효왕은 자신을 반대한 대신들을 몰래 살해하고, 그것을 알게 된 경제는 양 효왕을 원망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인간의 복잡한 관계와 미묘헌 감정의 얽힘을 잘 보여줍니다. 두 태후는 막내 아들인 양 효왕을 전적으로 총애하고, 양 효왕은 권력욕에 효경제에 반기를 들었고, 효경제는 어머니(두 태후)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걱정스러워 동생이 반기를 든 사건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효경제의 신하들 또한 효경제의 어려움을 알고 이 사건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또 머리가 아픕니다. 결국은 양 효왕의 신하들(공손궤와 양승)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 짓습니다. 저희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세상이 원리원칙, 명분으로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나눴고, 황제와 그 가족들 그리고 신하들의 복잡한 관계와 감정의 얽힘 그리고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이 재밌었다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중심과 주변의 관계
그리고 저희는 <사기 세가>의 전체적인 구도를 ‘중심과 주변의 관계’로 보면 어떨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기 세가>의 시작은 ‘오태백 세가’이고 끝은 ‘삼왕 세가’입니다. 사마천은 왜 ‘오태백 세가’로 시작해서 ‘삼왕 세가’로 끝을 맺은 것일까요? ‘오태백 세가’는 한 제국의 ‘주변부’라고 할 수 있는 오나라의 이야기입니다. ‘삼왕 세가’의 이야기는 권력을 중앙에서 ‘주변’으로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이전에 ‘오종 세가’의 이야기는 나누어진 권력이 부패하여 중앙으로 통합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마천은 <사기 세가>를 통해서 ‘주변적인 힘’을 집중해서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닐까요?
그리고 저희는 사마천이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분열과 통합’의 관점으로 본 게 아닌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보통 ‘중심’과 ‘주변’의 관계는 투쟁과 대립의 관점으로 봅니다. 한 제국이 중심이라면 그 중심적 움직임을 방해하는 주변(유목민족)을 대립적으로,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일상적으로도 내 생각(중심축)이 공고할 때 다른 사람들의 생각(주변)은 내 생각에 반하는 것이고, 방해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분열과 통합’의 관점으로 보면 주변을 새롭게 사유할 수 있습니다. 한 제국은 주변부적인(유목민족의 운동) 운동이 없었다면, 한 제국일 수 없고. 사유는 주변 타자들과 분열하고 통합하고 섞이는 과정이 없이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중심과 주변은 끌어당기고 밀어내며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사마천은 <사기 본기>의 중심적인 운동만 바라본 게 아니라 <사기 세가>, <사기 열전>을 통해서 중심을 움직이는 주변부적인 움직임에 힘을 많이 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역동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기>를 읽으며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계속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티무르와 칭기스 칸의 차이
이번 주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는 칭기스 칸과 같은 전투 수행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칭기스 칸처럼 정복국을 통치하지 못한 영웅 티무르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티무르는 칭기스 칸과 같은 몽골인이 아닌, 트란스옥시아나 지역 출신의 투르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강인함은 몽골인들 그리고 심지어 칭기스 칸 못지않았습니다. “커다란 머리, 붉은 빛을 띤 얼굴색, 그리고 훤칠한 키의 절름발이 사나이 – 언제나 칼에서 자신의 손을 떼지 않고 그의 귀까지 활시위를 당기던 정확한 궁수이기도 했던 불구자 – 는 온세상을 누비고 다니며 과거 칭기스칸처럼 자신의 시대를 지배했던 것이다.” (P588)
