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페이스 은주쌤의 합류로 마이너 세계사가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강대국의 역사를 공부하는 건 어쩐지 재수가 없어서 변방이라고 불리는 몽골의 역사를 공부한다는 게 끌려서 오셨다고 했었죠. (맞나요?ㅋ) 몽골 역사는 물론 중국 역사도 따로 공부해본 적이 없다고 하셨지만,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해주셨죠. 정보적인 건 모두가 부족하지만 열의만큼은 충분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바로 다음 주 공지사항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사기열전》 중 〈한신노관열전〉, 〈전담열전〉, 〈번역등관열전〉, 〈장승상열전〉을, 《칭기스칸 기》는 〈나이만 군주의 형제인 부이룩 칸과…〉 202쪽까지 읽어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은주쌤이 맡아주셨어요~ 그럼 이번 시간에 나왔던 얘기 몇 가지를 정리하는 걸로 공지를 마무리해보겠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변하니!?”, 우정이란 무엇인가
〈장이진여열전〉의 주인공은 장이와 진여입니다. 사마천은 이 둘이 문경지교(刎頸之交)의 우정을 맺은 걸로 이야기를 시작하죠. 다시 환기하자면, 사마천은 모든 이야기의 주제 혹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을 시작으로 배치합니다. 〈장이진여열전〉에서는 ‘우정’이라 할 수 있는데요. 장이와 진여는 “처음에 빈천한 때에는 서로 죽음을 무릅”쓸 정도로 깊은 우정을 나눴는데, 이후에 “나라를 움켜쥐고 권력을 다투게 되자, 마침내는 서로를 멸망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이걸 두고 ‘상황이 바뀌면 끊어지는 우정은 우정이라 할 수 있을까?’, ‘상황 종속적이지 않은 우정이란 불가능할까?’ 같은 질문들을 나눴습니다.
딱히 답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윤리적 키워드로 ‘우정’이 꼽힌다는 게 새삼 신기했습니다. 사마천이 이들의 우정을 평가하는 범위는 단지 마을에서 의기투합하는 정도가 아니었죠. 진섭, 항우, 유방을 섬기면서 그 아래에서 권력자로 생활했을 때까지를 포함합니다. 즉, 단순히 취향이 공유되는 사람들 간의 우정이 아니라 그보다 무언가가 더 있는 거죠. 전쟁이나 정치 같은 복잡한 상황들도 우정을 시험하고 점검하는 장소로 고려됩니다. 이에 비하면, 지금은 우정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많이 낮아진 것 같기도 해요.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같은 노래에서도 드러나듯, 우정과 사랑이 충돌하는 현상이 자주 드러나요. 사랑이 그만큼 소중해진 걸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지금 우리 시대에서 ‘사랑’을 포함해서 윤리적으로 소중히 여겨야 할 관계 같은 건 없는 것 같기도 해요. 지금 우리는 어떤 것을 주요한 관계 맺음으로 여길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기
사마천이 특히 애정(?)하는 편들이 몇 개 있는 것 같아요. 대표적으로는 천명을 물으며 울분을 토하는 <백이열전>이 그렇죠. 이번에 읽은 <회음후열전>도 사마천이 많이 아낀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죽은 백이숙제에 궁형을 당한 자신의 처지를 대입했듯, 주군을 끝까지 충심으로 섬기고 싶었지만 주군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해 토사구팽을 당한 한신에게 사마천 자신을 본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한신의 이야기는 때를 기다리며 자신을 한껏 낮추는, 이른바 잠룡(潛龍)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다 전란이 시작되고 흘러흘러 유방의 수하가 돼 대군을 통솔하게 되죠. 저는 이때 한신이 ‘자신을 알아봐 준’ 유방에게 완전히 마음을 다한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요. 나중에 제나라 변사 괴통이 와서 한신에게 “천하를 셋으로 나누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면서, 지금 독립하지 않으면 나중에 섬기는 군주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한 적도 있었죠. 이때 한신은 며칠 고민하다 “한왕은 나를 후하게 대해줍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오히려 충성을 다짐했죠. 그리고 유방을 도와서 그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항우를 몰아세우기도 하고요.
