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과 주변을 주제로 제국과 유목을 알아보던 마이너 세계사 1학기가 어느새 정리만을 남겨두고 있네요. 다음 주에는 간단하게 몽골 제국 지도 몇 개 그리고, 이번 학기에 우리가 배운 것을 유튜브 영상으로 정리하려고 합니다.
① 왜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공부해야 할까?
② 역사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무엇일 수 있을까?
첫 번째 질문은 2학기에 대한 홍보이자(ㅋㅋ), 우리가 2학기를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와 연관됩니다. 왜 우리와 연관 없는 중앙아시아, 그것도 과거의 칭기스 칸과 쿠빌라이 칸 같은 인물들을 공부해야 할까요? 그들을 공부하는 게 우리의 어떤 지점을 건드릴 수 있는 걸까요?
두 번째 질문은 사실 두고두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번에 공부하고, 영화 <아이카>를 보면서 각자 느낀 바가 있었던 것 같아요. 생각을 정리해서 목요일에 얘기를 나눠보죠!
영화 <아이카>, 고통을 마주하는 고통
“울 힘도 없다.” 이 말을 실감할 수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간단히 스토리를 소개하자면, 영화 <아이카>는 모스크바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중앙아시아 출신 불법 이주 노동자 ‘아이카’의 이야기입니다. 아이카는 재봉가게를 열어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모스크바에 왔지만, 현재 그녀에게 남은 것이란 언제든지 잡혀갈 수 있는 불법 체류자란 신분과 쉽게 갚기 힘든 사채입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아이카의 처지는 이제 막 아이를 출산해서 수시로 고열과 두통에 시달리고, 과도한 하혈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일자리를 구하지 않으면 사채업자들이 위협하고, 몸을 돌보자니 그럴 만한 여유도 없습니다. 그녀가 돌파구로 선택한 건 아이를 사채업자들에게 넘겨 빚을 변제하는 것이었는데요. 영화는 사채업자들에게 아이를 넘기러 가던 중, 아이가 울자 모유 수유를 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카의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
보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참담하지만, 영화 <아이카>에서 보여주는 건 실제로 중앙아시아의 많은 노동자들이 모스크바에서 겪고 있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중앙아시아의 GDP 중 많은 부분이 해외 이주 노동자들의 송금이 차지하고, 그 비율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같은 경우에는 50% 이상이라고 하죠. 이는 그만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떠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과거 소련으로 묶였던 러시아, 그 중에서도 모스크바는 중앙아시아 노동자들이 성공을 노리고 있는 유력한 장소고요. 국가적 차원에서는 자신들의 경제를 위해 국민을 해외 이주 노동자로 보낸 것이지만, 개인적 차원에서는 경제적 도약을 위해 일자리 없는 고향을 떠나온 것이죠. 영화에서는 그러한 노동자들이 보이지 않게 모스크바 곳곳에 스며들어 있음을 여러 장면에서 암시합니다. 그리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깊은 실패의 수렁에 빠지고 있기도 하고요.
영화를 보면서 이런 질문이 들었습니다. “나는 아이카와 같은 처지가 아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새삼 제가 매우 운이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걸 실감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다행이라고만 여길 수는 없었습니다. 처지를 비교할 수 없지만, 이런 질문이 숙제처럼 남더라고요. “내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도 누군가에 대한 돌봄을 나를 위하듯 할 수 있을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저는 왜 아이카가 영화 내내 어떤 힘든 상황에도 울지 않다가 마지막에 모유 수유를 할 때 우는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울음은 비참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깨달음이라기보다 이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복잡함에서 비롯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이의 배고픔에 반응해서 모유를 줬을 때 아이카는 비로소 현실을 인식하게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유를 주지 않으면 유방에 염증이 생기지만, 모유를 주려면 아이를 사채업자에게 넘기지 말아야 한다. 전자를 택하자니 사채업자와 여러 경제적 압박이 문제고, 후자를 택하자니 당장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생각해보면 현실은 이런 딜레마와 난제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아이카는 빚을 갚고, 재봉가게를 차림으로써 성공한 삶을 만끽하려고 했지만, 그런 삶이 성공일 수 있는 건 사실 우리의 망상이죠.