하지만 칭기스 칸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티무르는 제국을 통치할 역량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칭기스 칸은 그가 죽었어도 그의 제국은 후손들이 계승하여 오랜 시간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티무르의 제국은 그가 죽고 나서 걸출한 사람들에 의해 계승됐지만 금세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칭기스 칸과 티무르의 통치 차이는 정복 활동을 보면 더욱 잘 드러납니다. 칭기스 칸의 정복 활동은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몽골 원정, 극동 원정, 투르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원정 등등으로 쭉- 달려 나갑니다. 그러니 티무르의 정복 활동은 뒤죽박죽이었습니다. 칭기스 칸은 정복한 지역을 확실하게 처리하고 다른 지역을 정복했다면, 티무르는 정복한 지역을 확실하게 통제하지 못하여 정복지에서는 계속 반란과 저항이 일어났고, 그 저항한 지역을 또다시 정복하러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티무르는 똑같은 지역을 여섯 번, 일곱 번 정복하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저희는 정복지를 확실하게 통치했던 칭기스 칸의 통치술에 놀랐고,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전투하고, 또 전투에서 승리하는 티무르의 전투력에도 놀랐습니다. 그리고 칭기스 칸은 확실히 네트워킹 능력이 뛰어났던 것처럼 보입니다. 지리적 환경이 다른 사람, 생활 양식과 문화가 다른 사람, 언어와 종교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통합할 수 있었는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티무르를 보면 다른 민족을 통치하는 게 정말 쉽지 않다는 사실을 역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 저자 ‘르네 그루쎄’는 역사의 흐름에서 두 가지 종류의 지배 양상을 분류한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첫 번째 종류는 중국, 인도, 이란과 같은 고대 정주문명이 주변에 대해 행사했던 지배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해서 ‘주변’ 지역을 조금씩 동화해가면서 지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종류는 ‘유목민의 거친 힘’으로 표현됩니다. ‘르네 그루쎄’는 “그것은 그들이 굶주렸기 때문에 나오는 힘이었고 게걸스러운 늑대가 어떤 수단을 쓰든 언젠가는 가축을 쓰러뜨리고야 마는 것과 같은 힘”(589)이라고 말합니다. 주변을 나와 동화하기 위한 지배가 아닌 야생적인 힘을 분출하는 것으로서의 지배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동화하려는 정주민의 욕망과 힘을 분출하려는 유목민의 욕망을 살짝 엿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목 제국의 ‘관용’은 이러한 야생적인 힘으로부터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유목 제국의 ‘관용’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는지 앞으로 책을 읽어가면서 찾아보겠씁니다!!
[양효왕 세가] 는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접하고 있는 이야기의 원형과 같군요. 권력욕에 눈 먼 캐릭터로 양효왕을 그리는 것도 클리셰적 쾌감을 주겠지만, 누구 입장에서 이야기를 구성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얘기가 만들어질 듯. 양효왕이 살인에 이르기까지 작동한 상황과 관계를 원리원칙으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가진 존재이며, 또 서로 관계로 이뤄져 있기 때문인거죠. 이런 생각도 드는데요... 형과 어머니, 대신들의 지극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양효왕이 살인에 이르게 된 것은, 오히려 좋다고 생각한 자신들의 마음, 선택, 신념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니 양효왕의 측근에게 책임을 묻게 하는(뉴스에서 자주 보는!) 것으로 또 불선을 저질러 양효왕은 원래 나쁜 사람이었어 라고 영원히 구제할 수 없게 된 것... 이 얘기를 사랑이란 무엇인가로 말할 수 있다면, "자식, 부모, 나라, 주군, 권력에 대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되는 질문이 남습니다. 뜻하는 대로 되지 않고 이렇게 헛되고 헛된 것인데도, 기어코 사랑하게 되고 마는...ㅎㅎ(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를 향한 에로스'!!!!q(≧▽≦q))
문란드 샘이 "[사기]를 읽을 수록 역동적이다!" 라고 ... 그 살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일까? 규창샘이 지난 댓들에서 요런 말도 했죠. "사기의 구성, 읽기 방식은 유목적 운동과 매우 유사하죠. 끊임없이 접속시킴으로써 모든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고유하게 작동하게 만드니까요" 라고. [사기]를 사마천의 영화라고 상상해 보면, 뛰어난 편집(본기, 세가, 열전)능력에 감탄하게 되는 것은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일 것 같아요. 또 거기에 고유하게 작동되는 해석자의 접속 역량도 [사기]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닐까...