사마천은 한신의 이러한 충(忠)을 높게 평가하면서 “한나라에 대한 공훈이 주나라의 주공, 소공, 태공의 공훈과 견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는데요. 그러나 역사에서 한신은 반역자로 죽게 됩니다. 그동안 사기를 읽어온 저희는 개국공신들의 반역은 실제로 그들의 탐욕보다 유방의 유능한 신하들에 대한 의심이 만들어낸 사건이라는 걸 알고 있죠. 사마천은 한신에 대해 “도리를 배우고 겸양하여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더라면”과 같은 말을 남기면서 유방의 의심을 풀어주기보다 그것을 심화한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신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는데요. 한신이 유방으로부터 의심을 사게 된 건, 그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업적 때문이었습니다. 유방은 한신 덕분에 천하를 지배할 수 있었지만, 같은 이유로 한신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죠. 비슷하게 삼국지에서도 양수란 인물이 뛰어난 능력을 숨기지 않고 발휘하다가 조조의 미움을 받아 처형당하기도 했죠.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고 그것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주역>의 메시지란 걸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몽골’의 탄생
사실 ‘몽골’의 역사를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목민이었던 그들의 지난 행적이 상세하게 기록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몽골’이 도대체 언제부터 성립됐고,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역추적할 단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읽기 시작한 《칭기스칸 기》는 몽골 제국에서 쓰인 역사서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합니다. 물론 ‘몽골 제국’ 전체의 관점보다는 그 중에서도 이슬람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 칸의 관점이 많이 들어가 있죠. 첨언하자면, 몽골 제국은 여러 칸 국으로 구별되는데, 지역에 따라 중국, 이슬람, 전통적 유목적 성향이 두드러졌죠. 그리고 《칭기스칸 기》는 다소 이슬람적 서술 방식에 따라 이야기들이 정리돼 있고요. 역경을 겪는 건 이들이 유일한 주님의 선택 받은 존재임을 확인하기 위한 필연적 시련이라고 얘기한다든가, 태초에 칭기스 칸의 계통이 다른 이들을 지배하도록 운명지어졌다든가 하는 것 등이 그렇죠. 이런 건 구별하면서 읽어나가더라도 ‘몽골’이 어떻게 성립했는지 보는 건 매우 재밌었습니다.
책에서는 몽골인들의 조상으로 지금의 아무르 강으로 이주한 유목민들로 지목합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몽골인들의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고 규정하는 대목은 다소 신학적으로 설명하는데요. 몽골인들은 알란 코아의 빛으로 인한 수태를 이야기합니다.
“알란 코아는 과부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집 안에서 잠이 들었는데, 천막 틈새로 한 줄기 빛이 들어와 그녀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놀라 두려워진 그녀는 그것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얼마 뒤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3)
성모 마리아가 생각나는 장면이긴 하지만^^;;, 중요한 건 몽골인들이 알란 코아의 잉태를 자신들의 시작으로 삼았다는 것, 그리고 이는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의식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탄생과 자신들에게 지배당하는 민족에 대한 정당화를 하느님의 선택으로 설명합니다.
신학적인 부분을 걷어내면, 아무르 강 유역에서 유목하던 몽골인들에게는 ‘키타이’라는 또 다른 유목민족과의 대립이 보입니다. 키타이인들은 거란의 페르시아식 발음인데요. 칭기스 칸이 등장하기 전까지 몽골인들은 키타이인들보다 훨씬 세력이 약했습니다. 자주 약탈을 당했고, 키타이 군주가 부르면 그게 함정이라는 걸 알더라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에서는 칭기스 칸의 증조부인 카불 칸이 당시 키타이 군주였던 알탄 칸의 연회에서 죽을 뻔한 일화를 보여줬죠. 물론 카불 칸은 용맹하고 지혜롭게 그 자리를 헤쳐나오지만, 세력상으로는 키타이가 몽골보다 훨씬 강력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 칭기스 칸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지는 않았는데요. ‘몽골’이란 유목 민족이 성립하기까지 어떤 신화적인 이야기가 있었고, 구체적으로 어떤 부족과 갈등을 겪었는지 따라가는 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지난 학기에 읽었던 《중앙아시아사》나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에서 풀리지 않았던 갈증이 이제야 해소되는 것 같아요. ㅋㅋ 다음 시간의 이야기도 기대되네요!
이렇게 후기를 읽으니 토론했던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하고 그냥 지나쳤던 내용도 알게되니,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는 듯합니다. 한신이 때를 파악하지 못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마천의 말에서 때에 맞게 행동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음양소식을 읽는 것이 바로 때를 읽는 일이 된다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찬찬히 생각해 봐야겠네요.
동전의 양면처럼 상황을 종속적으로 만드는 게 우정, 사랑이라면, 그것을 무릅쓰게 만드는 것도 우정, 사랑이기도 한 것 같네요. 그래서 요즘은 아예 그런 종속이 없는 클린한 관계 상태를 자유롭다고... 그래서 외롭고 공허함도 따르죠. 뭐, 정답은 없지만 관계에서 무능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여요. 거기다 삶에서도 뭔가 무릅쓸 만큼 열정을 다 하지 않고 미적지근하게 보내면서... 만성 피로에 시달리고, 덩달아 관계도 피곤하고, 또 외롭다고 울고 악순환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네요━((*′д`)爻(′д`*))━!!!!
이번 공지글을 읽다 보니, 연인간의 사랑과 군주를 향한 충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 또 지난 시즌부터 계속 그 '때'에 대해 고민고민은 이어지고요...
규창샘의 다시 한번 강조한, "가장 중요한 건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고 그것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여전히 그 깊은 의미를 다 헤아리기 어렵지만요...
몽골 역사이야기도 앞으로 흥미롭게 읽으며 따라가겠습니다~~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 ̄▽ ̄)~