아이카가 현실을 인식하고, 그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실마리는 ‘아기’에게서 비롯됩니다. 아기와의 관계 속에서만 현실이 매우 복잡한 관계가 얽힌 해결 불가능한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저는 아이카와 같은 처지는 아니지만, 아이카 못지않게 현실을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공부하면서 좋은 소리들로 뻔하게 도배하는 저를 다시 돌아볼 수 있었는데요. 타자가 없이는 망상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현실을 살아갈 수도 없고, 공부가 독이 될 수 있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남았습니다. 타자를 선택사항으로 남겨둘 때 결국 자신을 감각할 수도 없다는 걸 실감하게 됐습니다. 여러분들도 시간이 되시면 꼭 보시죠!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 우리가 이해해야 할 근대의 이면
의도치 않게, 지난 학기에 공부한 아프리카와 이번에 공부하는 중앙아시아 모두 근대에서 주변으로 배제되고 착취당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역사를 공부하면서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배제와 착취 등 다양한 일들이 일어났던 걸 조금 알 수 있게 된 것처럼, 중앙아시아가 현재 이렇게 살게 된 삶의 모습을 조금은 볼 수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현재 지형은 근대 유럽의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형성되었고,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 또한 소련의 붕괴라는 근대의 사건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유목사는 근대 이야기를 많이 담아내지는 않지만, 그 땅에 어떤 이야기들이 있었고 그게 어떻게 변형되며 이어졌는지 조금은 알게 됐습니다.
이번에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를 읽으며 알게 된 것도, 누구나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번에 가장 많이 반복된 구절은 ‘칭기스 칸의 혈통만이 통치할 자격이 있다’는 관념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관념이 유목민들에게 절대적이게 됐는지도 궁금하긴 했지만, 다르게 보면, 유목민들도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고 지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만들고, 믿고, 수정하는 것. 이건 어떤 문명이든, 어떤 지형이든 살아가는 존재라면 발휘하게 되는 일종의 본능적 행위인 것 같습니다.
어떤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하지 않고서 그들의 현재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중앙아시아의 현재는 소련의 붕괴, 러시아의 탄생과 매우 밀접합니다. 그들이 경제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네트워크는 과거 소련으로 연결되었던 러시아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흔적은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러시아의 패배는 중앙아시아의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일할 수 있는 경제적 네트워크의 단절로 이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러시아가 승리하기를 바란다고 하죠. 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다소 도덕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바로 실존적인 문제였던 것이죠.
중앙아시아뿐만 아니라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떠나 세계를 떠돌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들만 반기고, 좀 더럽거나 불결하거나 다르다고 느끼는 정말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매우 배타적으로 굽니다. 과거에는 유목민들이 그것을 힘의 논리로 뚫고 어떻게든 섞었던 것 같은데요. 지금은 어떨까요? 어떻게 보면 지금도 모든 것이 섞이는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섞임을 잘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요? 유목민들의 이야기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카는 탈주선이 없어 보이는 처참한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마주치는 우발적 사건에서 비롯된 고통을 겪어내야 한다고 말하지만, 아이카에게 그건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그녀에게 고통을 겪어내라고 하기엔, 그 고통은 해결되지 않는 구조적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나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갓 태어난 아이를 부둥켜안고 있는 것뿐입니다. '길흉은 정( 情)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 있듯이 그녀가 처한 실상은 얻는 것보단 잃는 것이 많습니다. 흉하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10주전 크크랩 첫 시간에 영화 [리바이던]이 1년간 화두로 던져 졌었는데, 마이너 세계사는 영화 [아이카]로 2학기 질문이 이어지는 것인가요? 절묘한 배치, 그러나 너무나 무거운 질문!!! '고통을 마주한 고통' 이라는 말과 사진 속에서 어디에도 닿지 않는 아이카의 시선, 인종도 나이도 모호한 저 투명한 갈색 눈에 이끌려 영화를 봤습니다.
감독은 모스크바 병원에 한해 동안 버려지는 아이가 2백명이 넘는다는 기사를 접하고 이 영화를 찍게 되었다고 하죠. 이주 여성 노동자들이 아이를 버리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왜 내몰리고 있는지, 아이카를 집요하게 쫓는 카메라에 숨이 막혔는데, 저 자신이 아이카의 고통을 마주하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규창샘 말처럼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너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제 시선에 타자의 삶이 얼마큼 들어와 있는지 잘 모르겠고, 삶에 대해 미사여구만 잔뜩... 낭만적이고 관념적으로 나불댔다는 반성, 이마저 또 금방 잊을 것 같고... 그래서 엔딩 타이틀의 그 적막함이 던지고 있는 질문에 답하기 쉽지가 않네요. 자기 질문의 시작이 감독에게는 영화가 된 것처럼, 공부도 그래야 한다는 생각! 자기 삶의 현실에 관심을 갖고 구체적인 질문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겉멋에 헛소리만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주민의 노동을 기반으로 건설현장, 농가, 식당 등이 운영된 지 오래되었다는 말만 들었지, 실감을 잘 하지 못합니다. 만약 누군가 눈을 먹고, 고드름을 따는 것을 봤다면... 지나칠 겁니다. 하나의 비유지만, 우리는 계속 쓱 지나치기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기라고 여겨지는 것들, 또 자기 감정에만 무~~~한 관심~~ 그러고 보니 카메라는 끝까지 아이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왜 그랬는지 묻고 들어주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 카메라의 시선처럼 끝까지 타자의 삶을 진심으로 마주하는 태도를 배워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덕분에 깊은 반성의 시간이 되었고, 앞으로도 마니 반성하면서 지내게 될 것 같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