[티무르와 징기스칸의 차이]에서 "저희는 정복지를 확실하게 통치했던 칭기스 칸의 통치술에 놀랐고,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전투하고, 또 전투에서 승리하는 티무르의 전투력에도 놀랐습니다." 요 부분 넘 ㅋㅋㅋㅋ 그 놀람 가운데, 두 인물의 성공과 실패, 그 조건과 차이를 잘 설명해 주셔서 재밌었어요.
이번 편도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해여~~ (마이너스 형제들, 파이팅!!!! ╰(*°▽°*)╯)
힐데
2023-04-20 09:13
후기를 읽으니, 인간의 욕망과 그로인해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생각이 더 복잡해집니다. 경제가 전숙과 예계주에게 양효양의 모반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자신이 이 사건을 직접 해결할 수도 있었을텐데,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기엔 미묘한 힘관계가 얽히고 설켜 있는 것이겠이요. 분명 양효왕은 처벌받는 것이 마땅했겠지만 경제의 신하들은 양효왕이 모반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두 태후와 경제는 기뻐하지요. 사기는 이런 신하들의 판단을 경전의 이치를 잘 살핀 자의 태도로 봅니다. 전체 흐름속에서 사건을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양효왕 세가] 는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접하고 있는 이야기의 원형과 같군요. 권력욕에 눈 먼 캐릭터로 양효왕을 그리는 것도 클리셰적 쾌감을 주겠지만, 누구 입장에서 이야기를 구성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얘기가 만들어질 듯. 양효왕이 살인에 이르기까지 작동한 상황과 관계를 원리원칙으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가진 존재이며, 또 서로 관계로 이뤄져 있기 때문인거죠. 이런 생각도 드는데요... 형과 어머니, 대신들의 지극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양효왕이 살인에 이르게 된 것은, 오히려 좋다고 생각한 자신들의 마음, 선택, 신념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니 양효왕의 측근에게 책임을 묻게 하는(뉴스에서 자주 보는!) 것으로 또 불선을 저질러 양효왕은 원래 나쁜 사람이었어 라고 영원히 구제할 수 없게 된 것... 이 얘기를 사랑이란 무엇인가로 말할 수 있다면, "자식, 부모, 나라, 주군, 권력에 대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되는 질문이 남습니다. 뜻하는 대로 되지 않고 이렇게 헛되고 헛된 것인데도, 기어코 사랑하게 되고 마는...ㅎㅎ(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를 향한 에로스'!!!!q(≧▽≦q))
문란드 샘이 "[사기]를 읽을 수록 역동적이다!" 라고 ... 그 살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일까? 규창샘이 지난 댓들에서 요런 말도 했죠. "사기의 구성, 읽기 방식은 유목적 운동과 매우 유사하죠. 끊임없이 접속시킴으로써 모든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고유하게 작동하게 만드니까요" 라고. [사기]를 사마천의 영화라고 상상해 보면, 뛰어난 편집(본기, 세가, 열전)능력에 감탄하게 되는 것은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일 것 같아요. 또 거기에 고유하게 작동되는 해석자의 접속 역량도 [사기]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닐까...
[티무르와 징기스칸의 차이]에서 "저희는 정복지를 확실하게 통치했던 칭기스 칸의 통치술에 놀랐고,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전투하고, 또 전투에서 승리하는 티무르의 전투력에도 놀랐습니다." 요 부분 넘 ㅋㅋㅋㅋ 그 놀람 가운데, 두 인물의 성공과 실패, 그 조건과 차이를 잘 설명해 주셔서 재밌었어요.
이번 편도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해여~~ (마이너스 형제들, 파이팅!!!! ╰(*°▽°*)╯)
후기를 읽으니, 인간의 욕망과 그로인해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생각이 더 복잡해집니다. 경제가 전숙과 예계주에게 양효양의 모반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자신이 이 사건을 직접 해결할 수도 있었을텐데,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기엔 미묘한 힘관계가 얽히고 설켜 있는 것이겠이요. 분명 양효왕은 처벌받는 것이 마땅했겠지만 경제의 신하들은 양효왕이 모반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두 태후와 경제는 기뻐하지요. 사기는 이런 신하들의 판단을 경전의 이치를 잘 살핀 자의 태도로 봅니다. 전체 흐름속에서 사건을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